823화. 다시, 무림맹으로 (9)
늦은 밤.
창밖의 달을 보며 한잔 술을 걸치던 연위가 입을 열었다.
“들어오너라.”
“예.”
문이 열리고 연지평이 들어왔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더냐?”
“예. 운공을 좀 하였습니다.”
“흐음.”
연지평의 몸을 여기저기 훑어보던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극사기가 온몸에 충만하구나. 고작 며칠 사이에 또 발전한 것이냐?”
“발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굳이 그런 걸 염두에 두지도 않아요, 지금은.”
“허허.”
연위가 기분 좋게 웃었다.
“잘하고 있다. 본가의 무공은 하나같이 점잖으면서도 굴강하여, 쫓기는 마음으로 연성하다 보면 되레 지지부진한 속도를 보인다.”
“예.”
“애써 마음을 비울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면 그뿐이야. 다만, 그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이루는 성취도 달라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
“그저 검(劍)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혼백이 검으로 어디까지 연마될 수 있는가…… 다소 막연하지만 아주 즐겁습니다.”
“또한 고통스럽겠지.”
“예. 그렇기도 합니다.”
“너도 정말 다 컸구나.”
“하하.”
멋쩍게 웃는 연지평의 모습은 이전보다 훨씬 어른스러웠지만, 어릴 때의 치기 어린 순수함 역시 간직하고 있었다.
연위가 웃으며 맞은편을 가리켰다.
“서 있지 말고 앉거라.”
“좋지요.”
연지평이 자연스레 연위의 맞은편에 앉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려워하던 아버지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연지평에게도 강자의 여유가 생겼고, 아버지의 마음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연위의 변화 역시 컸다.
“한잔하겠느냐?”
“좋지요.”
옆에 둔 빈 잔을 건네며, 연위가 물었다.
“이번이 두 번째인가?”
“세 번째입니다.”
“허, 그랬구나. 미안하다. 애비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연지평과 세 번째 가지는 술자리.
그전의 술자리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저 차남과 둘이서만 마시는 술이 어색하기도 했고, 벌써 이렇게 커 버린 아들이 대견하기도 했다. 그래서 할 말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마시자꾸나.”
시원하게 잔을 비우는 두 사람.
연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연지평의 얼굴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크, 독하네요.”
“아직 술이 몸에 받지 않는 모양이다.”
“서너 잔이면 모를까, 앞으로도 술을 즐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허허, 그도 좋지. 사실 말이 약주지, 술만큼 사람 몸에 나쁜 것도 많지 않다. 우리야 내공으로 주기를 배출할 수 있다지만, 그래도 어지간하면 줄이는 게 좋겠지.”
술은 인체의 관점에서 볼 때 독(毒)이나 다를 바가 없다. 즐기지 않는다면 당연히 마실 이유도 없다.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오냐.”
그렇게 부자는 두 잔을 더 마셨다.
“그만 마실 테냐?”
“조금만 쉬고요.”
실제로 연지평의 얼굴은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굳이 취기를 막지 않은 것인데, 그의 수준을 생각하면 확실히 술이 몸에 받는 편은 아닌 모양이었다.
연위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어머니도 술 한 방울을 입에 못 댔지.”
“그러셨습니까.”
“한 번은 어디에서 좋은 술을 구해 와 같이 마시자고 했다. 정말 맛이 좋았어. 하지만 네 어머니는 한 잔을 마시고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하하.”
“몇 번을 도전해도 결과는 같았다. 결국 몸에서 안 받는 걸 고칠 수는 없었다. 고칠 이유도 없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와 고즈넉한 술자리를 가지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래, 그랬겠지.”
연호정은 곧잘 술을 마셨다. 반대로 연지평은 술이 잘 받지 않는 체질이었다. 연호정은 부친을 닮았고, 연지평은 모친은 닮은 것이다.
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형을 원망하느냐?”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연지평은 아버지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거처 주변에 몇 명의 고수들이 은신해 있었다. 그리고 거처 대문에는 내성 전투 부대원 둘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감시였다.
상부에서 해제 통보가 내려오지 않는 한, 그들은 언제까지고 연가의 혈족들을 감시할 것이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러하냐?”
연지평이 미소를 지었다.
“저에게 형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우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저 보고 싶을 뿐, 형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형제애가 깊은 것은 아비로서 기특한 일이지만, 정작 호정이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했다. 물론 혈육의 정이 만나는 횟수로 깊어지는 건 아니다만, 그래도 섭섭하지 않으냐?”
“형님이 없었으면 본가는 힘들어졌을 겁니다.”
연위가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연지평이 볼을 쓰다듬었다. 뜨끈하게 올라온 열을 식히려는 모양이었다.
“구주명가 말입니다. 형님과 아버지가 힘을 써서 세작을 잡았고, 이후 세상에 나간 형님이 의협들과 힘을 합쳐 그들의 야망을 일망타진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나아가 천하를 종횡무진하며 우리의 터전을 짓밟으려 한 외적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귀계를 무너트렸습니다.”
“…….”
“형님은, 크게는 천하를 위한 것이지만 작게는 우리 가문을 구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연위의 미소가 따뜻해졌다.
연지평이 입맛을 다셨다.
“자주 보지 못하는 섭섭함 외에, 달리 서운한 것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저 건강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렇구나.”
“아, 서운한 게 하나 더 있군요.”
“그게 무엇이냐?”
“연락 말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일 년에 두어 번 정도는 안부를 물을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게 없어요. 그건 정말 서운하더라고요. 제가 먼저 연락하고 싶어도 항상 떠돌아다니니 그럴 수도 없잖아요.”
“허허, 그래. 네 형의 큰 단점 중 하나지.”
연위가 기특하다는 눈으로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천성이 착하다고는 해도, 좌충우돌 천하를 떠도는 형의 소문을 듣고도 이런 정심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엄청난 재능과 폭발적인 성장에 무인으로서 경쟁심이나 질투심을 느낄 수도 있다. 자신과 함께하지 않기에 무사로서, 가문의 일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연호정은 흑도 무림의 후계자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이적 행위로, 깊은 신뢰와 애정을 가졌기에 더더욱 큰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러한 감정들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선하고 악하고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본성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연지평은 연호정에게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똑같이 믿을 뿐이다. 형제로서 사랑하고, 건강한 앞날을 기원하고 있다.
물론 연지평은 바보가 아니다. 순수함을 잃지 않았지만, 연호정의 행동이 가문에 미칠 영향을 모를 만큼 어리지도 않았다.
절대적인 신뢰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이러한 비현실적인 믿음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무엇이 네 형을 그리 믿게 만들었느냐?”
“예?”
“이 애비야 워낙 옹졸한 사람인지라, 그간 네 형과 많이도 부딪쳤더랬다. 혈육이라도 자주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않으면 의심하게 되고, 때로는 정나미가 떨어질 수도 있다. 한데 너는 그런 것이 없구나.”
연지평이 미소를 지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옛날 제사 때요.”
“제사?”
“예. 형님이 돌발 행동으로 조사전에 갇혔을 때 말입니다.”
연위의 얼굴에 민망함이 일었다.
“그래, 내가 벌을 줬었지.”
“그때 저는 주먹밥을 들고 형님에게 찾아갔었습니다.”
“그랬다고 들었다.”
“그전까지, 형님은 저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
“하지만 그날 알았지요. 형님은 절 좋아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저 여유가 없었던 것뿐이라는 걸. 실제로는 저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있었다는 걸 그날 알았습니다.”
“…….”
“그때 형님은 비응대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먹밥을 가져오라고 본인이 시켰다고. 그 부분 확실히 해 두라고.”
“……그래.”
“따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그 순간 확신했습니다. 형님이 진정 나를 형제로 생각하는구나, 냉엄한 가법 앞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던졌구나.”
연지평이 눈을 감았다.
“그 한 번의 일로 족합니다. 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절이자 감동이었어요.”
“…….”
“그날 이후, 저는 한 번도 형님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의심이라?”
그 순간, 다시 눈을 뜬 연지평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육과 가문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강호에 나섰는데, 고작 흑도로 전향한 것이 대수입니까? 의정군의 대수이건 묵룡부의 소부주이건, 저에게는 그냥 든든한 형입니다.”
그 말에 연위는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연호정을 향한 연지평의 이 과하기까지 한 신뢰는 지나치게 딱딱한 가법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내 잘못이었다.’
고작 한 번의 친절이었다. 그 한 번의 친절이 연지평에게는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 환경을 만든 스스로가 후회되는 동시에 자식들에게 미안했고, 그런 환경 속에서도 올바름을 상실치 않은 연지평이 대견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겪고 돌아온 장남이 또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이 그렇게도 바보 같을 수가 없었다.
“못난 애비에게, 너희는 지나칠 정도로 과분한 자식들이다.”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아버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마치 첫째처럼.
“그랬다면, 너희의 어린 시절을 훨씬 풍요롭게 할 자신이 이제야 생겼거늘.”
“하하, 그런 말씀도 마세요. 저는 지금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어렸을 때야 뭐…… 조금 빡빡하긴 했지만, 그때도 아버지 몰래 놀 건 다 놀았어요.”
“허허, 그랬느냐.”
“당연하죠. 저, 어릴 때 술도 몇 번 마셨습니다.”
감동으로 젖었던 연위의 눈가가 살짝 경직되었다.
“술을 마셨다고?”
“예. 오히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마셨을 겁니다. 그때는 그게 신기하고 좋고 재밌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
“……제가 괜한 말을 한 겁니까?”
“커험.”
“하하, 옛날 일인데 지금 와서 별수 있나요. 그래도 사고는 안 쳤잖아요?”
제법 능구렁이 같은 모습을 보여 주는 연지평이었다. 아들의 그런 모습에 연위도 이내 웃어 버리고야 말았다.
“정말이지, 자식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확신이 얼마나 대단한 착각인지를 하루하루 느끼고 있다.”
연위가 연지평의 잔을 채워 주었다.
“벌이다. 한 잔 더 받거라.”
“달콤한 벌이군요.”
“술이 안 받는다는 건 순전히 거짓말이었느냐?”
“그냥 그렇다는 거지요.”
부자가 웃으며 잔을 넘겼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
“……!”
연위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지평 역시 놀라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평.”
“예, 아버지.”
“뫼시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치이익!
순식간에 주기를 뽑아낸 연지평이 방을 나섰다.
잠시 후.
끼이익!
창밖 저 멀리서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끽. 끽.
이내 누군가가 방 밖의 계단을 오르는 소리도 들렸다.
한 발, 한 발 묵직하면서도 거칠 것 없다는 듯 경쾌한 기분이 묻어 나온다.
“들어가도 되겠소?”
“들어오시오.”
끼이익.
열린 문 사이로 모용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늦은 밤에 찾아온 불청객이지만, 술 한잔 얻어먹을 수 있겠소?”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싸구려 백주가 입에 맞으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