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화. 다시, 무림맹으로 (7)
봉공과 장로가 모인 마지막 청문회가 끝이 났다.
기실, 말이 청문회지 회의에 가까웠다. 그간 중원에서 터진 일들이 워낙에 많았고 세력 간의 판도와 흐름이 너무나도 달라졌기에, 무림맹에서도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논의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외적으로부터 황제를 구하고 제국의 주인에게 제국검까지 하사받은 연위를 쉽게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일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면, 자칫 잘못하다간 무림맹을 향한 여론도 안 좋아질 수 있었다.
백도 무림의 여론, 그리고 백도 무림이 아닌 이들이 이루고 있는 여론. 그 중간에서 잘 조율이 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연위를 강력하게 공격한 것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인과 구파의 몇몇 장문인들이었다. 봉공직이 아닌 장로직을 맡은 장문인 중에는 성격이 완고한 이들도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백도 명문가 출신 장남의 이적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회의도 있었지만, 청문회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공격적인 언사도 많았다. 그것은 마지막 청문회인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모든 공격은 종남 장문인 순우의 일갈 앞에 스러졌다.
“내 그간 여러분들의 얘기를 듣고도 애써 참았지만, 오늘만큼은 더 참을 수가 없구려.”
“무슨 말씀이시오?”
“짚을 쓰고 흑도라는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든 연 소협, 아니 연 대협의 행위에 박수를 보내진 못할망정 예법이나 역사를 들먹이며 손가락질을 하다니, 나는 당신들의 정신 상태가 참으로 궁금하오.”
남궁인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종남 장문인께서는 언사에 유의하시오. 이곳에 모인 분들 모두가 일파의 주인이시오. 모두가 지혜롭고 박식한 분들이거늘, 종남 장문인께서는 어찌 이분들을 모욕하시는 게요?”
“죽은 사람은 모욕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소.”
“뭐요?”
“여기 계신 장문인들께서 뒷짐 지고 헛기침이나 내뱉을 동안, 연 대협은 백도와 흑도의 강자들을 이끌고 와서 멸문할 뻔한 종남을 구해 주었소.”
남궁인과 몇몇 장문인들이 헛기침을 했다.
“종남산에서 벌어졌던 전쟁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소. 하지만 그 일 하나로…….”
“설마하니 남궁가주는, 연 대협이 종남산을 구해 주었기 때문에 본도가 그를 두둔한다고 생각하시는 게요?”
“……?!”
“우리 종남이 겪은 일은, 여기 계신 수장분들께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오.”
“……!”
“내 문파가, 가문이 무사하다고 그와 같은 위협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착각이오. 이곳에 모인 수장분들은 좁은 곳에서 세상을 보고 있으니 피부로 느끼지 못하겠지만, 일선에서 뛰는 이들은 적들의 힘과 잔악함이 유례가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소.”
“장문인!”
“연 대협이 그 젊은 나이에 세상에 나와 지금껏 벌였던 일들을 보시오. 천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청년기에, 오직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몇 번이나 목숨을 걸고 적들을 격파해 내고 있소이다.”
“…….”
“그런 그가 흑도로 전향한 것이 그렇게 큰 문제요? 그것도 백도가 싫어서가 아니라 백도와 흑도가 힘을 합쳐 외적과 맞서 싸우기 위함이거늘, 정녕 그 의도의 일 푼도 읽지 못하는 것이오?”
“말씀이 심……!”
“부끄러운 줄 아시오!”
“이익!”
“법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아는 바요! 그러나 법도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한 줌도 되지 않는 것 같소! 그의 행동을 변절이라고 매도하려거든, 어디 이 사람에게도 말해 보시오! 문파가 그 지경이 될 동안, 제자들이 죽어 나갈 동안 뭐 하고 있었느냐고!”
순우의 일갈은 좌중을 압도했다.
개인의 피눈물 가득한 경험, 그 경험으로 인해 깨달은 현실을 피부로 느끼는 거인의 외침은 무극의 힘으로도 상대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어떤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벌어진 결과만을 보는 게 아니라 원인부터 파악해야 함이 마땅하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의 과거는 어떠한지, 그의 목적은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는 분들이 이 좁아터진 회의장 안에서 그를 물어뜯기에만 바쁘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란 말인가!”
“…….”
“연 대협이 지난 몇 년 동안 삼교의 끄나풀들을 색출해 내고 적장들을 격파하지 않았다면, 이곳에 계신 분들 중 절반은 피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을 것이오! 그리고 앞으로 더 흘릴 피눈물을 대비하기 위해, 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겠지!”
“…….”
“하물며 연가주에게는 무슨 죄가 있소? 대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다고 청문회까지 열어 가며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오? 직접 황궁으로 가서 폐하를 구하고 천하를 위해 이바지한 연씨 부자의 공(功)은, 설령 변절이라 해도 손가락질할 수 없는 것이오!”
“그 발언! 문제의 소지가 명확함을 알고 있을 것이오!”
“적어도 당신들은 그래선 안 된단 말이오! 당신들은 정녕 그의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비판하는 것이오? 아니면 그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이 난리를 치는 것이오?! 도대체 뭐가 무섭고, 뭐가 이상해서!”
“더 이상의 모욕은 참지 않겠소이다!”
“내 말을 모욕이라고 느낀다면, 어디 남궁의 검사들을 죄다 이끌고 새외로 가서 놈들과 한판 붙어 보시든가!”
“이 작자가 정말!”
쾅!
매서운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의 대화가 뚝 끊어졌다.
쩍!
돌 탁자를 부순 공공대사가 주먹을 회수했다.
“흥분들 가라앉히시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행위는 그렇지 않았다. 공공대사답지 않은 과격한 모습에 순우와 남궁인도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거릴 뿐,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종남 장문인의 말씀이 옳소.”
남궁인이 눈을 부라렸다.
“대사님!”
“그리고, 남궁가주와 몇몇 장문인분들의 우려 섞인 한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바요.”
순우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연 대수, 아니 연호정 소부주의 독단적인 이적 행위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오. 하물며 혈육에게도 알리지 않고 내린 결정이니, 이는 분명 큰 불효이기까지 하오.”
연위가 눈을 감았다.
그는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문, 그리고 자식을 위해서는 지금 당장 답답해도 침묵을 고수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은 연호정 소부주가 세운 공과 그의 열정을 보았고, 또한 알고 있소. 순우 장문인의 말마따나,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적으로 칼을 뽑은 적이 없는 협사(俠士)외다.”
남궁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분명 그가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혼란스러운 순간에 묵룡부주의 제자로 들어간 것은 오히려 백도 무림의 근간을 뒤흔드는 과(過)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는 과이나, 이해할 수 있는 과라고 빈승은 생각하오.”
“대사님! 이는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저라고 큰 공을 세운 인재의 이적에 충격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여기 계신 모두가 놀라고 걱정했을 겁니다!”
“…….”
“그러나 그 행위를 눈감아 주고 넘어갔다간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됩니다. 훗날에도 세상을 위해 말없이 이적했다고 우기는 변절자들이 나오면, 그때도 이룬 공이 크니 용서하겠다고 말할 것입니까?”
“남궁가주.”
“여기 계신 분들은, 우리는 현재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보듬을 수 있는 정책을 내놓아야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이토록 질이 나쁜 행위를 넘어가 준다면 훗날 세상 사람들이……!”
그때였다.
“다시없이 멋진 한 수였다고 판단해 주겠지요.”
끼익.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모용군이 등장했다.
공공대사의 눈이 커졌다.
“허어, 모용가주가 아니시오?”
모용군이 포권을 취했다.
“너무 오랜만에 인사를 드립니다. 군사에게는 따로 연락을 취해 만남을 가졌습니다만, 저 역시 생각할 것이 많아 지금에서야 나타났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길.”
느닷없는 모용군의 등장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심지어 침묵하고 있던 제갈문호도 놀랐다. 설마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애초에 직접 겪지도 않은 사건에 왈가왈부하기 싫다며, 청문회에 불참하겠다고 했던 사람 아니던가.
모용군이 제갈문호를 보며 말했다.
“그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군사께 직접 얘기를 들었습니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니기에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무래도 한마디 보태는 것이 나을 듯하여 뒤늦게나마 참석했습니다.”
“그랬구려.”
공공대사가 빈자리를 가리켰다.
“일단 그리 서 계시지 말고 앉으시오.”
“예.”
자리에 앉은 모용군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쏠렸다.
뒤늦게 참석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모용군의 허허로운 기도는 마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의 그것과 같았지만, 동시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실제로 모용군의 수더분해진 기도의 변화를 눈치챈 사람은 많지 않았다. 회의장의 공기가 워낙 과열된 탓이었다.
“허어.”
공공대사가 감탄 어린 얼굴로 말했다.
“가주의 폐관이 아주 성공적이었던 모양이오. 몹시도 인상적인 변화외다.”
역시 읽는군.
모용군이 웃으며 말했다.
“번뇌와 집착을 내려놓았을 뿐입니다.”
“번뇌, 그리고 집착.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고, 동시에 한평생 버리려 노력해야 할 일이오.”
공공대사가 껄껄껄 웃었다.
“그와 같은 일을 달성했다면, 모용가주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겠소. 조만간 모용세가에도 위대한 전설 하나가 고개를 들 것 같소이다.”
“과찬이십니다.”
공공대사의 말에 좌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
위대한 전설이란 다른 뜻이 아니었다. 바로 무극을 뜻함이었다.
이곳에 모인 봉공 중 최고로 인정받는 공공대사가 그리 말했다면, 모용군의 성장은 진실로 대단한 것이리라.
“뒤늦게 모습을 드러내 할 말은 아니지만, 저에 관한 얘기를 나눌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허허허.”
“또한 뜬금없이 나타나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싶지만, 저는 연호정 소부주의 이적 행위를 책잡아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궁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모용군을 보았다.
“모용가주!”
“연호정 소부주는 의협의 화신입니다.”
“……!”
“이 자리에서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저는 연호정 소부주의 뛰어난 능력을 시샘했습니다. 아들뻘인 젊은이에게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저는 못난 사람이고, 동시에 연호정 소부주는 뛰어납니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제 불찰이지요. 저는 어리석었습니다.”
“모용가주.”
“그의 행위 자체는 분명 잘못이나, 종남 장문인의 말씀대로 그가 아니었다면 세상은 진즉 불바다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무림을 구했는데, 천하를 위해 과격한 결단을 내렸다고 하여 책을 잡아서야 쓰겠습니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요!”
“결정적으로, 연호정 소부주와 여기 계신 연가주를 억압하면 우리도 멀쩡하지 못합니다.”
“……?!”
모용군이 연위를 보며 웃었다.
“연가주는 황제 폐하께 제국검을 하사받은 위대한 협사입니다. 연씨 부자의 공은 크고, 그 공을 황제 폐하께서도 인정하셨다면, 우리 역시 그것을 순순히 인정해야만 합니다.”
황제의 분노가 떨어질 수도 있다.
모용군의 말뜻은 명백했다. 힘이 없는 황제라도, 그 정통성과 위상을 생각하면 백도 무림은 황제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가가 이룬 위업은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일로 싸워 봤자 우리의 적들만 좋아할 것 아니겠습니까.”
남궁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때, 모용군이 말을 이었다.
“대신, 보는 눈이 많으니 그냥 넘어가는 것도 도리는 아닐 겁니다. 우리를 지지하는 많은 이들이 우리의 결정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면 어쩌자는 것이오?”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모용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일단은…… 연가의 발언권과 권한의 축소, 혹은 말소 정도가 어떨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