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19화 (819/963)

819화. 다시, 무림맹으로 (5)

쩌어어엉!

화려한 충돌음과 함께 물러나는 두 검사의 움직임은 몹시 부드러웠다.

훅!

빠르게 치고 들어가는 청년의 검이 사내의 중단을 노렸다.

그렇게 빨리 움직였음에도 폭발적이라는 느낌은 없다. 마치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가는 듯, 동작 간의 이어짐이 너무나도 부드럽다.

사내가 좌하단에서 우상단을 향해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쩌엉!

청년의 검이 부드럽고 자연스럽다면, 사내의 검은 강하면서 자연스러웠다.

상당한 강검(强劍)에 부딪혀 공격선을 잃었음에도 청년은 당황하지 않았다. 삼 보(三步)를 물러나 중심을 잡고 좌수를 뻗어 상대의 공격을 예비하는 일련의 행동이, 가히 일가(一家)를 이룬 수준 높은 검예(劍藝)를 보는 듯했다.

가만히 청년을 보던 사내가 일순 땅을 박찼다.

파바박!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사내의 검이 팔방을 점하며 청년을 몰아쳤다. 강하게 쳐 내도 공격선이 끊어지지 않으니, 빠르고 격정적인 환검(幻劍)을 이용해 감각을 교란하고 빈틈을 드러내게 만들려는 것이다.

청년의 눈이 빛났다.

쩌저저정! 쉭! 투우웅!

몇 번의 부딪침으로 환검의 맥을 끊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일검에 어깨가 베였다. 베인 어깨를 부드럽게 젖혀 상처를 최소화한 청년이 한순간 전면으로 파고들며 반대쪽 어깨로 상대를 밀어 냈다.

사내의 눈이 커졌다.

깔끔하면서도 빈틈없는 검격으로 놀라움을 안겨 주던 상대가, 거리를 좁혀 몸통 박치기로 자신을 밀어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놀라움 때문일까? 밀려 나가 자세를 잡던 사내의 반응이 아주 조금 늦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청년의 몸이 회전하며 날카로운 참격을 뿜었다.

티이잉!

완벽하게 막지 못하고 공격을 흘려 보낸 사내가 손을 들었다.

“여기까지.”

청년, 연지평이 검을 역수로 쥐곤 고개를 숙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대단하구나.”

사내, 모용우가 혀를 내둘렀다.

“한 방 먹은 기분이다. 어느 정도 완성된 검리(劍理)지만 부족한 게 없지는 않았는데, 거기에 체술(體術)까지 섞을 줄은 몰랐다.”

연지평이 웃으며 말했다.

“체술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분명 멋진 체술이었다. 단 일격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했어.”

최고급 숙수의 요리는 한 젓가락만 먹어 봐도 그 안에 깃든 수준 높은 실력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연지평의 체술이 그러했다. 간단하고 큰 위력도 없었지만, 일격만으로 그 체술이 지닌 깊이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것도 연가의 무공이더냐?”

“저의 모든 것이 본가의 무공에서 나왔으니 이 또한 본가의 무공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연지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식을 지닌 무공이 아니라, 그냥 그 순간에 그리 움직인 것뿐입니다.”

“……?!”

“제법 괜찮은 일격이었지요?”

모용우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너는 네가 한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그 순간에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

수준의 차이가 있을 뿐, 그것은 무도(武道)의 극의와 닿아 있는 행동이었다. 누구라도 그런 것은 쉽지 않았다.

“형님께서 진짜 힘을 꺼내 들었다면 이렇게까지 날뛰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간 얼마나 깊은 수련을 한 것인가.

나름의 세상을 겪고, 의정군과 함께 거닐며 잠깐이나마 천하를 배운 연지평의 자태는 그야말로 훌륭했다.

검인(劍人)으로서도, 명가의 후손으로서도 부족함이 없다. 꾸민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여유와 정심(靜心)을 잃지 않았기에 더더욱 돋보였다.

“내, 너의 형과 함께 여러 고수를 만나며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검도(劍道)는 무도(武道)에 속해 있지만, 이룬 경지가 검도의 수준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야.”

“예?”

“이룬 경지가 뛰어난 검객이라 해서 모두가 극상승의 검도를 구현한다고 잘라 말할 순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누군가는 무인으로서 경지가 드높지 않아도 검리(劍理)의 극치를 이룰 수도 있단 뜻이다.”

“그런가요.”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니지. 그러나 우리 옆에는 그런 분이 한 분 계시잖느냐?”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네 아버지, 연가의 가주께서는 천하에서 손에 꼽힐 만한 검도의 소유자이시다. 모르긴 몰라도 남궁가의 검제(劍帝) 어른에 비해도 큰 모자람이 없을 거라고 보고 있다.”

“하하.”

연지평은 멋쩍게 웃었다.

검제 남궁승은 성천십삼좌에 이름을 올린 무적의 검사였다. 그런 희대의 달인과 아버지의 검도가 큰 차이가 없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치켜세워 주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연지평은 그저 웃어 버렸다.

“오늘도 잘 배웠습니다.”

“아니다. 오늘은 내가 더 잘 배웠다.”

서로 짧게 인사를 마친 두 사람.

지금껏 없는 시간도 쪼개 가며 수도 없이 대무를 한 두 사람이었다. 경지의 차이는 명확하나, 상대가 가지지 못한 것을 듬뿍 지닌 둘은 나이와 직함, 경지와 소속을 떠나 서로에게 강한 자극제가 되어 주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재능이군.’

모용우는 생각했다. 연가에는 하나같이 괴물 같은 사람들밖에 없다고.

‘재능도 재능이지만, 뭔가가 달라. 마음인지 지고지순한 정열인지 모르겠지만…….’

무공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 근골이나 실력만 보면 연지평보다 뛰어난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연지평만큼 인상적인 검법을 구현하는 이는 결코 많지 않다. 연지평만큼 자연스럽고도 빠른 성장을 이루는 검사도 찾아보기 힘들다.

연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가주님보다 강한 자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분처럼 빈틈없고 진한 검예를 손에 넣은 사람은 중원 천하에서도 손에 꼽힐 것이다.’

불과 며칠 전에 연위와 비무를 나눠 봐서 안다.

그때, 모용우는 신세계를 엿보았다. 이룬 경지의 차이도 명확하지만, 무인으로서의 강함 이전에 검(劍)으로 완패를 당한 기분이었다.

차원이 다른 검도. 자신이 지닌 막강한 기공술을 모조리 쏟아부어도 한 자루 철검 아래 모조리 분해될 것 같은 압도적인 좌절감.

너무나도 고고하기에 오히려 평범해 보인다는 것은 연위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는지는 모르겠으나, 당대 판관검의 무공이 천하에 이르렀음을 모용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거기에 연제까지.’

연호정.

그를 떠올리자, 모용우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이 황당한 녀석아. 너는 정말이지, 우리가 보는 세상과는 다른 곳에서 사는 것 같다.’

연호정의 무공은 연위나 연지평과는 또 달랐다.

연위와 연지평이 타고난 검인(劍人)에 수행자의 느낌을 준다면, 연호정은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맹장(猛將) 그 자체였다.

검이나 병기술에 관한 깨달음이라면 오히려 연위나 연지평보다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승리를 향한 신앙과도 같은 집착 아래, 연호정은 누구도 상상치 못하는 속도로 무극을 열고 나아가 비왕을 패사시킨 후 성천의 자리에 올랐다.

패왕 연호정.

새삼 그 패왕이라는 별호가 참으로 낯간지러우면서도 녀석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흑도 무림의 후계자라니.’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모용우는 말 같지도 않은 얘기라며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정파 명문가의 장남이 흑도 무림의 후계자가 되었어. 그런데도…….’

모용우가 연지평을 바라보았다.

‘연가주님은 물론 지평 역시 생각보다 훨씬 무덤덤한 기색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연위도, 연지평도 무척 놀랐다. 그 모습이 아직도 똑똑히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문의 명성이 뿌리부터 뒤흔들릴 판단이었다. 자칫 일이 잘못 틀어졌다가는 무림맹에서 축출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

하지만 일은 그리 진행되지 않았다. 연가는 아직도 무림맹의 일원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물론,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부의 분위기가 살얼음판 같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군요.”

“음?”

연지평의 뜬금없는 말에 모용우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검을 땅에 박고, 검병 끝에 두 손을 올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연지평의 모습은 묘하게 운치가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청문회가.”

“아, 그랬지.”

청문회의 주인공은 당연히 연위였다.

봉공과 장로들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든, 공식적인 청문회는 반드시 열려야만 했다.

그들이 아닌 정파 무림을 위해서였다. 대다수의 정파인들은 연호정의 이적에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벽산호장에서 패왕으로 불리기까지.

삼교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연호정의 명성은 그야말로 태산을 넘어 하늘을 뚫을 정도로 대단해졌다.

그런 괴물 같은 인재가 느닷없이 묵룡부의 후계자가 되었단다.

당연히 일대 파란이 일었다. 그 소문이 돈 후, 무림맹으로 수천 개의 서신이 빗발쳤다.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는 내용부터 연가를 무림맹에서 축출시켜야 한다는 강경한 내용은 물론, 정파의 명예를 땅으로 떨어트린 연가를 멸문시켜야 한다는 과격한 서신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그 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재워졌다.

무림맹의 군사와 봉공들의 공식 성명 때문이었다.

패왕 연호정은 그간 삼교로 인한 위협으로부터 중원 무림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애쓴 협객이다. 또한 그는 외적의 힘이 불세출에 이르렀음을 가장 먼저 깨닫고 흑도 무림과 힘을 합쳐야 한다는 화합론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껏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셀 수도 없으며, 그가 아니었다면 진즉 무림의 절반 이상이 삼교에 잠식되었을 것이다.

성명의 시작부터 연호정의 공을 치켜세운 것은 공격적이고도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실제로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었다. 연호정이 나서서 삼교를 막지 않았다면, 지금쯤 삼교는 전쟁을 일으키고도 남았으리라.

다만 괴물 같은 재능과 실력, 그리고 불같은 협의와는 반대로 그에게 다소 독단적인 면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바. 부친이자 가주인 판관검에게도 말하지 않고 흑도로 귀순한 것은 패왕의 명백한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크지만, 강호 제현의 여론이 그와 같다면 패왕을 가문에서 축출하는 것도 염두에 두겠다는 판관검의 고통 어린 결단을 받아 두었다.

가문에서 쫓아내겠다.

속된 말로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혈육의 정을 떠나, 가문 입장에서 서른도 안 된 나이로 성천에 이름을 올린 초고수를 내치겠다는 것은 절대 쉬운 판단이 아니었다.

그 정도 파격적인 발표가 나오자 무림인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몇몇은 꼬리를 자르는 게 아니냐며 냉소를 지었지만, 그러한 결단이 얼마나 힘에 겨운 것인지를 모두가 알았기에 차마 큰소리를 내진 못했다.

독단적인 면이 있으나 패왕의 행보는 언제나 천하를 향해 있었다. 그간의 공(功)과 협의를 보아, 이 사안에 대해서는 당분간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다. 그의 행동만 보면 이적이자 배신이지만, 우리는 흑도와 힘을 합쳐 외세를 물리치고 평화를 이룩해야 함이 마땅하다. 부디 이 뜻을, 강호 제현께서도 알아주길 바란다.

무림맹의 공식 성명으로 인해 기름을 부은 것처럼 타올랐던 백도 무림의 분노도 빠르게 식어 갔다.

하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연가를 욕하는 이들은 많았다.

청문회를 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조금이라도 여론을 다독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정성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청문회라…… 허, 도대체 앞으로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가 없구나.”

연지평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군장님!”

저 멀리서 탕마군 일 조장 진패가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

“상부의 호출입니다.”

“호출? 무슨 일로?”

“모용가주님께서 폐관에서 나오셨답니다!”

모용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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