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화. 다시, 무림맹으로 (4)
그걸로 끝이라는 듯 터덜터덜 걸어가는 패율.
다시 떠진 연호정의 눈에, 패율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딘지 홀가분해 보이는 모습. 자유분방하면서도 특유의 날카로운 멋이 살아 있는, 패율만의 분위기가 인상적인 뒷모습이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술은 안 하십니까?”
휘적휘적 걷던 패율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나직이 투덜거렸다.
“사내놈들끼리 무슨 이별주씩이나 마시느냐? 그냥 간다고 하면 그만이지.”
“그도 그렇군요.”
“잘 지내라.”
“예.”
패율이 다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도 잠시.
“젠장.”
몸을 돌린 패율의 얼굴은 팍 일그러져 있었다.
“너 이 자식, 꼭 그 방법뿐이었냐?”
뜬금없는 말이지만, 연호정은 그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예. 이 방법이 제일 나았습니다.”
“낫긴 뭐가 나아? 그냥 제일 편한 방법을 선택했겠지.”
“정파의 명문가 출신 장남이 흑도 무림 총수의 제자로 들어가는 선택이 어떻게 가장 편한 방법입니까?”
“……빌어먹을.”
“저의 이 선택으로 제 가족까지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도움 주시는 분들은 많지만요.”
패율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내색은 안 해도 연호정이 제 가족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아끼는 가족에게 가는 피해마저 감수할 정도의 선택이었다. 연호정에게도 절대 쉬운 선택은 아니었단 말이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단 말이지?”
“방법이야 많았겠지요. 다만,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최선이냐? 정파 출신 후계자 앞에서, 흑도 놈들이 쉽게 고개를 조아릴 것 같아?”
“그래서 온 겁니다.”
“뭐?”
“조아리게 만들려고 온 겁니다. 그 정도 권위와 화합력이라면, 삼교와 싸우는 데에 큰 힘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삼교, 삼교!”
패율이 이를 악물었다.
“네 대가리에는 삼교밖에 없는 거냐?”
연호정은 말없이 쓰게 웃었다.
패율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삼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삼교 때문에 네 인생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 것이다.
“제 인생은 삼교의 절멸 이후에 찾을 수 있습니다.”
“…….”
“아시잖습니까?”
“삼교 놈들 때문에 우리 터전이 불바다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오직 그놈들을 박살 내기 위해 너 혼자 이만큼의 희생을 끌어안을 필요는 없어. 놈들을 박살 낸 이후에, 네가 찾아갈 안식처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야.”
신경질적인 말투 속에 동료를 향한 걱정이 깃들어 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걸 걱정하며 움직여야 할 때 주춤거리느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하겠습니다.”
“……미친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그러니까 선배는 가십시오.”
“왜? 점창파에서 도려내질까 봐 그러냐?”
“…….”
“새끼야, 애초에 나는 점창에서도 내놓은 자식이었어. 장문인이 아니었으면 장로는커녕 사범도 못 될 팔자였다.”
“어찌 되었든 위해 주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누가 뭐라 해도 선배는 점창의 장로입니다. 한번 얻은 장로 직위가 어디로 가진 않습니다.”
“오히려 좋아할 거다.”
“예?”
“장로 직위를 벗어던지면, 날 고깝게 보던 사형제들이 오히려 좋아할 거라고 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럴지언정 점창의 사람이 장로 직위를 버리고 흑도의 후계자와 함께한다는 소문은 점창에 큰 해가 됩니다.”
“해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라.”
“……?!”
순간 연호정은 자신이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해가 되지 않도록 만들라고 했다. 그리고 네놈에게는 그 방법이 있을 거야.”
“예?”
“그 정도 방법도 없이 제 가족이 피 볼 수 있는 선택을 내렸다고? 적어도 내가 아는 넌, 막 나가기는 해도 변변한 대비책 하나 없이 칼춤 추는 벽창호가 아니야.”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양천의 후계자가 되자마자 무림맹으로 튀어 갔을 것이다.
연호정은 제갈문호와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은 양천만 알 뿐, 아무도 몰랐다.
그 서신을 주고받으며, 연위와 연지평이 안전하다는 걸 확신했기에 흑도부터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배. 그건 안 됩니다.”
“패왕이라고 하더군.”
연호정의 얼굴이 본능적으로 일그러졌다.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뭘 누구한테 들어? 세상이 다 알고 있더만.”
“젠장.”
“거기에 네놈 곁에는 백병신군 막원 선배도 있지.”
“…….”
“막원 선배까지 보고 오는 길이다. 그리고 확신했다. 네놈이 무림맹으로 향할 때, 그 선배도 함께하리라는 것을.”
“성천의 이름은 과오를 씻어 주는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는 하겠지.”
“그렇다고 해서 점창이 흔들리는 걸 막아 주진 못할 거란 말입니다.”
“네놈이 언제부터 본문을 그렇게 신경 썼어?”
“선배.”
“나 같은 개망나니가 장로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장문 사형의 덕망과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그분 스스로 나서기를 원치 않아서 그렇지, 당장 봉공직에 올라가면 누구보다 잘하실 분이다.”
“…….”
“사태를 무마하는 데에 별 어려움은 없으실 거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굳이 저와 함께하지 않아도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면 그만입니다.”
“안다.”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위협을 무릅쓰고 함께할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심지어 사문에 피해가 가게 만들면서까지…….”
“사문에 피해는!”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패율의 목소리가 밤하늘의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명성 따위로 입는 피해는 진짜 피해가 아니야. 그 유구한 역사와 선인들의 발자취가 외적들의 더러운 발에 짓밟혔을 때야말로 진짜 피해가 되는 것이다.”
“……!”
“너는 나와의 인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선택했다.”
“……?”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놈과 함께 어울리면 아주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러 싸움을 거쳐,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답지 않게 격정적인 패율의 눈빛은 이전처럼 차갑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나는 내 자리를 잘 알아. 점창으로 가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이 세상에 눈곱만큼의 도움이라도 더 되기 위해서는 너와 함께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선배.”
“그리고 난 네놈이 마음에 든다.”
“…….”
생각지도 못한 한마디였다.
“내가 널 후배이자 동료로 인정한 것은, 그리고 선택한 것은 단순히 나의 목표를 위해서만이 아니야.”
“…….”
“나는 그저 너와 함께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사십 년 넘도록 아무 생산적인 활동도 하지 않고 칼질만 해 댔던 것보다, 너와 함께했던 몇 년이 훨씬 더 보람차게 느껴졌다.”
“…….”
“나 혼자서도 보람차게 살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패율이 검지로 연호정을 가리켰다.
“지금 이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그것은 곧 흐름을 만드는 핵(核)이야. 그리고 너는 그 몇 안 되는 핵 중 하나다.”
“…….”
“쪽팔리지만, 난 너처럼은 못 해. 그러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 능력을 알아보고, 내가 잘 쓰일 만한 곳에 날 던져 줄 수 있는 사람 옆에서 세상을 위해 일하고 싶다.”
“…….”
“그와 같은 삶을, 내가 인정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함께한다면 그처럼 충실한 삶은 없을 것이다. 그저 그뿐이다.”
그 환상과도 같은 창술로 눈을 흩어 내고 차가운 땅이 드러나게 한 것처럼.
패율은 자신의 진심을 고스란히 말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말하지 않았던,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던 선명한 진심이었다.
“너는 내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맞다. 나는 바뀌었어. 무공을 완성하니 자신감이 넘치고, 수준 낮은 놈들과는 굳이 부딪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크다.”
“…….”
“하지만 내가 너에게 화가 난 이유는 수준 낮은 쓰레기들과 붙게 해서가 아니야. 네가 진정 나를 선배이자 동료로 생각했다면, 점창의 피해고 나발이고를 떠나 내게 물었어야 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앞으로도 함께해 줄 수 있겠느냐고.”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패율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병신 머저리처럼 은근히 속내를 떠볼 게 아니라, 진심을 담아 당당하게 물었어야 했다. 내가 너에게 화가 난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네놈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차라리 양천의 제자가 되어 오만해지고 권력욕이 생겼다면 이해했을 터, 넌 그보다 훨씬 더 이상해져 버렸다.”
“…….”
“삼교 놈들의 멸망을 위해 자존심도 다 버렸다는 놈이, 주제도 모르고 남 생각하면서 뻗대는 게 아니야.”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패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라 했다. 내가 이곳에 있고 싶다 한들, 네가 곤란하다면 굳이 우겨서라도 눌러앉고 싶은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
“다시 말해 봐라.”
“예?”
“날 다시 봤을 때 너의 주둥이에서 나왔어야 할 말을, 지금 이 자리에서 해라.”
패율의 요구는 당당했다.
그리고 그 요구는 동료로서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분위기를 이렇게 몰고 가 놓고서 굳이 쪽팔리는 말을 들어야겠습니까?”
“말없이도 서로를 이해하는 사이란, 제대로 할 말을 했기 때문에 성립된다.”
“…….”
“선배이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주는 것이다. 다른 놈들은 너의 그 직위와 독한 성격 때문에라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할 요구를, 나니까 당당히 할 수 있는 것이다.”
“…….”
“변절자라는 오명 위에 경우 없는 놈이라는 간판까지 달고 싶지 않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쓴웃음 짓던 연호정의 얼굴이 점점 진지해졌다.
패율은 그 진지한 얼굴 위에 드리워진 피로함을 볼 수 있었다. 밤인데도 선명히 보일 만큼, 연호정의 피로는 눈에 띄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피로감. 보여 줘선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표정이 달빛 아래 선명히 드러났다.
“파문도 감수할 수 있습니까?”
“창산(蒼山)이 무사하다면 파문 따위 대수겠냐.”
“손에 더러운 피가 많이 묻을 겁니다.”
“쪽팔린 칼질만 안 하게 해 줘라.”
“죽지 않아야 합니다.”
패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나이에 벌써 삼도천 물비린내 맡을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함께해 주십시오.”
파아아악!
엄청난 속도로 내지른 단창이 연호정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단창을 쥔 연호정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금 전, 혼신의 힘을 다해 내친 일격보다도 더욱 막강한 공격력이었다.
패율이 미소를 지었다.
“함께해 주마.”
* * *
다음 날.
“…….”
무림맹에서 날아온 서신을 받은 연호정이 양천을 찾아갔다.
“어제는 바빴느냐?”
“예, 이런저런 일 때문에요.”
“그랬겠지. 그래서, 아침나절부터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무림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양천의 눈이 빛났다.
“뭐라고 왔더냐?”
“조만간 무림맹주 선출에 관한 공문을 선포한다고 합니다.”
“……드디어.”
“그리고, 제 정적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정적?”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모용군이 폐관을 깨고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