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화. 다시, 무림맹으로 (1)
“……!”
연호정의 발언은 안 그래도 무겁게 내려앉았던 회의장의 공기를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저…….”
호백이 입을 열려던 순간, 연호정이 꼽추 청년 단리호에게 말했다.
“어떻게, 보고할 준비는 다 끝났나?”
“그렇습니다, 소부주님.”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단리호.
그 모습은 후계자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머지도 다 그런가?”
후계자들의 뒤에 시립해 있던 이들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느긋하게 앉아서 보고를 받고 싶지만, 그 전에 청소부터 해야겠군. 이 자리는 물론 새 시대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자, 잠깐만요!”
깜짝 놀란 이자곤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고라니요? 이놈들이 후계자라니요?”
“말하는 거 보니까 잘 들은 것 같은데 왜? 아, 혹시 여태 상황 파악이 안 됐나?”
연호정의 눈이 서늘해졌다.
“안목도 없고, 눈치도 없고, 열정도 죄악도 모르는 그 머리는 왜 달고 다니나? 하긴, 그거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
“걱정하지 마라. 앞으로는 고민할 필요 없으니까. 내가 예쁘게 잘 떼어 주지.”
이자곤의 얼굴이 극도로 창백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묵직한 목소리의 주인공, 조필학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그의 두 눈에선 분노 이외의 감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연호정의 등장에도, 그의 발언에도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그저 한없는 복수심만이 가득했다.
“지금 우리를 죽이고 뒤에 있는 떨거지들을 조직의 후계자로 삼는다는 말이오?”
“왜? 문제 있나?”
“말이라고 하시오!!”
“아, 하긴 내가 말을 잘못하긴 했군.”
연호정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후계자가 아니라 주인이 될 사람들이지. 물론 그만한 능력과 인성이 되는지를 확인한 연후에 결정해야 할 사항이지만 말이야.”
후계자들이 입을 쩍 벌렸다.
연호정이 뒷짐을 졌다.
“물론 다 죽는 건 아니다. 아홉 중 둘은 살게 될 거야. 당연히 나머지 일곱은 이 자리에서 죽는다.”
“……!!”
화아아악!
조필학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순간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번쩍!
“컥!”
조필학이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두 눈 가득 살기를 담아 노려보니, 그 안광만으로도 치명적인 위력을 자아낸다. 눈은 곧 마음의 통로라, 순식간에 불타오른 주작화기가 고스란히 살기로 변해 조필학의 눈을 강타한 것이다.
주르르륵.
조필학의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실명까지는 아니지만, 실핏줄이 터지고 정신이 뒤흔들려 버린 것이다.
“제법이군.”
버둥거리는 조필학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연호정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악랄하고 치졸했던 그 삶은 애비 이상으로 더럽고 추잡하지만, 적어도 녹림의 후계자로서 단련은 충분히 했어. 총채주가 애지중지할 만해.”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되찾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어지간한 단련 없이는 연호정의 살기를 대하자마자 심신이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손봐 주려고 했다. 원체 바빠서 그 시간이 미뤄졌을 뿐이지. 며칠 전에 끝날 뻔했던 삶, 잠시나마 재밌게 보냈다고 생각해라.”
“으아아! 이, 이 개새끼야! 넌 반드시 죽인다!”
“억울하면 귀신이 돼서 꼭 찾아와. 찾아오면 또 한 번 죽여 줄 테니까.”
연호정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콰드드득!
돌풍을 일으키며 쏘아진 권풍이 쓰러진 조필학의 명치를 관통해 흉골과 폐, 심장에 이어 척추와 머리까지 그대로 으스러트렸다.
“……!!”
후계자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들 역시 제법 많은 시체를 봤다. 그 많은 시체 중 절반 이상을 직접 제조하기까지 했다. 흑도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살인에 익숙해져야만 하니까.
하지만 살인과 죽음의 경험이 많은 그들조차 이토록 끔찍한 살인은 처음이었다.
“벽제문.”
“……예, 소부주님.”
월영문의 소문주, 벽제문이 고개를 숙였다.
“한종림.”
“예, 예!”
“두 사람은 이 옆으로 서라. 너희는 죽지 않는다.”
“……?!”
두 사람의 얼굴에 놀라움과 안도감, 그리고 의아함이 차례로 떠올랐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개인적으로 너희 둘에게는 찬사를 보낸다. 흑도 무림에 태어나 잔혹한 수장을 부모로 두었음에도 이렇다 할 악행을 한 적이 없었어. 오히려 주변 사람을 몰래 돕거나 부모의 악행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 애썼지.”
“……!”
“하지만 너희로서는 문파를 이끌어 갈 만한 능력이 없어. 그러니 새 후계자들과 힘을 합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도록. 물론 그 과정에서 쓸데없는 잡음이 나오면, 그때는 내가 다시 방문토록 하겠다.”
연호정이 턱으로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나와.”
벽제문과 한종림이 주춤거리며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때, 화련이 말했다.
“좋지 않아요.”
“음?”
“저희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 소부주님께도 좋지 않을 겁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대답 전에, 하나만 여쭙지요. 제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지요?”
“이미 짐작들 하는 것 같은데 굳이 대답이 필요한가?”
“……!”
“월영문주 하나 빼고는 다 죽었다.”
여기저기서 헉!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라는 건 너희도…… 아니지. 모르겠군. 그런 인간들 밑에서 자랐으니, 보고 배운 것도 비슷했을 것 아니겠나.”
연호정이 벽제문과 한종림을 보며 말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면 자네들은 더욱 대단한 거야. 이왕이면 더 치고 나와 줬으면 좋았겠지만,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른 거니까. 엇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하네.”
“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연호정이 화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화련의 얼굴은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하지만 아비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크게 슬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답이 되었나?”
“네.”
“하면, 왜 나에게 손해가 된다는 건지 들어 볼까?”
화련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소부주님께서는 차기 묵룡부의 주인으로서 흑도를 다스리시게 될 겁니다.”
“뭐, 그럴지도.”
“……그때는 저희의 힘이 꼭 필요하실 겁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팔다리 역할 해 줄 사람 없이는 치세가 불가능한 법이니까요.”
“그건 맞는 말이지.”
“능력 면에선 다소 부족함을 보일지 모르나, 저희는 각 조직의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는 죽은 아버지의 비밀 금고 위치도 알고 있지요.”
“호오, 그건 좀 탐이 나는데.”
“네. 저만이 아니라 이들 모두가 비슷할 겁니다. 즉, 저희의 힘과 지지를 얻으시면 더 빠르고 확실하게 흑도를 휘어잡을 수 있으실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너희 힘과 지지 없이도 충분히 잘할 수 있으니까.”
화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홉 세력은 단순히 본부 세력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저희와 연계한 무수히 많은 조직이 있지요. 그중에는 후계자 개인과 계약을 맺은 곳도 많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희가 죽으면, 소부주님께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해를 보게 되실 겁니다.”
“돈이야 어차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 아니냐?”
“……네?”
“그리고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너희 개인과의 계약이 틀어졌다고 그치들이 흑도를 뜨기라도 하나? 다시 나와 계약하면 되는데?”
“소부주님!”
“결정적으로, 그거 계약이긴 하냐? 강압적으로 맺은 관계가 아니라?”
“……!”
“오히려 너희가 죽으면 그치들은 고마워하지 않겠어? 폭리를 취하는 건 너희 쪽이었잖냐.”
화련은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굳이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왜 그렇게 삶에 집착하지?”
“뭐라고요?”
“네 비밀 처소에 가둬 둔 열 살도 안 된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그러는 거냐?”
순간 화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원할 수는 있지. 근데 나이 차가 해도 해도 너무 나잖아? 심지어 한둘도 아니고 열이 넘는다며?”
“……!!”
“예쁘장하게 생긴 사내아이들 데려다 놓고 뭔 짓을 그렇게 했더냐?”
“모, 모함이에요!”
“모함? 그럼 코밑에 수염 나기 시작하고 목소리 두꺼워지면 죽여서 땅에 파묻었다는 것도 다 모함이겠네?”
빠르게 표정을 수습한 화련이 냉정한 어조로 답했다.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저를 모욕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절대 그런 짓을…….”
“왜 자꾸 아니라고 잡아떼는 거야? 부끄러워서 그러냐?”
“아니니까요!”
“너 어차피 죽어.”
“……!!”
되찾은 냉정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직전보다 더욱 하얗게 질려 버린 화련의 얼굴을 보며, 연호정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게 부끄러운 줄은 알지. 그래서 부인하는 거지.”
“…….”
“애초에 부인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면 될 텐데. 하다못해 깨끗이 인정하고 죽을 배포라도 있었으면, 추잡한 인생의 마지막만큼은 조금 덜 더러울 수도 있는데.”
“저, 저는…….”
“내 흑도관(黑道觀)에 너희 같은 것들은 없다. 너희는 흑도가 아니라 그냥 악이고, 더러움이다.”
연호정이 냉정하게 손을 휘둘렀다.
위기를 느낀 화련이 품에서 암기를 꺼내려 했지만, 그녀의 대응은 지나치게 늦었다.
퍼어어엉!
선풍사자권의 권풍이 화련의 머리통을 그대로 분쇄해 버렸다.
풀썩!
머리 잃은 화련의 몸이 바닥에 쓰러져 움찔거렸다.
연호정이 턱을 가볍게 치켜들었다.
“또? 더 할 말 있는 사람?”
“…….”
“더 없나? 유언도 없지? 하긴, 들어 봤자 내 귀만 아프겠지.”
장난스레 웃음 짓던 연호정의 얼굴에 한심함이 깃들었다.
“유언은 없다 하니 한마디만 하겠다.”
“…….”
“죽일 놈이라도 부모는 부모인데, 막을 수 없는 칼이라도 달려드는 패기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냐?”
“……!”
“너희는 흑도인으로서 죽는 게 아니다. 그저 쓰레기로 소각당하는 거야. 그렇게 알고 죽도록.”
스르르륵.
연호정의 몸에서 풍기던 살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다만, 건방은 떨지 않았으니 딱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
“여기 이 사람.”
연호정이 패율을 가리켰다.
패율이 눈을 크게 뜨며 말없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연호정이 후계자들을 보며 말했다.
“이 회의장은 초절정고수가 작정하고 부수려 해도 족히 반나절은 투자해야 부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곳이다. 널찍하니 한바탕하기도 좋겠지?”
“……?!”
“너희 중 한 사람이라도 이 양반의 몸에 생채기를 낸다면 그놈은 살려 주마. 죽여도 그 죄를 묻지 않겠다. 오히려 흑도의 일원으로 반겨 줄 것이다.”
패율은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뭔 짓이냐, 이 미친놈아.”
“성과를 봐야지요.”
“허?!”
“선배도 조심해야 할 겁니다. 쪽팔리게 저런 머저리들한테 당하면 위대한 점창 명성에 똥칠을 하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미친놈.”
연호정이 다른 사람들을 회의장 밖으로 내보냈다.
다시 문이 닫히고, 그 안에는 후계자들과 패율, 그리고 연호정만 남았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댄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시죠, 선배.”
“이거 끝나면 네 차례다.”
“애송이들 칼에 당하지나 마시죠.”
“빌어먹을.”
차아아앙!
단창과 소검을 꺼내 든 패율.
동시에 후계자들이 악을 쓰며 그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