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4화. 굴에 살지 않는 범 (8)
“…….”
아홉 세력에서 뽑아 온 인물들이 모인 거대 회의장에는 알 수 없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그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무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장소에 들어온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살벌한 기파를 발산해 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숫자는 스물이 넘었다. 아홉 문파에 스물이 넘는 숫자,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장강수로채의 후계자, 고복산이 욕설을 뱉었다.
“사람을 불렀으면 빨리빨리들 와야 하는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투덜대는 그를 향해 광도방의 소방주, 석등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인내심을 가져.”
“뭐라고?”
“수적 출신이라 그런가? 도통 느긋함이라는 게 없구만. 하긴, 남의 배 털어 먹고 튀기 바빴을 텐데 참을성이라는 게 있을 리가 있나.”
고복산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할 말 다 했냐?”
“흐아암!”
대놓고 하품을 한 석등이 옆자리에 앉은 여인, 화련에게 물었다.
“자리 끝나고 뭐 해? 나랑 술이나 한잔할까? 여기 간부 식당 음식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
화련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차갑고 냉담한 반응이었다.
무안할 만도 할 텐데 석등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저 하하 웃으며 그녀를 따라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쾅!
탁자를 치며 일어난 고복산이 허리춤에 달린 단검을 뽑아 들려 할 때였다.
“그만.”
묵직한 목소리에 고복산이 움찔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녹림산채의 후계자이자 차기 총채주로 인정받았던 조동국의 장자, 조필학이었다.
“묵룡부주님의 안방에서 사고를 치고 싶으냐? 적당히들 해라.”
조필학의 목소리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실제로 후계자들 중 그의 나이가 가장 많았고, 실력 역시 선두를 다투었다.
당연하지만 그가 산적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녹림채는 그 어떤 세력보다도 방대한 인원과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흑도 특유의 야비함과 강렬한 야성, 난폭함과 교활함은 물론 거대한 자본력과 조직력까지 갖춘 녹림채는 당대 흑도 세력 중에서도 일이 위를 다투는 조직이었다.
고복산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산적과 수적. 참으로 어울리는 조합이지만, 고복산은 조필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도 많고 재능도 뛰어나며, 벌써부터 아버지인 조동국의 업무를 나눠 가진 그였다. 이곳에 있는 후계자 중에서 수장에게 인정받은 몇 안 되는 경우인 것이다.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고복산 입장에서 절대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땅보다 물이 더 넓고 깊은 세상이라지만, 세력만 놓고 보면 장강수로채가 녹림채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결정적으로.
움찔! 움찔!
조필학 양옆에 앉은 후계자들이 한 번씩 움찔거렸다.
머리가 아닌 몸의 반응이었다. 조필학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무거운 살의가 그들의 몸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더하여 이곳에 모인 사람 중 조필학의 심정이 최악이라는 것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쳇.”
고복산이 자리에 앉았다. 물론 석등을 노려보는 눈빛에는 변함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어렸다.
“그나저나.”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흑동상단(黑動商團)의 후계자인 이자곤이었다.
“부주님께서는 왜 우리와 함께 이 녀석들까지 부른 거지?”
이자곤이 후계자들이 앉은 원탁 뒤편을 가리켰다.
후계자들 뒤에는 한 명 혹은 두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엔 후계자들의 호위나 하인 같았지만, 실제로는 문 내에서도 나름의 직위가 있는 이들이었다.
“나도 그게 의문이군.”
전룡상단의 후계자 호백이 머리를 긁적였다.
“보아하니 직책도 중구난방에, 이렇다 할 특성도 없잖아? 심지어 밥맛이라고 얘는.”
호백이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그의 뒤에는 그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사내가 무뚝뚝한 얼굴로 시립해 있었다.
“그건 또 기가 막힌 우연이군. 이쪽도 비슷해.”
이자곤이 껄껄껄 웃으며 앉은 채로 몸을 돌렸다.
그의 뒤, 이자곤이 올려다보는 인물은 꼽추에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셈법은 제법 할 줄 알지만 별 사소한 거에 집착하는 놈이라고. 능력도 없고, 헛소리만 해 대고, 와중에 볼품까지 없고.”
짝! 짝!
익숙한 듯 두어 번 따귀를 때리는데도 꼽추 청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다지 힘을 준 게 아니라서 더 모욕적인 폭행이었다.
“부주님께서 심심하셨던 모양이지.”
답답했던 듯 자리에서 일어난 고복산이 회의장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호오, 역시.”
고복산이 회의장 벽을 매만졌다.
순간 그의 눈에 탐욕이 어렸다.
“대단한데? 이 벽, 그냥 돌벽이 아니야. 암요석(暗妖石)을 가공해 만들었어.”
귀수보(鬼手堡)의 소보주 철위가 특유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암요석이 뭔데?”
“희귀 광물이오. 어디서 나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지간한 철보다도 더 단단해서 평범한 방법으로는 가공할 수 없는 귀물이지. 무게가 굉장하지만, 진동을 흡수하면서도 공기가 잘 통해서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이 밀실을 만들 때 사용한다고 하오.”
고복산이 주먹으로 벽을 두들겼다.
그가 혀를 내둘렀다.
“굉장한 두께군. 모르긴 몰라도 암요석을 이 정도로 두껍게 가공해서 회의장을 만든 조직은 없을 거요. 묵룡부의 자금력이 천하제일이라더니, 과연 엄청나구만.”
이자곤이 껄껄껄 웃었다.
“그게 다 우리 집 주머니에서 나온 돈 아니겠어?”
“돈 많아서 좋겠네.”
“그나저나, 너는 어떻게 암요석을 알고 있지?”
“귀물도 못 알아보는 눈깔로는 수적질 못 해 먹지.”
“어이쿠! 안목 대단한 게 당연한 거였구만?”
낄낄대며 대화를 나누는 그들.
“성격들도 좋군요.”
깔끔하면서도 서늘한 음성.
목소리의 주인공은 화련이었다.
“아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건가요?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가요? 이렇게 웃고 떠들 때가 아닐 텐데요?”
고복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 소리야?”
“부주님께서 이들을 왜 부르셨겠어요?”
화련이 가리킨 사람들은 원탁에 앉지 않은 이들이었다.
고복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럼 다른 얘기를 해 볼까요?”
화련이 조필학을 바라보았다.
“녹림총채주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순간 회의장 안에 적막이 일었다.
츠츠츠.
조필학의 몸에서 일렁이던 살의가 기어이 살기로 변해 흘러나왔다.
화련은 그의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는 아직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어요. 묵룡부로 들어온 이후, 제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죠.”
소부주 즉위식 때 수장들과 함께 온 후계자들도 있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여치 못한 후계자들도 있었다. 화련은 후자였다.
이자곤이 귀찮음이 한껏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리 진행해야 할 일이 있는 모양이지. 다들 비밀리에 뭔가를 할 때는 비슷하게 휘하 조직장들을 불러 모으지 않나?”
“중요한 건 녹림총채주께서 돌아가셨다는 거죠.”
조필학이 으르렁거렸다.
“한 번만 더 쓸데없는 얘기를 꺼내면 팔다리를 잘라 돼지우리에 넣어 주마, 계집.”
화련이 고개를 저었다.
“소채주를 모욕하고자 함이 아니에요. 이 상황이 어딘가 이상해서 그렇죠.”
석등이 슬쩍 물었다.
“뭐가 그렇게 이상해, 연 매.”
“연 매라고 부르지 말아요.”
“하하, 까칠하기는. 여하간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수장들과 후계자들이 묵룡부에 온 뒤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어요. 결정적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분위기라니?”
“묵룡부 출입구에서 방으로 오기까지,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시끌벅적하고 좋더구먼. 묵룡부가 많이 바뀔 것 같긴 해. 그 소부주 때문에.”
화련이 석등을 보며 물었다.
“소부주 즉위식 때 방주님과 함께 왔죠?”
“그랬지.”
“광도방주님께서 다른 어른들과 같이 대전으로 향한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났죠?”
“닷새쯤 됐지?”
“닷새 동안 방주님을 뵌 적이 있나요?”
석등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제야 그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없지.”
“그럼 그 일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나요?”
놀랍게도 석등은 물론 나머지 모두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묵룡부도 그렇고 그들 조직 내에서도 그렇고, 휘하 조직원들을 불러 놓고 각자의 일을 맡기는 경우는 흔하디흔했다.
심지어 한쪽 일이 먼저 끝나면, 일을 끝낸 조직원은 다른 조직원이 일을 끝낼 때까지 무한정 대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그들의 위치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묵룡부에서 보면, 그들이라고 휘하에 둔 조직들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 개인에게 배정된 방은 엄청나게 크고 넓었다. 식사도 제때 제공되었고, 심지어 방 안에 수련할 공간과 측간까지 있었다.
해를 볼 수 없어서 답답할 뿐, 무공을 연성한 그들에게는 아무 어려움 없이 지낼 만한 공간이요, 시간인 것이다. 오히려 그중엔 그 시간에 정체된 무공을 뚫고 싶어서 온종일 운공에 매달리는 이도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밖이 그렇게나 시끄러운데 우리는 거처에서 나오지도 못했어요. 그런 경우야 흔하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닷새는 너무 길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호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우리 아버지가 숙청이라도 당했다는 얘기야?”
화련은 말없이 호백을 보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정확히는,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대답을 침묵으로 한 것이다.
호백이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자신할 수 있나요?”
“당연하지.”
“어떻게 자신하죠?”
“아버지께 따로 연락을 받았으니까.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그건 나뿐만이 아닐걸?”
호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계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화련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연락을 받았다고요?”
“왜? 너는 안 받았나 보지?”
“그 연락, 서신으로 받았나요?”
“하하, 묵룡부가 엄청나게 넓고 미로 같은 곳이라지만 굳이 서신으로 연락을 보낼 필요까진 없잖아? 동네가 다른 것도 아닌데.”
“그럼 그 연락을 누구에게 받았죠?”
“누구냐니?”
호백이 저도 모르게 손으로 뒤, 꼽추 청년을 가리켰다.
“이 녀석에게도 듣고, 그리고 다른…….”
순간 호백은 말을 멈추었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일행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뒤에 시립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직접적으로 전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화련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오늘……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겠군요.”
그때였다.
쿠구구궁!!
굉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암요석 한곳이 푹 꺼지며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에서, 연호정과 패율이 들어왔다.
원탁에 앉아 있던 후계자들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인사를 해야 마땅했지만, 아직 소부주라는 말이 입에 붙지도 않았다. 게다가 삽시간에 달아오른 심각한 분위기에 저마다 당황한 와중이었다.
특히 연호정을 보는 조필학의 눈빛은 광기로 젖어 있었다. 아버지와 동생을 한자리에서 죽인 원수와 맞닥뜨렸으니, 당장 칼을 뽑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얼씨구.”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허리에 철심들 박았어? 예법 같은 건 배워 본 적도 없나?”
그제야 후계자들이 너도나도 허리를 굽혔다.
“소부주님을 뵙습니다.”
“소부주님을 뵈어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그만 됐어.”
“…….”
“그나저나 너희가 왜 이 자리에 앉아 있어? 후계자들더러 앉아 있으라 했는데. 너희는 더 이상 후계자가 아니잖아?”
“……예?”
연호정의 미소가 차갑게 변했다.
“곧 뒈질 놈들이 무슨 후계자야? 시체 후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