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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811화 (811/963)

811화. 굴에 살지 않는 범 (5)

연호정의 말은 그들에게 있어 불벼락이나 다름이 없었다.

깜짝 놀란 그들에게, 양천이 말했다.

“확실히 다르긴 달라.”

양천이 한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은신을 풀고 다가온 묵룡대주가 그에게 몇 장의 서류를 전달했다.

양천이 서류를 흔들었다.

“이것들이 뭔 줄 아시는가?”

“……?”

“아무도 모르게 자네들의 각종 악행을 조사해 적어 둔 문서들이라네.”

“……!!”

수장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굳이 이것을 범죄 행위가 아닌 악행이라고 한 이유는, 당금 천하에 그럴듯한 법도나 체계가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 흑도의 눈으로 봤을 때도 너무하다 싶은 것들이라 굳이 악행이라 한 것이야.”

흑도는 거칠고 야만적이다.

그런 시선이 일반적이었고, 실제로 그런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양천이 추구하는 흑도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때로는 잔인하고 야만적이기도 하지만 품격이 있고 호탕하며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그런 세상을 꿈꿔 왔던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했다. 말하자면 새 세상을 위해 내 손에 피를 묻히겠다는 심정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들은 내 보물이었어. 그리고 이 보물을 이용할 시기를 엿보고 있었지. 다만 내 생각에 당장은 때가 아니었다네. 자네들에게 뜯어낼 것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야.”

양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내 후계자는 그리 생각지 않았지. 상황도 달라졌지만, 서로가 보는 눈이 달랐어. 그리고 나는 후계자의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네.”

양천이 문서를 쥔 손을 펼쳤다.

우우웅.

기이한 공명음과 함께 두둥실 떠오른 문서들이 연호정에게로 날아갔다.

문서를 잡은 연호정이 그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광도방주 석패.”

융단 밖, 아직도 피를 쏟는 머리통 없는 시신이 움찔거리는 듯했다.

“지역 민간인들에게 묵룡부 모르게 염왕채(閻王債)를 놓았군. 지역으로 들어오는 쌀과 비단을 독점, 유통하여 시장 경제 체제를 무너트린 것은 물론 민간인들의 삶을 뿌리부터 뒤흔들었어. 그로 인해 막대한 부(富)를 축적, 황제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너희가 이래서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조직이라도 소시민 없이는 체제가 유지될 수 없어. 애민(愛民) 정신까진 아니더라도, 탄탄하고 오래가는 조직을 만들려거든 지역 민생과 함께 발전해야 함이 마땅하다.”

“…….”

“눈앞의 욕심에만 사로잡혀 한 대(代)도 버티지 못할 폭정을 남발하다가는 결과적으로 모두가 공멸할 뿐이다. 욕심이 많으면 능력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서 제 살까지 깎아 먹고들 있구나.”

수장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두려움 가득한 와중에도 수치심을 느끼는 그들이었다. 아무리 소부주라도 서른이 안 된 청년에게 못된 것만 배웠다는 둥, 욕심만 많다는 둥 꾸지람을 듣는 심정은 끔찍한 것이었다.

연호정이 다음 문서를 들었다.

“전룡상단(錢龍商團).”

순간 전룡상단의 단주 호은이 움찔했다.

“남부의 희귀초를 들여와 중원 전역에 약초와 독초를 거래하는 것을 주 수입원으로 한다. 그러나 뒤로는 허가받은 이들만 출입 가능한 굴을 만들어, 약과 매춘으로 관리와 돈 많은 이들의 욕구를 풀어 주는 대가로 천금을 손에 넣었어.”

호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건 뭐, 삼교 놈들을 욕할 수도 없구나. 놈들이야 우리를 무너트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독심으로 이해할 수라도 있지만, 네놈은 돈 좀 벌겠다고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한 것도 모자라 지역을 다스려야 하는 위정자들까지 무너트렸다.”

“그, 그게 아니라……!”

“제 놈들이 먼저 와서 협박이라도 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

“개수작 부리지 마라. 회원제로 운영되는 이곳을 보고 단호히 거절한 이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거나 폐인이 되었다. 전룡상단과 회원들의 합작으로 벌어진 일들이지.”

연호정의 눈이 호은을 향했다.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리던 호은의 몸이 순간 우뚝 멈추었다. 연호정의 살기에 숨통이 막혀 버린 것이다.

“넌 굳이 네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퍼어어억!

머리통이 사라진 호은의 시체가 그대로 허물어졌다.

수장들은 기겁했다. 석패와 달리 바로 옆에서 함께 무릎 꿇고 있던 동료가 기척도 없이 사망해 버렸다. 튀어 오른 핏물과 뇌수가 그들의 얼굴과 상의를 가득 적셨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일어나 피하질 못했다. 공포로 온몸이 굳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해라.”

연호정은 부주이자 스승인 양천의 허락도 없이 호은을 죽였다.

이 행위는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흑도의 제왕인 양천이 후계인 연호정에게 즉결 처분권을 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석패를 죽였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 수장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새에 강력한 유대를 갖게 된 두 사람의 과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석패나 이놈만의 문제는 아니군. 다 비슷해.”

문서를 쭉쭉 넘기는 연호정의 손길은 유독 거칠어 보였다. 아닌 척하면서도 이들의 만행에 화가 난 것이다.

“방향만 다를 뿐, 하나같이 치졸하고 잔악하기 그지없는…… 음?”

문서를 넘기는 연호정의 손이 멈추었다.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월인문주(月刃門主) 벽운호.”

“……예.”

중년의 사내, 벽운호가 고개를 들었다.

어딘지 피곤하고 초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독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연호정이 벽운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달리 할 말은 없나?”

“없습니다.”

떨림 없는 목소리였다. 함께 대전으로 찾아왔지만, 두려움에 떠는 다른 수장들과는 뭔가가 달랐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

“나는 이놈들과 다르다, 나는 문주로서의 자격이 있다 정도의 말은 할 수 있지 않겠나?”

벽운호가 눈을 감았다.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산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소부주께서는 저를 놀리지 말아 주십시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 년 전까지 꽤 살벌한 인생을 살았군.”

“…….”

“죄 없는 이들을 많이 죽였어. 세력 확장을 위해 굳이 짓누를 필요도 없었던 타 문파를 몇 군데나 멸문시켰구나.”

“그렇습니다.”

담담한 인정이었다.

“인상적이군.”

연호정이 문서를 흔들었다.

“문주에 오른 후 근 칠 년 동안 주변 지역을 정복했어. 본디 흑도 명문으로 불렸으나 그들 중 약한 축에 속했던 월인문이, 당신 대에 이르러 손에 꼽힐 만한 힘을 자랑하게 되었군.”

“…….”

“하지만 오 년 전, 돌연 주변 문파 정복을 멈추고는 아무도 모르게 고아들을 위하는 집단을 설치하고 수해를 입은 이들을 지원하는 등 민생 안정에 힘을 썼군.”

수장들은 놀라서 벽운호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에도 벽운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피 묻은 칼을 물에 몇 번 담갔다고 피 냄새가 가시진 않습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왜 대전을 찾아왔지?”

벽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저는 소부주님의 처사가 과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왔습니다.”

“내 처사가 과했다고?”

“그렇습니다.”

“죄 없는 망종들을 때려잡았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단다.

수장들의 눈에 핏발이 섰다. 설마하니 언제나 뜻을 함께했던 벽운호가 이런 말을 대놓고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어떤 의미를 담은 미소인지는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제대로 된 판결도 없이, 그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모욕적인 죽음을 내려 주었기에 그러한가?”

“그것도 아닙…….”

“아니면, 애비가 보는 앞에서 아들을 죽였기 때문인가?”

순간 벽운호가 움찔했다.

연호정을 보는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놀랍게도 그의 눈빛에는 충격과 서글픔, 일말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연호정을 향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다시 문서를 흔들었다.

“형제처럼 함께했던 문 내의 고수가 있었더군.”

“…….”

“그 고수의 사생아가, 당신이 정복했던 문파의 수제자로 있었고.”

“그만하십시오.”

“대의를 위해 사생아임을 밝히지 않은 그 고수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사정을 뒤늦게나마 알았던 것인가?”

“그만하십시오!”

벽운호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수장들 모두가 깜짝 놀랐고, 그중에서도 소리를 지른 벽운호 본인이 제일 놀란 것 같았다.

“…….”

벽운호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 그가 어떤 기분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 고수가 왜 자신의 사생아를 그곳에 두었는지는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사실조차 몰랐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의 사정에 관해 얘기하고 싶지 않다. 잘 알지도 못해.”

“…….”

“내가 아는 것은, 그 사건으로 인해 당신의 삶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

“좌절, 회한, 서글픔, 동정, 자괴감…… 무슨 감정으로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문서의 내용을 볼 때, 당신 성격이라면 진즉 문주직에서 내려왔어야 했어. 그 정도 책임감은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

“문파가 미쳐 날뛰게 될까 봐 겁이 났나?”

벽운호의 눈이 흔들렸다.

“정복 군주의 갑작스러운 유화 정책에 배신감을 느끼는 건 가장 가까운 중신들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폭주를 막기 위해 아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말에 서투르군. 폭급하고 야망에 불타올랐을지언정, 적어도 당신은 이들처럼 욕심에 눈이 멀어 치졸한 짓을 저지르진 않았다. 최소한 대의라고 변명할 만한 목표 하나는 있었어.”

“저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나? 당신 야망 때문에 아무 죄 없이 죽은 사람이 기백에 달한다. 그중에는 아직 열 살도 넘기지 못한 아이들도 있었어.”

“…….”

“어찌 되었든, 뒤늦게나마 자신을 되돌아볼 정도의 양심은 있었군. 그것이 당신과 여기 모인 저 머저리들의 차이다.”

벽운호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것은 놀랍게도.”

화르륵!

연호정의 손에 불이 붙으며 월인문에 관한 정보 문서가 사라졌다.

“나의 사부이자 부주님과도 비슷하다.”

수장들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벽운호조차 놀란 눈을 한 채 연호정과 양천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연호정은,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해 놓고도 태연한 기색이었다. 심지어 태사의에 앉은 양천조차 턱을 괸 얼굴로 입맛을 다시고 있을 뿐, 화를 내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당신 때문에 신세 망친 사람이 여럿이다. 죽은 사람은 사과조차 못 받는 법, 그들의 유족 모두에게 찾아가 사죄해라. 그들이 당신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라.”

“…….”

“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용서를 받는다면, 그때는 우리와 함께한다.”

“소부주, 저는…….”

“난세의 무림인으로 살아가는 이상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숙명이다. 그러나 당신은 과했어. 이제 와서 목숨이 아깝지는 않을 것이다.”

“…….”

“받아들이겠나?”

벽운호는 말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연호정이 양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된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양천의 눈이 서늘해졌다.

“이 자리에서 다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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