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화. 굴에 살지 않는 범 (4)
연호정이 식당에서 벌인 일은 순식간에 묵룡부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의 그러한 행동에 통쾌함을 느끼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불안감을 느꼈다. 급변하는 정세와 분위기에 또 무슨 일이 터질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로, 흑도인들의 그러한 성향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백성 대다수와 같았다. 높으신 분들의 대립과 경쟁으로 인해 피를 보는 것은 자신들이니, 민감하게 반응하고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흑도는 현실이고, 백도는 이상향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기도 했다.
자기만 알고, 거칠고, 불안해하고, 하나의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닌 권력이 많고 힘이 강한 이들일수록 흑도와 백도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강한 힘을 얻은 자는 더 강한 힘을 원한다. 당연하게도 이미 가지고 있던 힘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연호정은 바로 그 지점을 건드렸다.
그리고 묵룡부 내에 모인 흑도 수장들은, 연호정의 생각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쿠구궁!
대전의 문이 열리고, 흑도의 수장들 몇몇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강수로채의 총채주를 위시로, 흑도의 다섯 명문 문파의 문주들이 함께했다. 염상(鹽商) 등 각종 불법적인 상업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인 흑도의 상단주들도 셋이나 있었다.
그렇게 아홉의 거물들이 양천을 찾아왔다.
“재미있구먼.”
태사의에 앉은 양천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들어찼다.
“평소에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자네들이 우르르 몰려들다니, 아주 새롭구먼.”
아홉 수장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묵룡부의 주인을 뵙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양천을 흑도의 주인, 흑도의 왕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런 그들의 입에서 묵룡부의 주인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양천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떠나,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노회한 양천은 단번에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 하기야 상황상 모르기가 힘들기도 했다.
“해서, 그렇게들 모여서 예까지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수장들은 말없이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왜 서로들 눈치를 보는가? 내게 해선 안 될 말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그,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리는 수장들.
그중 장강수로채의 총채주 고인욱이 허리를 펴고 말했다.
“저희가 이렇게 대전으로 찾아온 것은 얼마 전 식당에서 벌어졌던 사건 때문입니다.”
“아, 그 사건 말인가.”
양천이 재차 비릿하게 웃었다.
“왜? 자네들도 소부주에게 뭔가 죄를 지었는가?”
“그, 그렇지 않습니다.”
“하면?”
고인욱이 이를 악물었다.
“부주님께서 흑도의 제왕으로 군림하신 후, 저희는 언제나 성심을 다해 부주님을 모셨습니다.”
“그랬던가?”
“……저희가 부족하여 마음에 차지 않으셨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죄를 드리옵니다.”
양천이 아무렇게나 손을 내저었다.
“됐고, 그래서 할 말이 무엇인가?”
고인욱은 잠시 망설였다. 생각보다 양천의 반응이 시큰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녹림의 총채주를 살해한 소부주의 행동은 흑도에 크나큰 혼란을 초래할 것입니다. 명백한 이유도 없이 녹림의 수장을 죽였으니, 이처럼 참담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이유가 없다?”
“무, 물론 총채주의 아들이 소부주와 그분의 친구를 욕보였습니다만, 그렇다 한들 총채주까지 벌한 것은 과한 처사입니다. 하물며 총채주가 직접 아들을 베어 묵룡부의 권위를 바로 세우겠다고 한 충심마저 짓밟았다 합니다. 이는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보게, 고인욱.”
직책이 아닌 이름 석 자를 부른다.
그 호칭만으로도 고인욱은 물론 함께 온 수장들 모두 불안함을 느꼈다.
“예, 부주님.”
“지금 내게 정치질을 하려 하는가?”
“헉! 다, 당치도 않습니다! 어찌 소인이 그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저 백도 정파의 위선자들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쏙쏙 뽑아 그것만이 진실인 양 축소시켜 얘기하는가?”
“부, 부주님?”
“그게 아니면.”
훅!
양천의 시커먼 기파가 순식간에 대전을 장악했다.
“자네들이 그렇게 충실히 모시는 이 흑도의 제왕에게, 일련의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고 찾아와서 따지려 드는 것인가?”
“허억!”
고인욱이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면? 무슨 이유에서 이처럼 말 같지도 않은 단체 행동을 벌이는 거지?”
고인욱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때, 선두에 선 수장 하나가 허리를 폈다.
한쪽 눈에 안대를 찬 강단 넘치는 외모의 사내, 바로 흑도 명문 광도방(狂刀房)의 방주 독안귀도(獨眼鬼刀) 석패였다.
“광도방주 석패,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허락한다.”
“소부주가 조동국 총채주를 죽인 이유는 그가 벌인 치졸한 행위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치졸한 행위라.”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말해 보게.”
“예?”
“그 치졸한 행위가 무엇인지, 어디 자네 입으로 말해 보게.”
석패의 외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조동국 총채주는 휘하 우두머리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심심찮게 마을로 내려가 인간 사냥을 했고, 아녀자를 욕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총채주 자신도 전국에서 납치한 미녀들을 능욕하고 쓰임이 다하면 죽여 없애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
양천의 눈이 무심해졌다.
“죽을 이유로는 차고 넘치는군. 그래서 어떻다고?”
석패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깃들었다.
“그가 부끄러운 짓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고작 그런 일로 목숨을 잃을 만한 인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고작?”
“……설령 죄를 묻는다 해도, 적법한 절차에 걸쳐 분명하게 잘잘못을 따진 후 판결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소부주의 행동은 아무리 관대하게 보아도 지나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건 또 재미있는 말이구나.”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의 위치가 소부주보다 높은가?”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하면? 자네가 무언데 소부주를 관대하게 보니, 마니 하는 소리를 뱉는단 말인가?”
석패의 볼이 살짝 떨렸다.
“제가 그리 보는 것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소부주의 행동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화르르륵!
양천의 기도가 불처럼 뜨거워졌다. 그 강렬한 기도 앞에서는 자존심 강하고 강단 넘치는 석패조차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앞에서, 상식을 논하는 것이냐?”
“……부주님.”
“못 본 사이에 참으로 많이 컸구나, 석패.”
순간 석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소인이 경망하여 부주님의 마음을 어지럽혔…….”
그때였다.
우두둑!
“크윽!”
석패가 벌떡 일어나더니, 꼿꼿이 선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를 향해 손을 뻗은 양천, 그 굴강한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흑사자의 기가 보이지 않는 밧줄이 되어 석패를 완전히 묶어 버린 것이다.
석패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떻게든 용을 쓰고 있지만, 이 강력한 무형의 결박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이, 이럴 수가!’
아무리 수준 차이가 심하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과했다.
물론 성천의 고수라도 대놓고 허공섭물을 구사하여 초절정고수를 결박할 수는 없다. 다만 양천의 살기가 석패의 마음에 틈을 만들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양천의 진기가 단숨에 그의 심신을 사로잡은 것이다.
양천의 손이 서서히 조여졌다.
우둑!
“큭!!”
석패의 오른팔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우우우우우우웅!!
대전 전체가 실제로 어두워졌다. 양천의 흑사자기가 야명주의 빛마저 어둡게 만든 것이다.
마치 먹구름이 잔뜩 낀 겨울철 저녁을 보는 듯했다. 양천의 신공은 그렇게 막강했다.
“당당함은 나 자신의 마음에 거리낄 게 없는 이가 보여 주는 용기이지, 옳고 그름도 모르는 썩은 개 눈을 한 놈이 보여 주는 만용이 아니니라.”
“크윽! 부, 부주님! 저는 그저……!”
“조동국에 관한 일이 너무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것인가?”
양천이 차갑게 웃었다.
“왜? 네놈들이 단체로 나서면 내가 물러설 줄 알았더냐? 네놈들의 힘이 없으면 묵룡부도 반쪽짜리에 불과하니, 설사 투왕이라도 감히 함부로 하지는 못할 거라는 같잖은 계산에서 나온 행동인가?”
“……!!”
“내가 너희를 어찌 휘하에 두었는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기억을 벌써 잊은 모양이구나.”
양천이 혀를 찼다.
“이렇게까지 멍청할 줄이야. 이런 놈들을 데리고 천하일통을 꿈꾸었다니, 내 눈을 다 뽑고 싶은 심정이구먼.”
석패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부주님! 부디 용서를……!”
“용서?”
양천이 태사의 옆, 회랑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판결을 내려 보거라. 저 무도한 놈을 용서해 줘야겠느냐?”
그때였다.
후우우우우웅!
회랑 안쪽에서부터 시커먼 기류가 회오리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강력한 힘이 자아내는 무시무시한 야수성은 양천의 그것과 판박이였다. 완벽히 수습되지 않아 다소 거친 기도였지만, 분위기만큼은 양천을 빼다 박은 것이었다.
수장들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대전을 장악한 양천의 힘과 동류(同流)의 힘이 회랑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콰르릉!
한 줄기 폭음과 함께 엄청난 권풍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퍼어어억!
끔찍한 소리와 함께 석패의 머리통이 화려하게 분쇄되었다.
저벅저벅.
회랑에서 연호정이 걸어 나왔다.
“지켜 줘야 할 사람들을 착취하고 능욕한 대죄를 감히 고작이라는 말로 넘기려 한 순간부터 죽을죄를 지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연호정이 태사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멋진 선풍사자권(旋風獅子拳)이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게지. 하나 네 오성과 자질이라면 금방 네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후우우우웅!
대전을 장악했던 양천의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다.
퍽! 투두둑!
머리를 잃은 석패의 몸뚱이가 붉은 융단 밖으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
남은 수장들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버렸다. 대전을 장악한 기운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 기운이 심고 간 공포는 여전했다.
양천이 서늘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송곳니는 노래지고 발톱은 죄 뭉개져 제 손으로 사냥도 못 하지. 그래서 너희들은 반푼이다.”
“……!”
“너희 역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숱한 사투를 벌였을 것이다. 경쟁자를 죽이고, 스승의 뒤통수를 치고, 부하를 배신하고, 세력을 규합해 힘 싸움을 벌이는 등등 거칠지만 치열한 노력 끝에 나름의 성공적인 삶을 영위했지.”
“…….”
“그렇게 살아왔다면, 그 과정이 어떠했든 최고의 자리를 거머쥐었다면,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줬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냐?”
양천이 혀를 찼다.
“네놈들이 숙청당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수장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양천이 연호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정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의 조직을 조사했소. 능력은 좋지만 연고가 없고, 이상은 높지만 소인배들의 협잡질을 이기지 못해 땅바닥을 기는, 꽤 괜찮은 인재들이 많이 있더군.”
“……?!”
“그들 모두를 묵룡부로 소환했소. 앞으로 그대들 대신 우리와 함께 새 시대를 만들어 갈 이들이오.”
“허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수장들을 보는 연호정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러기 싫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