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6화. 천명 (6)
“…….”
강량과 묵비는 얼빠진 표정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어쩐지 조금은 탁한 목소리.
묵비가 툭 던지듯 물었다.
“어떤 놈이에요?”
“뭐가.”
“연 공자 그렇게 만들어 놓은 놈이요.”
“……누구겠냐.”
츠츠츠.
묵비의 몸에서 삼엄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당장이라도 활에 시위를 걸 기세였다.
“아서라. 전에 손 하나 까딱하기도 전에 쓰러진 거 기억 안 나냐? 활을 쥐기도 전에 무릎부터 꿇게 될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이렇게 망가트려 놔요?”
망가트려 놓다.
묵비의 그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상태라고 강량은 생각했다.
연호정의 몸은 그야말로 멍투성이였다. 얼굴에는 잔 상처가 가득하고, 왼쪽 눈은 실핏줄이 터져 흰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왼팔에는 부목을 댔고, 오른손도 찢어지고 부어서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절뚝거리며 걷는 걸 보면 다리도 꽤 심하게 다친 듯했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다. 무신(武神)의 경지에 오른 절대고수가 보일 모습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퉁퉁 부은 오른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뭐, 괜찮아.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이런 거니까. 얼추 하룻밤이면 그래도 사람다운 몰골로 돌아올 거다.”
실제로 부러진 뼈가 빠른 속도로 붙고 있었다. 전신의 모든 내공을 쏟아부어서 이렇지, 소모한 내공이 차오르면 회복에도 탄력이 붙을 것이다.
하룻밤이면 괜찮아질 거라는 연호정의 말은, 그래서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꼴이 된 건데요? 아무리 양 부주가 강하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것 같은데요?”
강량이 은근슬쩍 묵비의 말을 받았다.
“형님이 이런 꼴이면, 아무리 투왕이라도 꽤 당하지 않았겠습니까?”
“멀쩡하다, 그 양반은.”
입을 떡 벌린 채 경악하던 강량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묶어 놓고 팼답니까? 어떻게 해야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해요?”
“죽자고 싸우는 거 아니면 내가 당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거 아니겠냐. 경지가 다른데.”
“형님 꼴을 보면 죽자고 싸운 것 같은데요?”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저것 배울 게 많아서.”
강량의 눈이 빛났다.
“투왕의 무공을 배웠습니까?”
연호정의 눈에 의외의 빛이 어렸다.
묵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 공자가 투왕의 무공을 배운다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생사전이 아닌 비무라도 이렇게 독하게 당했다면, 뭔가 배울 게 있었다는 뜻이죠.”
“왜? 이미 연 공자의 무공은 투왕의 무공에 뒤지지 않는데.”
경지가 아니라 무학 그 자체를 말함이었다.
실제로 연호정의 무공은 고금제일의 무신이라는 사방무제의 사신공이었다. 위대한 무인이라고 최고급 무공을 익히란 법은 없지만, 분명 연호정의 신공은 고금에 손꼽히는 절기가 분명했다.
달리 말하자면, 굳이 다른 사람의 무공을 새로이 익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데, 거기에 또 다른 신공을 연마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걸 어찌 알았냐?”
묵비는 깜짝 놀라서 연호정을 보았다.
반면 강량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은 묵룡부의 후계자입니다. 차기 부주로서 넘치는 무공을 지녔지만, 그걸 누가 알아준답니까? 별호나 이름 석 자로 통할 만한 세상이 아니잖아요. 실제로 붙어 볼 게 아니라면.”
“흐음.”
“무림인, 아니 흑도인의 권위는 힘에서 나옵니다. 형님이 진정 묵룡부주의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투왕의 무공을 익히는 게 당연하죠.”
확실히 이런 부분이 다르다.
연호정은 오랫동안 흑도의 우두머리로 살아가며 그들의 특성을 배웠고 보이지 않는 규율을 익혔다.
그러나 강량은 연호정과 달리 뿌리부터가 흑도였다. 그래서 흑도의 본질과 집단을 보는 특성을 누구보다 흑도인답게 해석할 줄 알았다.
“네 말이 옳다. 아직 전부는 아니지만, 사부님의 무공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터졌지.”
묵비가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어떤 무공이기에…… 아니, 그걸 떠나서 권위를 위해 배운다고요?”
강량이 말했다.
“차라리 저처럼 뿌리가 흑도였다면 시간을 더 들여도 괜찮았을 겁니다. 흑도 모두가 인정하는 문파 출신이라면, 질투는 해도 후계자 자리를 꿰찼다는 것 자체에 불만을 느끼진 않았겠지요.”
“아?”
“형님은 다릅니다. 형님은 정파, 그것도 최고 명문가라는 육가 출신이에요. 묵룡부주도 이 정도는 해 줘야, 불만을 가진 다른 흑도 인사들을 더 강하게 찍어 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네 통찰력이 놀랍구나. 거기까지 읽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런 건 통찰력이라고 할 만한 게 아닙니다. 흑도 출신인 제게는 당연한 겁니다. 흑도는 곧 힘이고, 후계자는 그 힘의 계승자니까요.”
묵비는 강량이 말하는 흑도의 개념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 어찌 되었든 간에 술은 나중에 드시죠. 그런 상태로 드시면 몸만 더 상하실 겁니다.”
“그럴 수는 없지.”
“그냥 같이 술 한잔하는 것뿐이잖습니까.”
“너희와의 술자리잖아. 그냥이 아니지. 게다가 묵룡부의 후계자가 된 지금, 이런 시간이 언제 또 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으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날을 미룰 필요는 없어. 나도 한잔하고 싶기도 하고.”
기실 겉모습만으로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분명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 정도로 연호정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익숙하다는 듯 퉁퉁 부은 손으로 술병을 잡아 두 사람의 잔을 채워 주었다.
“고생들 많았어. 여러 가지로.”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안주가 하나도 없네요. 식당에서 좀 가져오죠.”
“그래, 부탁해.”
잔을 비운 묵비가 방을 나갔다.
강량이 쓰게 웃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뭐가 말이냐?”
“뭐든 말입니다.”
연호정의 잔을 채우며, 강량은 생각했다.
‘언제나 앞서가시는구나.’
황궁의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 양천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계자로 즉위한 것도 모자라, 제 사람을 챙김과 동시에 차기 묵룡부주로서의 교육까지 받고 왔다.
그리고 지금, 자신과 술자리도 하고 있다.
새삼 정말 바쁘게도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호정 개인의 시간이 사라진다는 느낌도 받았다.
‘이러한 삶의 방식 덕분에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는 걸까.’
사람마다 발전의 방법은 다르다. 재능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재능이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연호정은 고금을 통틀어 누구보다 단시간에 강호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무공은 물론 사회적 지위, 나아가 영향력에 있어서까지 중원 정점을 논한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것도 대운을 타고 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런 사람에게, 강량은 자신 있게 말해 줄 수 있었다. 이것은 결코 운 때문이 아니라고. 운이 마지막 한 손을 거들어 줄 수는 있겠지만, 그만한 영역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연호정의 노력과 삶의 태도 덕분이라고.
물론 자신 역시 곁에서 연호정을 지켜보지 않았다면 마냥 부러워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강량은 연호정이 부럽지 않았다.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절대 형님처럼은 살지 못할 거다.’
이것은 연호정이 더 우월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형님은 나와 달라.’
연호정은 이미 자신의 삶을 개척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최선의 길과 노력을, 필요할 때마다 쏟아부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노력하고, 어떤 환경을 만들어야 이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왜 그리 빤히 쳐다보냐?”
“잘 생겨서요.”
“그래, 많이 놀려라.”
연호정이 술을 마셨다. 인내심 좋은 그조차도 독한 술에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가 난 입 안이 무지하게 쓰라렸기 때문이었다.
강량이 다시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이왕 흑도의 후계자가 되셨으니, 앞으로 하실 일이 많겠지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형님께서 이곳에 집중하기 위해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상처투성이에 퉁퉁 붓기까지 한 얼굴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니,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퍽 웃겼다.
“그래, 무림맹이 문제겠지.”
“제갈 군사님께는 따로 서신을 보내셨지요?”
“그랬지.”
“형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제갈 군사에게는 알린 걸 가주님께는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연호정의 얼굴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정말 후계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으셨겠지만, 뭔가 상상도 못 할 일을 벌일 거라고는 예상하셨을 거다.”
“그러니까요. 그런 일은 먼저 상의를 하셨어야지요.”
“그렇지. 하지만 하지 않았지.”
“왜 그러셨습니까?”
“글쎄다.”
연호정이 잔을 매만졌다.
“왠지 주절주절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어.”
“생각보다 감정적이신데요?”
“언제는 감정적이지 않을 때가 있었냐.”
강량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많이 고달파지실 겁니다.”
무림맹 봉공이자 강호육가의 일익을 담당하는 연위의 아들이 흑도 연맹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는 진정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많은 가문과 문파가 연가를 손가락질할 것이며, 설령 봉공들이 연위를 지켜 주려 한다 해도 파도치는 여론을 잠재우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겠지.”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강량이 물었다.
“따로 방책이 있으십니까?”
치이이이익!
연호정의 몸 곳곳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퉁퉁 부었던 얼굴과 손이 점차 본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크기를 불린 광명신단이 본격적으로 그의 몸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연호정이 왼팔의 부목을 떼며 말했다.
“있다.”
담담하고 믿음직한 대답이었다.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됐습니다.”
그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괜찮다는 한마디, 앞으로의 일에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는 한마디.
“천명(天命)이라는 것은 타고난 것, 하늘이 내린 숙명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지요. 정말 그런 것이 있다면, 저는 형님의 천명이 이곳에서 끝날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냐.”
“타고난 것을 바꾸는 것도 사람의 힘이라고 들었습니다. 천명대로 살든 천명마저 바꾸든, 앞날이 고달플지언정 꺾이지 않고 잘 나아가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그래야 형님한테 편승한 저의 인생도 덜 고달파지지 않겠습니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미 둥지를 떠나 창공을 나는 새가 할 말은 아닌 듯하다.”
“형님이야말로 낯간지러운 말씀을 잘도 하십니다.”
두 사람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강량이 다시 술병을 들었다.
“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거나하게 취해 보자고요!”
“좋지.”
그때였다.
“소부주(小府主)님 계십니까?”
방 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량이 피식 웃었다.
“소부주라, 어색하기 짝이 없네요.”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무슨 일인가.”
“저, 식당에서 소부주님의 친구분께서 분란을 겪고 계시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치이이이익!
두 사람의 몸에서 주기가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