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4화. 천명 (4)
사락. 사락.
책장을 넘기는 양천의 손동작은 일정했다.
장마다 쓰인 내용이 다르고 글자의 양도 다를 텐데 속도는 거의 비슷했다. 누군가 보면 대충 넘긴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눈은 고요한 집중으로 가득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양천의 독서량은 상당했다. 오히려 여느 명문가 출신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었는데, 그것은 그의 성장 배경 때문이기도 했다.
강력한 무공과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무림에 뛰어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생존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속임수를 썼고, 남의 뒤통수를 쳤다. 남이 가져야 할 걸 탈취했고, 죄 없는 무림인을 죽이면서까지 더 강한 무공을 손에 넣으려 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으로 생존은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최고가 될 수는 없었다.
양천은 자신의 무지함에서 벗어나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많은 책을 읽었다. 자신의 꿈, 목표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러한 과정 중 일부가 이제는 습관이 되어, 크게 할 일이 없을 때는 이렇게 아무 책이나 붙잡고 읽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습관은 뜻밖에도 무공 경지의 상승까지 불러일으켰다. 몸으로 겪은 경험과 수많은 책을 통해 얻은 지식과 사유는 무극의 경지에 도달한 고수에게도 큰 도움이 됐던 것이다.
“후우.”
책 한 권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각에서 반 시진.
그렇게 오늘 벌써 세 권의 책을 읽었다.
“행정학(行政學)이라…… 알 듯하면서도 모르겠군.”
책을 덮은 양천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지고의 무력, 바다처럼 넓고 깊은 진기는 그의 몸에 피로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래 수많은 일을 겪은 그의 정신은 천하제일을 다투는 내공력으로도 피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용이야 달달 외울 수 있지만, 문제는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지다.”
어떠한 지식도 외우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다. 그 다양한 지식을 적재적소에 응용, 발휘해야만 그 가치가 있는 법이었다. 게다가 행정은 곧 치세와 닿아 있어, 한쪽에 무게를 실으면 다른 한쪽에 치명적인 오류가 나기 일쑤였다.
양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것도 고려하지 않고 천하를 손에 넣겠다고 하늘을 올려다봤다는 것이 참…….”
고개를 휘휘 젓던 양천이 대전의 문을 향해 말했다.
“곧 손님이 올 것이다.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으니 바로 들이도록 하라.”
“예.”
잠시 후.
쿠구궁.
열린 문 너머에서 연호정과 강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사의가 아닌 다탁 앞에 앉아 있던 양천은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한 녀석은 사랑스러운 제자이자 후계자이고, 다른 한 녀석은 기어이 내 목을 노리겠다며 이를 가는 귀신 붙은 검이로구먼.”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진저리가 난다는 듯 양천이 얼굴을 부르르 떨었다.
“같잖은 예법은 집어치워라. 그리고 사부한테 그런 형식적인 포권이 뭐냐? 제대로 인사를 하려거든 절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연호정은 그저 웃어만 보였다.
그 웃음에 이전과 같은 빛은 없었다. 양천은 그것을 모른 척했다.
“해서, 이 시간에 날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그 살기 넘치는 검까지 달고서 말이다.”
“한 가지 확언을 해 두기 위해서입니다.”
“누구한테? 나한테?”
“둘 모두에게 말입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또 무슨 엉뚱한 사안을 들고 왔길래 그리 뜸을 들이느냐? 말해 봐라.”
그 순간, 연호정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서걱!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 한 움큼이 연호정의 손에 잡혔다.
양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호정 뒤에 서 있던 강량도 깜짝 놀랐다.
연호정은 등 중앙까지 오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뒷덜미가 다 드러날 정도로 짧게 잘라 버렸다. 그 행동에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잘린 머리카락을 두껍게 매듭지은 연호정이 그것을 다탁에 올려 두었다.
양천이 연호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뜻이냐?”
“우리는 무슨 관계입니까?”
담담한 연호정의 질문에는 무시무시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쉽게 대답할 만한 질문이 아니다. 양천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았다.
“사제지간이 되었지.”
“그것뿐인 관계는 아니겠지요.”
“물론이다. 너와 나는 스승과 제자 사이지만, 세상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야.”
양천은 연호정이 강량까지 끌고 와서 굳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을 이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 이런 자리는 꼭 한 번 필요했다.
‘행동이 정말 빠르군.’
새삼 연호정의 이런 면은 배워야 한다고, 양천은 생각했다.
“말뿐인 사제지간이지만, 네 말마따나 서로에게 배우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것이 무공이든 전략이든 행정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
“그런 면에 있어서 우리 관계의 본질은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분투하는 동업자라고 할 수 있겠지. 뭐,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동업과도 좀 다르지만 말이다.”
연호정은 여전히 담담한, 그리고 무겁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세간에서 말하는 진정한 스승이었다면, 의동생이 아니라 가문 전체가 당신을 죽이겠다 날뛰어도 내가 막을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입니다. 사적인 인연보다 공적인 인연이 더 깊지요. 이전보다 사적으로도 가까워졌다 한들, 그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나는 내 의동생이 당신을 죽이겠다 나설 때 결코 막지 않을 겁니다.”
양천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죽일 수는 있겠나?”
“그건 이 친구의 역량에 따라 다르겠지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때가 온다면 결코 막지 아니하겠다?”
“그렇습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긴 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들 필요가 없기도 했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당연한 거 아닌가, 그거?”
양천의 말에 놀란 건 연호정이 아니라 강량이었다.
양천이 가소롭다는 듯한 눈으로 강량을 쳐다보았다.
“나는 네 녀석의 재능을 인정한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네 녀석에게 훗날 무신(武神)의 경지에 오를 만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
“한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양천의 눈빛이 점점 싸늘하게 식었다. 미소는 그대로지만, 그 눈빛은 무척 살벌했다.
“원수를 갚기 위해 칼을 간다? 무림인으로서 당연한 행위다. 능력이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수의 목을 딴다? 흑도인으로서 당연한 행위다.”
“…….”
“그 당연한 걸, 누구 허락까지 받아야 하는 건가?”
강량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불순분자를 족치지 않고 지금까지 살려 둔 이유가 궁금한 건가? 그건 전에 말했을 텐데?”
“……!”
“기억이 나지 않으면 그것대로 상관없어. 지금의 나는 네 녀석을 죽이고 싶지 않아. 그것뿐이다.”
“…….”
“다만, 항상 각오하며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언제 눈이 돌아가 한창 수련 중인 네놈에게 암살자를 보낼지 모르는 일이니까.”
강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양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또한 당연한 것 아닌가? 설마 내가 계속 기다려만 줄 줄 알았나? 아니지. 나도 문득 짜증이 나서 네놈을 죽여 버릴지도 몰라. 그날이 오늘이 아닐 뿐이다.”
“……그렇군요.”
“다만 너와 나의 차이라면, 네놈이 날 죽이려 들 때 이 배은망덕한 제자 놈은 그걸 막지 않겠지만, 내가 널 죽이려 들 때만큼은 어떻게든 날 막으려고 들 거라는 거지.”
강량이 저도 모르게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난 그러한 사실에 조금도 화가 나지 않고, 서운하지도 않다. 이유를 아느냐?”
“……?”
“나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
떨리는 강량의 눈빛.
그 눈빛을 대하는 양천의 눈은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이 제자 놈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어. 덕분에 여러 번 미망에서 빠져나왔지. 하지만 작정하고 칼을 뽑으려 한 나를 멈추게 한 적은 없다. 나를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야.”
“……!!”
“이 녀석만이 아니다. 천하 누구도, 설령 권신과 검선이라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천하의 뉘라서 나를 막으려 들겠느냐?”
양천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능력이 있어 날 막으려 한다 해도, 놈들이 내게서 가져갈 수 있는 건 내 목숨뿐이다. 하지만 애초에 목숨을 버려서라도 목표를 이루겠다는 의지는 나의 것이니, 그 목숨도 내가 버리는 것이지 놈들이 취하는 게 아니야.”
“…….”
“몸과 영혼을 바쳐 이루겠다는 진심 가득한 목적이 생긴다면, 그리고 그것이 바로 너의 목숨이라면!”
“…….”
“천하 누구도 날 막을 수 없다. 내가 죽어도 널 죽이고 난 연후에 죽겠지.”
“…….”
“물론, 그 모든 결과는 내 의지다.”
무시무시한 의지와 자존감이 드러나는 말이다.
양천이 연호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머리카락은 뭐냐?”
“짧았던 머리가 여기까지 길었습니다. 그사이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에 큰 변화가 생겼지요.”
“그래서?”
“그 머리카락만큼의 미련을 항상 돌아보고 잘라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웃기는군.”
화르르륵!
양천의 손에서 뿜어진 불꽃이 연호정이 잘라 낸 머리카락을 그대로 태워 버렸다.
“관계가 깊어졌다고 없는 낭만이 생긴다더냐?”
“그렇군요.”
“그럴 리도 없겠지만, 네 녀석과 나는 아무리 가까워져도 절대 붙지 않는 두 개의 선(線)이다. 그저 같은 목적을 향해, 더 가깝게 붙어서 나아갈 뿐이다.”
훅!
짧은 연기와 함께 재가 되어 사라진 머리카락.
양천이 다탁 위에 쌓인 재를 털었고, 연호정이 강량을 돌아보았다.
“저 양반이 괜한 말을 더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이러하다.”
“형님.”
“그러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나 때문에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너는 내게 많은 것을 양보해 주었다. 네가 얻어야 할 것이 눈앞에 보일 때, 절대 내 생각은 하지 마라.”
강량의 얼굴에 격동이 어렸다.
뒤에서 양천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 앞에 두고 잘도 그런 말들을 하는구먼. 여기가 묵룡부주 대전이란 걸 잊지 마라.”
연호정이 강량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음고생 하게 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먼저 가라. 사부님과 할 얘기가 있다. 술은 내일 꼭 마시도록 하자.”
“……형님.”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괜한 부담을 안겨 드렸습니다. 내일 술은 제가 사지요.”
그렇게 강량이 대전에서 나갔다.
연호정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양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해야 하는 길인지, 슬슬 실감이 되느냐?”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사부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그간 내 심정이 얼마나 복잡했는지를 눈곱만큼이라도 알길 바란다, 이 망할 제자 녀석아.”
“앞으로 더 알아 가겠지요.”
양천이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가자.”
“예?”
“왜? 더 할 얘기가 있느냐?”
“……뭐, 할 얘기야 많긴 합니다만.”
“많으면 나중으로 미뤄라. 내 볼일이 먼저니까.”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가 보면 안다.”
“알겠습니다.”
“근데, 그 말 사실이냐?”
“예?”
“저놈이 날 죽이려 들 때 말리지 않겠다는 거.”
“그러기로 했잖습니까?”
“……넌 진짜 냉정한 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