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3화. 천명 (3)
연위와 제갈문호가 입맹한 것은 해가 서산으로 반쯤 넘어간 시각이었다.
바람은 잔잔했다. 알맹이 큰 눈이 하늘하늘 내리는 대별산 자락, 곳곳에 등이 켜진 무림맹의 정경은 펑펑 내리는 눈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먼 옛날 같소.”
“예?”
연위가 담담히 말했다.
“대별산 인근에 접근한 신화교의 무장들을 해치우기 위해 맹에서 고수들을 차출했던 때 말이오.”
“아, 그때 말입니까.”
제갈문호가 피식 웃었다.
“그사이에 별일이 다 있었지요.”
“그러게나 말이외다.”
연위가 살짝 입김을 불었다.
허연 수증기가 흘러나오며 떨어지는 눈송이를 밀어 냈다.
“당가주는 잘 지내고 계실지 모르겠군.”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당가를 거의 완전히 수복하고 사천의 민심을 되돌려 놓았다고 하더군요.”
“좋은 소식이구려.”
“그렇습니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암왕께서도 뒤에서 버텨 주고 계신 모양입니다. 직접 사천삼사(四川三使)들을 만나 민생 안전을 위한 얘기를 많이 나누고 계신답니다.”
“그건 뜻밖이구려.”
“그렇습니까?”
“성천의 고수라 하면 지고(至高)의 무력만 떠올려 봤지, 그와 같은 수완도 있으리란 생각은 못 했소.”
“하하, 보통은 그렇지요. 하나 생각해 보면, 암왕께서는 당가 역사상 다시 나기 힘든 천재라 불렸던 분입니다. 무공뿐이 아니라 전략, 행정 등의 영역에서도 불세출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하였습니다.”
“불세출이라.”
“무공, 지략, 치세 등 모든 분야에 있어 만능의 영역을 구가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께서 오랫동안 은거해 계셨으니, 이는 사천 민중들에게 있어 크나큰 손실이었다 할 수 있지요.”
“……지닌바 능력이 출중하다 한들 피붙이와의 갈등 앞에서는 다 평범한 아비가 되고 만다오.”
제갈문호는 순간 움찔했다. 연위의 상황을 생각하면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지닌바 재능과 능력이 뛰어나도 그것을 온전히 개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요.”
“예, 그렇습니다.”
“나는 그러지 못했소.”
“예?”
“나는 호정이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꽃피우도록 돕지 못했소. 연가의 가주로서 가문과 강동 지역만을 생각했을 뿐, 정작 내 자식들에 관한 관심은 높지 않았소이다.”
“지나친 자기 비하입니다. 호정은 무림사에 찾아보기 힘든 고수가 되었고, 실제로 당대 천하의 흐름을 바꿔 가고 있잖습니까? 연가주께서 호정을 잘 키우지 않았다면 호정이 이토록 드높게 개화(開花)할 수 있었겠습니까?”
제갈문호는 모른다. 연호정이 죽음 이후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연위는 연호정을 믿었다. 아들이 한 번의 인생을 살다 돌아와, 앞날을 내다보고 지닌바 경험과 재능을 스스로 꽃피웠다는 걸 믿었다.
당연히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일이지만, 연위는 믿겠다고 했고 실제로 믿게 되었다. 이제 그는 큰아들의 모든 부분을 의심치 않았다.
“호정을 가르친 건 내가 아니오. 세상이오.”
“연가주.”
“그러나 호정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여, 아비로서 최소한의 의무마저 저버릴 생각은 없소.”
연위가 웃으며 말했다.
“회의장으로 갑시다. 봉공과 장로들을 불러 주시오.”
제갈문호의 눈에 격동이 어렸다.
* * *
“…….”
일행 중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연호정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속내도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행은 연호정의 마음이 복잡하다는 것을 훤히 알 수 있었다.
적을 속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내 사람들 앞에서는 작정하고 숨겨도 쉽게 숨겨지지 않는다. 친인들에게 있어 작전과 전략 따위가 없는 사람이기에 그들은 연호정의 기분을 잘 알 수 있었다.
“왜 그래요?”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런 자리에서 말수가 적은 묵비였다.
“그렇게 죽상으로 있을 필요 없잖아요.”
실제로 연호정은 지난 양천과의 술자리 이후, 곧장 일행에게 가서 모든 사실을 알렸다.
당연히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업자라면 몰라도 사제지간이라니? 하물며 연호정은 백도 정파의 명문가인 연가의 장남이었다.
일행은 처음으로 그의 선택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물론 그전의 몇몇 사건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말린 적은 처음이었다.
묵비가 그랬고, 진양이 그랬다. 심지어 막원조차도 연호정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며 진심 어린 우려를 표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강량이었다.
‘형님은 형님이 원하는 미래를 위해 달리고 있습니다. 지쳐서 쉰 적은 있었어도, 목표가 달라진 적은 없었지요. 이 길이 형님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판단이라면, 우리가 형님을 막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양천은 강량에게 있어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연호정은 강량에게 있어 생애 처음으로 생긴 의형이었다.
그런 의형이 원수인 양천의 제자로 들어가겠다고 한다.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음을 알아도 서운하거나 화가 날 수 있다. 아니, 절대다수의 사람이 그런 감정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강량은 그러지 않았고, 연호정 역시 강량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즉위식 후, 연호정은 흑도의 여러 수장들은 물론 묵룡부의 장로들, 전투 부대 대장들과 짤막한 대면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일행과 함께 보는 것은 사흘 전 즉위식 이후 처음이었다.
“량이의 말대로예요. 연 공자는 언제나 목표를 잊은 적 없이 달려 나갔죠. 이번만큼은 너무 위험한 것 같아 말리긴 했지만, 연 공자 자신이 그런 판단을 내렸는데 끝까지 뜯어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죠.”
“…….”
“해결책을 찾았고, 판단을 내렸어요. 그거면 된 거 아닌가요?”
그제야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나, 그다지 복잡하지 않아.”
묵비가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복잡해서 표정까지 굳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래?”
“사람 한두 번 보나요.”
“너도 이제 어지간한 무림인 뺨을 치는구나. 안목이 제법이야.”
“그런 건 별로 관심 없어요.”
묵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부터 정리해요. 우리와 술자리를 가지는 건 나중이라도 괜찮으니까. 차라리 울상이면 몰라도, 그렇게 각 잡고 앉아 있는 연 공자와 대화하는 건 재미없어요.”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난 묵비가 방에서 나갔다.
그녀답지 않게 말이 많았지만, 그것은 그녀 나름의 배려였다. 지금 이 자리에 연호정만큼이나 마음이 복잡한 사람이 하나 있기 때문이었다.
“음…….”
슬쩍 주변 눈치를 보던 진양이 헛기침을 하며 일어났다.
“오늘 수련을 빼먹었는데, 땀 좀 빼고 오겠소.”
막원이 따라 일어났다.
“그 수련, 내가 한 번 봐줄까?”
“허억! 저, 정말이십니까?”
“나중에 힘들다고 곡소리나 내지 말게. 이왕 땀 흘릴 거, 제대로 흘려 보자고.”
“감사합니다!”
진양의 얼굴은 감격과 기쁨으로 가득하였다. 일세의 고수인 백병신군이 자신의 무공을 봐준다니, 이 어찌 영광이 아닐 수 있겠는가.
막원이 슬쩍 연호정의 얼굴을 보았다.
연호정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은 막원이 기지개를 켜며 걸어갔다.
“어이구, 말년에 고생할 게 빤히 보이는구만. 어쩌겠나, 잘난 동생 둔 죄지.”
그렇게 두 사람이 방에서 나갔다.
방에는 연호정과 강량만이 남았다.
“…….”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숨이 막힐 듯한 그 침묵은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그리고 그 묵직한 침묵을 걷어 낸 것은, 한 사람의 깊은 한숨이었다.
“이거 쪽팔려서 원. 저렇게 대놓고들 눈치를 주니 더 환장하겠구만.”
강량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연호정이 강량을 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미안함을 담고 있었다.
“전에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그래, 기억한다.”
연호정의 목소리는 다소 잠겨 있었다.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말했습니다. 복수도 실력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원수를 죽이겠다는 목표는 언제나 가슴속에 숨 쉬고 있으며, 양천 인생의 마지막은 제 손으로 마무리 짓겠다고 하였지요.”
“그랬지.”
“형님께서 그걸 알고 계시기에 저는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
“뭐, 솔직히 말하지요. 기분이 좋을 수는 없어요. 당연하죠.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인연이 나의 철천지원수와 사제지간을 맺겠다는데, 그걸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게 사람입니까? 맹탕이지.”
“그래.”
“기분 나쁩니다. 왜 하필이면 양천인가, 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럴 거다.”
강량이 씨익 웃었다.
“양천을 황제의 부마도위로 밀어 넣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형님이 제게 물었지요? 기분 안 나쁘겠냐고. 복수가 더 힘들어지게 되었다고.”
“그래.”
“그 말을 듣기 전까지, 저는 그 문제를 떠올리지도 못했습니다. 이유를 아십니까?”
“…….”
“저한테는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황제의 부마면 어떻고 무림맹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끝에 가면 내가 죽일 사람인데.”
“…….”
“이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제 실력으로는 상대 못 해요. 그렇다고 머리가 좋아서 계략을 써 망가트리겠습니까? 그 생각도 해 본 적은 있지만, 상대는 강호의 단맛, 쓴맛은 물론 똥 맛까지 다 본 노회한 고수입니다. 상대가 될 턱이 없지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었지.”
연호정답지 않은 말이었다.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도 말했듯, 복수는 제 몫입니다.”
“…….”
“그리고 형님도 알 겁니다. 때가 되어 제가 칼을 뽑으면, 그땐 스승이라고 하여 절 막을 수 없다는 걸.”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양천의 격이 올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판단에, 양천에게 어느 정도 존경심도 들었다. 겉으로 보이는 사제지간을 떠나, 예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관계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훗날, 강량이 약해진 양천을 향해 칼을 뽑을 때.
연호정은 절대 그 행위를 막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 영역까지 독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양천과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이다. 또한, 그렇게나 독하게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강량 앞에서도 그를 대외적인 스승으로 삼겠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사람 감정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건 연호정도 어쩔 수 없다.
다만, 연호정은 공적이기도 하고 사적이기도 한 목표 이전에 강량에게 미안했다.
애초에 그 미안함까지도 감수했지만, 막상 그 일을 겪고 나니 더더욱 미안해졌다. 그래서 쉽게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양천은 원수지만, 형님은 은인입니다.”
“…….”
“만약 그때 형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즉시 묵룡부로 찾아갔을 겁니다. 그리고 비참하게 죽었겠지요.”
강량의 눈이 빛났다.
“형님 덕분에 얻은 새 삶입니다. 형님 덕분에 얻은 새 기회예요. 은인과 원수, 둘 중 누구에게 더 마음을 써야 하는지는 그걸로 이미 결정 난 것 아니겠습니까?”
“…….”
“제 복수는 형님의 목표가 달성되고 나면 이뤄질 겁니다. 저보다는 형님이 먼저예요.”
“미안하다.”
“미안하면 술이나 사십시오. 기분이 안 좋기는 하니까.”
“그래, 사마. 하지만 내일로 미뤄야겠다.”
강량이 투덜거렸다.
“말 나온 김에 오늘 마시지.”
“하나만 묻자.”
“예?”
“강해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냐?”
강량의 눈빛이 돌변했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냥 말로만 하는 약속은 그만두겠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어딜요?”
“너의 원수에게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