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02화 (802/963)

802화. 천명 (2)

묵룡부가 후계자를 내정한 그날.

무림맹 사절단은 어느새 무림맹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하북에서 하남까지 걸린 시간은 실로 엄청나게 빨랐다.

하지만 누구도 힘드니까 쉬고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사태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중 연위에게서만큼은 조금의 여유가 느껴지고 있었다.

일행이 대별산 무림맹 영역의 초소를 지났을 때였다.

“억!”

제갈아연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아버지!”

무림맹으로 이어지는 산길에, 제갈문호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제갈문호가 포권을 취했다.

“황궁에서의 일, 정말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연위와 팽무강이 마주 포권했다.

“별말씀을.”

허리를 편 제갈문호가 웃으며 딸을 바라보았다.

“어땠느냐? 황궁은?”

“살벌함이 말도 못 했죠.”

“그래, 고생이 많았다.”

“한데 아버지, 지금 그것보다는…….”

“먼저 무림맹으로 들어가거라.”

“네?”

제갈문호가 팽무강을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연가주와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딸과 함께 먼저 입맹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팽무강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말이겠소.”

“감사합니다.”

“그전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팽가주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게 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팽무강이 한숨을 쉬었다.

“고맙소.”

“그런 말씀 마십시오. 두 분께서 목숨을 걸고 할 일을 하셨듯, 저도 이 자리에서 제가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도 고맙소이다.”

“하하.”

팽무강이 제갈아연과 함께 무림맹으로 향했다.

연위와 제갈문호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생각보다 칙칙하십니다.”

피식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은 제갈문호였다.

연위가 쓰게 웃었다.

“그렇소?”

“예.”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매무새 신경도 못 썼소.”

“하하, 그 뜻이 아닙니다.”

“음?”

“표정 말입니다.”

연위가 흠칫했다.

제갈문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연 대수라면 그와 같은 판단을 내리기 전, 분명 가주께 먼저 동의를 구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이제 보니 아닌 것 같군요.”

“내 아들은 다 컸소. 저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고, 저만의 방식으로 천하를 위하고 있소. 녀석이 굳이 자신의 판단을 애비인 내게 말할 필요는 없소이다.”

“그렇지요. 세상천지에 연 대수와 같은 사람은 또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제갈문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연 대수 그 사람, 아닌 척해도 가족을 많이 챙기지 않습니까?”

“그렇소.”

“특히나 이번 일 같은 경우, 꽤 무서운 파장이 일어날 것임을 그 똑똑한 연 대수가 모를 리 없지요. 그래서 적어도 연가주께는 먼저 말씀을 드렸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은 한 적이 없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을 벌일 거라는 느낌은 받았소.”

“그랬군요.”

“그리고 애비인 내가 할 말은 몸조심하라는 한마디뿐이었소.”

제갈문호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정말 대단한 부자지간입니다. 저 같으면 대체 또 뭔 일을 벌이려고 그러냐며 꼬치꼬치 캐물었을 겁니다.”

연위가 피식 웃었다.

제갈문호가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이번 일, 묵룡부주의 의지가 아니라 연 대수의 의지가 확실하지요?”

“그렇소이다. 군사에게도 따로 연락이 갔다고 알고 있소.”

“예, 제게도 왔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입니다.”

“자기가 볼 때 옳지 않은 방식이라면 목이 날아가도 거부했을 놈이오. 누가 먼저 했든, 이 결과는 호정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갈문호가 손으로 한옆에 자리한 평평한 바위를 가리켰다.

두 사람이 산비탈 길을 내려다보며 나란히 바위에 앉았다.

“짐작하셨겠지만, 무림맹 안이 조금 시끄럽습니다.”

“조금이 아니겠지.”

“예상한 것보다는 조금이 맞습니다. 물론 연가주께서 보시기에는 요란도 이런 요란이 없을 겁니다.”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중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오. 모두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소이다.”

“이게 어찌 연가주의 탓이겠습니까.”

“나는 아들을 사랑하고 지지하지만, 그 녀석이 벌인 일로 누군가가 피해를 봤다면 마땅히 아비인 나의 잘못이기도 하오.”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어찌 연 대수의 탓이라고만 하겠습니까?”

“군사.”

“삼교 탓입니다.”

제갈문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평화롭던 우리 세상을 침범한 그들의 잘못입니다. 훨씬 더 높게 날아오를 수 있는 천재들을 진흙밭에 구르게 만든 삼교의 잘못입니다.”

“…….”

“삼교가, 상황이, 세상이 지금의 무림을 만들었습니다.”

“그 세상은 결국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오.”

“그래서 더더욱 연 대수의 탓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연 대수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다고 말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연위는 제갈문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감동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는 제갈문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아들은 분명 많은 공을 세웠지만, 공은 공일 뿐이다.

그런 연위의 표정을 제갈문호는 귀신처럼 읽어 냈다.

“아십니까?”

“무엇을 말이오?”

“군사인 나는 모두를 의심해야 합니다.”

“…….”

“심지어 혈육조차도 이전과 같이 마음 편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군사는 모든 가능성을 상정해야 하는 직위입니다. 나를 제외한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될 자, 그게 바로 군사라는 족속들이지요.”

연위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일었다.

본인 말고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의 삶이란 얼마나 갑갑하고 불행한 것인가.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 말이지만, 새삼 제갈문호의 어깨를 짓누른 책임의 무게를 알 것 같았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내가 선택한 길입니다. 군사를 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동의했지요. 이 정도는 당연합니다.”

“내, 뭐라 할 말이 없소.”

“하지만 말입니다.”

“……?”

“이상하게도 나는, 연 대수만큼은 의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공공대사도, 승현진인도, 그리고 무림맹 봉공들과 장로들 대다수도 비슷할 것입니다. 이유를 아십니까?”

“…….”

“예, 모를 겁니다. 혈육인 연가주는 알 수 없겠지요. 사랑하는 자식이지만, 뛰어난 재주와 괴물 같은 재능을 지녔을 뿐 그저 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연가주는 절대 모를 겁니다.”

제갈문호의 말은 연위의 마음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다.

연위의 성격을 고스란히 분석한 말이기도 했다. 연위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족이 남들보다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특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만 특별한 것이다.

연위는 그 구분을 너무나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연 대수, 아니 호정의 눈은 언제나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

“그 불은 밥을 먹을 때도, 대련을 할 때도, 수련을 할 때도, 저와 함께 전략 전술을 구상할 때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보진 못했지만, 감히 추측하건대 호정은 자면서도 삼교를 향한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을 겁니다.”

제갈문호가 탄식을 머금었다.

“어지간해야 의심을 하지요. 호정의 일거수일투족이 삼교에 대항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호정을 보다 보면, 하늘이 내린 삼교의 천적이 바로 그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실제로.”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맞잖소?”

제갈문호가 쓰게 웃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호정이 나서서 싸웠던 삼교 놈들 중 무사한 놈이 없었지요. 그 정도면 실로 천적이라 할 만합니다.”

“허…….”

“그런 면에 있어서 나는 이상적인 군사가 아닙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무림 정치와 삼교에 관한 일에 한해서만큼은, 나는 혈육보다도 호정을 더 믿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것인 제갈문호였다.

“그러나 호정은 지나칩니다.”

“…….”

“물론 우리에게는 상관없습니다. 그 우리가 어디의 누구까지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괜찮습니다.”

“…….”

“문제는 그 우리에 속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힘을 탐하는 이들도 있고, 잘난 사람을 무작정 질투하고 끌어내리려는 이들도 있고, 그런 이유조차 없이 그저 튀는 사람을 증오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당연히 이용하려 드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알고 있소.”

“그리고 우리보다, 우리가 아닌 이들이 훨씬 많은 세상입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문호가 연위의 옆얼굴을 보며 말했다.

“황궁에서의 일은 잘 보고받았습니다만, 군데군데 누락된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맞소. 서신으로 적기 어려운 내용들도 많았소.”

“여기서 먼저 들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리하리다.”

연위는 황궁에서 벌어졌던 일을 모두 말했다.

황후와의 만남, 황제와의 만남.

황궁에서 터진 전투의 흐름과 결과는 물론 황제와 나누었던 사적인 대화까지 전부.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 든든한 아군이 되어 주신다고 하셨군요.”

“그렇소. 그리고…….”

“천하를 하나로 만들겠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동의하십니까?”

“내 의사는 아무 상관이 없소.”

“상관이 있지요.”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오. 나는, 그리고 호정은 황제 폐하께서 옥체를 험하게 다루시면서까지 와신상담하신 것을 보며, 그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알았소.”

“능력은 어떻습니까?”

“행정 부분에 대해 지나가듯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소.”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가늠할 수가 없더군. 그 깊이와 방대함을.”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비록 무림맹 봉공으로 들어와 잘 부각되지 않았지만, 연위는 강동 백성들의 삶을 잘 보살핀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강동의 명군(名君)이다.

물론 연위뿐만이 아니었다. 한 지역의 패자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다들 수준급의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그런 연위가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느꼈다면, 황제의 지식과 지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는 뜻이리라.

제갈문호는 문득 연위의 요대에 걸린 검을 보았다.

“그것이 제국검(帝國劍)입니까?”

“그렇소.”

“천라제국검…… 황제 폐하께서 작정하고 나서려 하신다는 걸, 그 검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갈문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십시오. 주변인들로선 질투가 날 정도로 사랑을 받으십니다그려.”

“열 말 술이라도 우습겠소?”

“하하하!”

제갈문호의 웃음은 언제나처럼 맑고 청량했다.

생각해 보면 그처럼 대단한 사람도 없었다. 군사란 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자리지만, 동시에 그만큼 강력한 권력을 쥐고 흔드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문호는 단 한 번도 그 권력을 사적으로 휘두른 적이 없었다. 그의 눈과 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으며, 잘난 사람을 보고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연위는 제갈문호를 믿었다. 사람으로서도 호감이 갔지만, 그의 청렴함과 책임감이 좋았다.

하지만 제갈문호의 이 말에서만큼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연가주.”

“말씀하시오.”

“각오하셔야 합니다.”

“무슨 각오 말이오?”

제갈문호의 눈이 빛났다.

“호정과 절연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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