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801화 (801/963)

801화. 천명 (1)

황궁의 일이 얼추 마무리되자, 무림맹 사절단도 출궁 준비를 마쳤다.

“폐하께 따로 인사드리지 않아도 되겠소?”

팽무강의 말에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폐하와 대담을 나누었소. 오늘 아침에 출궁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다시 보게 될 날이 머지않을 것이니 인사는 필요 없다고 하셨소.”

“음, 그렇구려.”

팽무강은 못내 아쉬운 기색이었다. 그 역시 황제와 몇 번 대화를 나누었지만, 연위처럼 진득한 관계는 쌓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개인의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북의 패자로서 황궁과 가장 가까이 있는 그는 언제나 황제와의 만남을 고대했었다.

“이만 갑시다. 아연아, 챙길 것은 다 챙겼느냐?”

“네. 개방도들이 도와준 덕분에요. 아, 그리고 후개가 황궁 밖에 있으니 같이 돌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연위가 황궁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있었군. 이만 출발합시다.”

“그럽시다.”

궁문을 몇 번이나 통과하는 동안 관리들은 일행을 막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를 구하고 반역자들을 처단한 의인들이었다. 공(功)에 따른 포상조차 받지 아니하고 돌아가는 그들을 보는 궁인들의 눈빛은 존경과 감사함으로 가득했다.

“그나저나, 황후께서는 어찌 될 것 같소?”

“모르겠소. 그날 이후 황후께서는 거처에서 움직이질 않으셨다고 들었소.”

“폐하께서는 별말씀 없으셨소?”

“그렇소. 게다가 그 문제는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니 굳이 묻지 않았소.”

“하긴, 그도 그렇소.”

“하여튼 참 힘들었소이다. 나이 먹고 이렇게 오래 칼질한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말인데, 나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출발합시다.”

“허허, 좋소.”

그렇게 일행이 황궁 외성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어! 저기 후개가 있어요!”

가득상 역시 일행을 발견했는지 이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제갈아연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가득상에게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이상하네?”

제갈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평소처럼 방방 뛰지 않고.”

연위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잠시 후, 가득상이 일행 앞에 도달했다.

‘……?!’

일행은 내심 놀랐다. 다가온 가득상의 표정이 엄청나게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굳은 그의 얼굴을 처음 보는지라, 일행 모두가 긴장했다.

팽무강이 물었다.

“왜? 무림맹에 무슨 일이라도 터졌는가?”

“그건 아닙니다만…….”

가득상이 잠시 머뭇거렸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설명해 보게.”

“설명 전에…….”

가득상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마른 입술은 쩍쩍 갈라져 있었다. 보아하니 눈도 충혈된 것이,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았다.

“연가주님.”

“음?”

“이 서신을 읽어 보십시오. 연 대수에게서 온 겁니다.”

“……흐음.”

가득상이 건넨 서신을 펼친 연위.

이내 그의 눈이 흔들렸다.

“뭔데 그러시오?”

팽무강과 제갈아연이 슬쩍 연위의 뒤편에서 서신을 훔쳐 읽었다.

“헉!!”

충격적인 서신의 내용에 두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연위가 서신을 접으며 말했다.

“술은 나중에 마셔야 할 것 같소.”

* * *

“……!!”

광장에 침묵이 어렸다.

중원 최강자 중 하나, 패왕 연호정의 등장만으로도 어지간한 고수들은 숨을 죽일 상황이었다. 지닌바 무력을 떠나, 당금 무림에서 연호정만큼 유명하고 영향력이 강한 사람은 또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분노를, 누군가에게는 흠모를, 누군가에게는 질투를, 누군가에게는 환호를 받는 당대의 젊은 천재.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만나고 싶어 하는 유명인의 등장.

그러나 그 유명인의 입에서 상상도 못 할 말이 나왔다. 그 말이, 그의 느닷없는 등장과 강렬한 기파보다도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왔느냐.”

충격의 연속이었다.

태사의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양천의 얼굴에 인자한 기색이 어렸다.

표정, 목소리, 그리고 한층 부드러워진 기도는 하나의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연호정이 부른 사부님이라는 말이 진짜라는 것.

그 와중에도 도열한 간부들의 얼굴에는 미동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의 그 긴장한 채로 굳어진 얼굴 그대로였다.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그들이 받은 충격 역시 작지는 않았다.

“편히 있거라.”

“알겠습니다.”

연호정은 붉은 융단 위에 당당히 앉았다.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마치 편한 안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리를 접어 앉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그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양천이 물었다.

“내상은 다 나았느냐.”

내색하지 않았을 뿐, 그간 자잘하게 입은 내상들은 여전히 연호정의 몸에 남아 있었다.

더하여 양천의 일권에 당한 것도 아직 제대로 처치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낫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완벽하진 않습니다.”

“황궁에서 혈옥마군과도 싸웠다고 들었다.”

충격으로 붕어처럼 입만 뻐끔대던 무사들은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연호정은, 양천이 일부러 그 일을 꺼냈음을 알았다.

“예, 그랬습니다.”

“어땠느냐.”

“강했습니다. 아직 여기 계시는 백병신군 선배님이나 혈옥마군을 상대하기에는 벅찬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왜일까?

딱딱하게 굳어 있던 간부들의 얼굴에 약간의 안도가 어렸다. 이유는 그들도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곧 그들의 얼굴에 크나큰 놀라움이 떠올랐다.

“혈옥마군의 무력은 신선제왕보다 명백히 아래지만, 지닌바 재능만큼은 한 수 위라 하였지. 또한 성정이 간악하고 종잡을 수가 없어, 그와 싸워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보다 강한 자를 제외하면, 그럴 것 같았습니다.”

“한데도 너는 멀쩡히 두 발 딛고 서 있구나. 벅찬 상대라고 했음에도.”

“종이 한 장 차이의 승부였습니다만, 그 종이의 두께가 제 팔뚝보다 굵은 것 같았습니다. 지원군이 오지 않았다면 결국 저의 패배였을 것입니다.”

충격으로 물들었던 간부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실, 그들은 패왕의 무력이 진정 성천에 근접했다고는 믿지 않았다.

당연했다. 무극을 연다고 다 성천일 수는 없는 것, 그들이 진정 존경받아 마땅한 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신(神)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서로를 채찍질해 가며 더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연호정이 무극을 열었을 확률은 높았다. 그에 도달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로 분명한 소문이 나기는 힘들 테니까. 실제로 목격자도 워낙 많았다.

하지만 그가 성천에 이름을 올리기에 적합한 고수인지는 따져 봐야 할 문제였다.

비왕 공손백룡을 죽였다지만, 직접 보지 않은 이상 어떤 변수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독을 썼거나 암습을 가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삼교라는 적의 끄나풀이었으니, 애초에 그 수준을 낮춰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혈옥마군은 달랐다.

그는 중원 천하가 인정한 성천의 고수로서, 삼군(三君) 중 가장 위험하고 난폭한 자라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와 종이 한 장 차이의 승부를 봤다면, 진정 성천에 이름을 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 두께가 팔뚝만 하든 허벅다리만 하든, 작정하고 싸워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연호정의 무공은 찬사를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우우우우웅.

간부들의 기도가 작게 요동을 쳤다. 애써 본심을 숨기려 했지만, 충격이 큰 탓에 기도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양천과 연호정은 그들의 변화를 모른 척했다.

“듣기로 막원 후배와도 비무를 할 예정이라던데.”

양천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맞는가?”

“그렇소.”

좌중은 깜짝 놀랐다.

도열한 간부들과 무사들 사이에 막원이 있었다. 그 존재감이 너무 옅어서 묵룡부 소속 무사 중 하나인 줄로만 알았지, 백병신군인 줄은 아무도 몰랐다.

막원이 웃는 얼굴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왔을 때 느껴지는 기파가 실로 대단하더군. 이 정도라면 지금의 나와 승부를 논하기 어려울 것 같았소.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아 내가 먼저 비무를 권했소이다.”

심지어 연호정이 아니라 막원이 먼저 비무를 청했단다.

그 말은 곧 막원이 투지를 불태울 정도의 무력이라는 뜻, 연호정의 무공이 성천의 이름에 부족하지 않음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보다 더 우위에 있는 자의 경험을 배우고, 자신에 이르지 못한 자를 가르치며 배우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박빙의 고수와 싸우며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서로를 더 높은 경지에 올려 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어렵소이다.”

“그렇지.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많은 비무를 가졌으면 좋겠네.”

“나야 영광이오. 이 나이 먹고 처음으로 의제(義弟)를 두었소이다. 아무래도 말년이 아주 재미있어질 것 같소.”

어디선가 헉! 하는 소리가 터졌다.

백병신군 막원은 그 명성이 혈옥마군 곽준에 비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희대의 고수가 연호정과 의형제를 맺었단다.

광장에 흐르는 침묵의 성질이 바뀌었다.

기존에는 경직된 놀라움, 착잡함, 두려움 등으로 가득했다면, 이제는 한없는 경악 속에 일말의 기대감이 섞이기 시작했다.

성천 중에서도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신선제왕의 하나이자 흑도 무림의 총수를 스승으로 둔 자.

신선제왕보다 한 수 아래지만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재능을 지녀 조만간 그에 이를 수 있다는 삼군의 하나를 의형으로 둔 자.

결정적으로, 수년 동안 새외의 적장들을 물리치며 서른도 전에 무극을 열고 성천에 이름을 남긴 자.

그런 자가, 그들의 작은 주인이 되는 것이다.

양천이 고개를 돌려 간부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불안함은 사라졌는가?”

간부들이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그들의 불만은 불안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양천도 알았고 그들도 알았다.

지금 양천의 말은 공식적으로 그들의 면을 세워 줌과 동시에, 허튼 생각을 품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후우.”

태사의에 등을 묻은 양천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면 된 것이지.”

무슨 의미일까.

누구도 그 말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간부들도, 무사들도 그 피로감이 느껴지는 말의 뜻을 고민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단 한 명만큼은 양천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연호정의 담담한 말에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스르륵.

태사의에서 일어난 양천이 계단을 내려와 연호정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후우우웅.

두둥실 떠오른 술병과 잔 두 개가 두 사람 앞에 놓였다.

양천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듯 거리낌 없이 말했다.

“한 잔 따라 보아라.”

연호정이 공손히 그의 잔을 채웠다.

그대로 잔을 비운 양천은 무릎에 손을 얹은 채 잔을 내려다보았다.

‘공허하구나. 그리고…….’

이 한 잔으로, 이 며칠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단 하나의 감정을 말끔히 씻어 낼 수 있었다.

‘마음이 편하다.’

양천이 눈을 감았다.

툭. 투둑.

몇 방울 눈물이 빈 잔에 떨어졌다.

잠시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던 양천이 술병을 들었다.

“한 잔 받아라.”

“감사합니다.”

조금 둔탁해진 목소리.

양천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눈은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잠깐 놀란 양천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너만은 알아준다는 것이냐.’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러했다.

이 신비로운 제자 녀석은 항상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상황이 나빴든, 좋았든.

그리고 지금도, 연호정만큼은 알아주고 있었다. 평생의 꿈을 중원 천하를 위해 진정으로 내려놓은 거인의 초연함을.

웃으며 연호정을 보던 양천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기쁘구나.”

“죄송합니다.”

연호정이 잔을 비웠다.

그리고 양천도 잔을 비웠다.

두 사람이 술 한 병을 비우는 데에는 반 시진이나 걸렸다. 그 반 시진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담담하고도 엄숙한, 격정적이고도 서글픈 즉위식이 고요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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