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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799화 (799/963)

799화. 흑제(黑帝) (4)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안에 깃든 감정에 혼란은 없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부주님의 선택입니까?”

“그래, 그것이 내 선택일세.”

“그렇군요.”

양천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 역시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나하나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는 그의 눈빛을, 양천은 읽을 수가 없었다.

양천이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뜨끔하더구먼.”

“…….”

“다른 걸 다 떠나서, 그 야망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지 생각해 봤네.”

흑도의 총수 자리가 떠민 꿈은 아닌지.

사실은 이 자리로도 충분히 만족하는데, 세상눈이 부담스러워 내 꿈은 흑도로서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인 건 아닌지.

양천은 그걸 고민한 것이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독한 말이라도 흘리지 않고 진심으로 고민할 줄 아는 것만으로도 부주님의 그릇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띄워 주지 말게.”

“정작 띄워 드려야 할 때는 못 해 먹겠다고 말씀드리지요.”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그 말에 아차 싶었던 건 사실이라네. 그래서 고민했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

“어느 정도는 자네 말이 맞네. 나에게는 천하통일의 꿈이 있었지만, 그 꿈은 너무나도 막연했네. 나는 내 목표를 구체화하지 못했어. 자네 말마따나, 진정 그 목표를 위해 움직였다면 본부의 무사들을 진득하게 훈련만 시키진 않았겠지.”

훈련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천하통일을 원했다면, 어쩌면 모용군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악랄한 짓을 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다른 방식을 원했어.”

“……?”

“만장절애에 올라 열매를 따고자 한 게 아니라, 절벽 꼭대기에서 열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단 말일세.”

양천이 손을 뻗었다.

천천히 떨어지던 눈송이 하나가 그의 손바닥을 피해 아래로 흘러내렸다.

“묵룡부주, 흑도 무림의 왕이 되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돌이켜 보면, 양천의 행보는 확실히 애매한 점이 있었다. 열정의 차이가 아니라 방식의 차이였다.

천하 정점에 서기 위해 묵룡부를 만들었다. 흑도 통일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흑도 문파들을 무너트렸으며, 그중에는 명문인 귀철검문도 있었다.

보타암을 무너트려 검후의 자질을 지닌 이를 손에 넣으려 했고, 남부 상권에 손을 대서 더 많은 자금력을 손에 넣으려 하였다.

그것뿐이었다.

그 일련의 행위는 힘을 모으기 위함이지, 그 자체로 대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조직이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해 몸부림친다. 묵룡부는, 양천은 다른 조직과 똑같이 움직였을 뿐이다.

대업에 필요한 준비 과정은 되어도, 대업을 이루기 위한 결정적인 일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일.

진짜 세상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면, 연호정이 말했던 대로 차라리 삼교와 손을 잡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저울의 균형을 뒤흔들어 훗날 이득을 얻기 위해 머리를 쓰는 게 가능성이 크니까.

그도 아니면 누구보다 먼저 황궁 일에 관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을 거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양천의 행보는 천하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가 멍청한 줄 알았지. 머리가 굳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구나, 라고 생각했네.”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신 것이지요.”

“맞아. 자네 말 때문이 아니라, 진정 천하통일을 위한다면 당장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생각해 보니 정말 오만 방법이 떠오르더군.”

방법은 많다. 실현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느릿하고도 기다란 한숨. 가느다란 입김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 무수히 많은 방법이 떠오르다가, 문득 하나의 감정이 나를 감싸더군. 그게 무엇이었는지 아나?”

“…….”

“막막함일세.”

연호정은 말없이 양천을 바라보았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말이야, 젊었을 때 품었던 열정 대다수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알게 되네.”

“동시에 부러워하지요.”

“그 말도 맞네. 차라리 뭘 몰랐던 시절, 뒤가 없이 짜릿하게 달려갈 수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부럽게 생각하지.”

“…….”

“그래도 결국 쓴웃음과 함께 지난날의 열정을 철부지 때의 망상이라고 털어 내 버린다네.”

“그게 잘못 발전하면 패배주의가 되고, 염세주의가 되는 겁니다.”

양천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는 여전히 연호정을 보지 않고 있었다.

“지금 자네 입장에서 내게 할 말은 아닌데?”

“어차피 마음 안 바꾸신다면서요.”

“그래도.”

“그리고 이따위 말이 부주님의 결정에 영향을 끼칠 리 없다는 것도 압니다.”

“자네는 가끔 참 얄미울 때가 있네.”

“가끔이라고 표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날 때마다 얄미워서 멱을 따 버리고 싶었던 건 아니었군요.”

“그랬으면 진즉 자네 모가지를 따 버렸지. 하긴, 가끔 얄미울 때마다 살심이 무럭무럭 솟구치긴 하지.”

“천만다행이군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화는 두 사람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를 되찾아 주었다.

양천이 다시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두 개의 크고 작은 눈송이가 그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작은 눈송이가 먼저 녹았고, 큰 눈송이는 구슬프게 울었다.

“천하일통의 꿈은 버리지 않아.”

“예.”

“그것은 내가 젊은 시절부터 꿈꿔 왔던 소망이야. 나이가 들어 젊었을 때의 열정을 잊고 차츰 세상에 물들었지만, 그 하나의 목표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나 다름없네.”

“예.”

“다만.”

양천이 눈을 감았다.

“……다만.”

그가 주먹을 쥐었다.

슬피 울던 눈송이가 모두 녹아 사라졌다.

“힘으로 세상을 손에 넣을 수는 없겠지.”

“…….”

“상황도 안 좋고, 여러모로 막막하기도 하네. 결정적으로…….”

“…….”

“난 나의 야욕 때문에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민간인들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아.”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반대로 양천이 눈을 떴다. 맑고 깊은 그 눈에 비친 눈송이가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할 만한 계획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생각도 안 했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계획도 없다네. 그저 내 손으로 천하를 하나로 만들고 싶었을 뿐, 그 이상은 없었어.”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순순히 인정하는 그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양천의 격은 한 단계 더 높아졌다. 연호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내가 과거 영광스러웠던 흑도 호걸로서의 정체성을 잇는다고 생각하네. 어두운 귀족이라고까지 불렸던 과거의 흑도인들에게는 저마다의 규칙과 법도가 있었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 날 속였던 자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자네와 손을 섞으며 그 얘기를 했었지.”

“예.”

“그러나 당장 지금만 해도 대다수의 흑도인들은 그리 살고 있지 않아. 묵룡부의 힘에 짓눌려 있을 뿐, 이 억제제가 풀어지면 규범도, 법도도 없이 날뛰겠지. 예전과 똑같이.”

“…….”

“그래서 내가 지표가 되고 싶었네. 천하를 일통하는 자의 휘하에 그런 망나니들이 있어선 안 되니까. 기품 있고 품격 넘치게, 흑도만의 방식이 살아 있는 멋들어진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었어.”

“…….”

“그런 꿈을 꾸니, 망나니였던 나도 예전보단 나아지더군. 그래서 거부감을 느끼네. 무림이라는 영역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무림인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에.”

눈을 뜬 연호정이 양천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연호정도 양천의 담담한 표정 속에서, 그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당장 천하를 통치할 만한 계획을 수립해야 할까?”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힘들겠지. 하지만 내 일생의 꿈을 포기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라네.”

“그럴 겁니다.”

“그래서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삼교와의 전쟁에서 살아남게 돼도 제국과 무림이 곧장 하나로 합쳐지진 않을 걸세.”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 오랜 시간 동안, 제국으로 흡수되기 전 마지막 무림의 맹주로서 살아 보는 것도 나름대로 꿈을 이루는 것 아니겠는가?”

연호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많이 소박해지고 모양새도 좀 빠지긴 하지. 하지만 세상이 바뀌는데, 나만 고집부리며 살아간다고 목표를 이룰 수 있겠나.”

“그 말씀은…….”

그제야 양천도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연호정은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양천이 말했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남의 꿈에 살짝 편승해 볼 생각이라네.”

“……!”

“황제에게 백성을 통치할 만한 방법이 있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 두었다면, 그 지식과 경험을 내게 나눠 줄 수도 있지 않겠나?”

“부주님?!”

양천이 다시 눈 쌓인 세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업을 이루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할 사위에게 그 정도는 베풀지 않겠나? 황제의 통이 크다면 말이야.”

“……!!”

“안 가르쳐 주면 늦은 나이에 머리 싸매고 열심히 공부해야겠지. 그래도 모르면, 그때는 장인 멱살을 잡는 수밖에.”

“부주님.”

“생각해 보면 나한테도 엄청난 이득이 아닌가? 육십 먹은 노인네가 이십 년은 더 젊은 여인과 혼사를 치르는데, 이거 완전히 땡잡은 거지.”

웃는 듯 우는 듯, 많은 감정이 느껴지는 얼굴로 연호정이 말했다.

“예, 땡잡으신 겁니다.”

“어떤가? 이 정도면 스승의 자격이 충분한가?”

“아까 전까지만 해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은?”

“차고 넘치십니다.”

“하하하.”

양천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은 그냥 웃음이 아니었다.

탄식이었고, 통한의 눈물이었다. 홀가분함이었고 아쉬움이었으며, 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 미래를 발견한 자의 흥분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보다도 더 큰 좌절이, 그의 웃음에서 숨 쉬고 있었다.

한참을 웃던 양천이 연호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스승의 자격을 보여 주었으니, 제자에게 확답을 받아야겠네.”

“말씀하십시오.”

“나 때문에 손에 많은 피를 묻힌 아이일세.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보기보다 여린 구석이 많은 아이야. 그 녀석 역시 살아남기 위해 애썼을 뿐, 본성은 착한 아이라네.”

“…….”

“내 생각을 말할 때도 그 아이는 아쉬워하지 않았어. 아니, 아쉬워는 했지만 그 너머에서 나와 비슷한 안도를 보았네. 살기 위해, 증명받기 위해 그 자리에 올랐을 뿐, 녀석에게도 부주 자리는 큰 부담이었던 모양이야. 하긴, 스승과 제자는 닮는 법이지.”

“…….”

“잘 챙겨 주라고는 말하지 않겠네. 다만 그 아이가 자네를 죽이려 하지 않는 이상, 자네 역시 그 아이에게 해코지를 해선 아니 되네.”

떨리는 눈으로 양천을 주시하던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스승의 딸은 곧 제 가족이기도 합니다. 저는 혈육을 해할 만큼 잔악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하하하!”

양천이 연호정의 어깨를 잡은 채 몸을 돌려 걸었다.

“술이나 한잔하러 가지.”

“해장술이 되겠군요.”

“어쩐지 눈이 잔뜩 충혈됐더라니.”

“그러게요.”

“오늘은 주사 부려도 잘 받아 줘야 하네.”

“물론입니다. 신공만 끌어 올리지 마십시오.”

“술 취했다고 제자를 죽일 만큼 미치진 않았다네.”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청화공주 그이, 예쁜가?”

“……욕심도 많으십니다.”

“이왕이면 예쁜 게 좋잖나.”

두 사람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나란히 언덕을 걸어 내려갔다.

두 사람이 지나간 눈 덮인 땅에는 뚜렷한 족적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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