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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797화 (797/963)

797화. 흑제(黑帝) (2)

“후우.”

힘껏 철봉을 내지른 막원의 몸에서 자욱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츠츠츠.

흘린 땀이 증발하고, 축축했던 옷이 새것처럼 뽀송뽀송해졌다.

‘이제 구 할 이상이군.’

신화교의 그 망할 독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내공의 상당 부분을 소실한 그였다.

물론 그 정도 고수에게 내공의 소실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몽땅 잃어버렸다면 또 모를까, 일부의 소실이라면 노력에 따라 몇 년에서 수개월 만에 복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막원의 노력은 지독했고, 덕분에 기존 내공의 구 할까지 복원한 상태였다.

‘아쉽구나.’

막원이 입맛을 다셨다.

아직 전부 회복하지 못했지만, 회복한 내공의 질은 이전과 같았다. 그래서 그에 관한 아쉬움은 없었다.

다만 그는 더 높은 깨달음을 얻길 바랐다. 하여 동공(動功)과 좌공(坐功)으로 축기하는 시간 외에는 명상과 무공 수련에 힘을 썼다.

하지만 성장은 없었다. 정확히는, 변화는 있었으나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어쩔 수 없지.’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쉬움이 쌓이고 쌓여 독이 되면, 지니고 있는 것조차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발전하지 못한 현실에 실망하지 않고 초연할 수 있는 것, 그것 역시 고수의 소양이다.

우우우웅!

그의 몸에서 은은한 광채가 피어올랐다.

무문의 심법과 자신의 깨달음을 섞어 만든 일세의 신공, 천무신병기(天武神兵氣)였다. 마치 서슬 퍼런 병장기 날을 보는 듯, 그의 기운은 서늘하면서도 강철처럼 단단했다.

막원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면 와서 인사나 할 것이지, 왜 거기 서서 구경만 하고 있나?”

고개를 돌린 막원의 눈에 연호정이 보였다.

연호정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잘 계셨습니까.”

“하하, 오랜만일세.”

연호정에게 다가간 막원이 반갑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순수한 반가움이 그대로 느껴지는 언행이었다. 나이 차이가 상당했지만, 연호정은 그가 마치 형 같다고 생각했다.

“어째, 나갔던 일은 잘 처리했나?”

“물론입니다. 언제나 걱정해 주시는 덕분입니다.”

“이 사람, 이제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군. 사내는 세상에 나가야 어른이 된다더니, 이전보다 확실히 성장한 것 같으이.”

막원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호탕하게 웃는 그를 보며, 연호정은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다.’

위대한 무인이기 전에, 막원은 사람으로서 출중한 매력을 지닌 이였다.

그 역시 무도(武道)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이다. 더불어 타고난 재능과 끝없는 노력으로 중원 정점에 달한 무력을 손에 넣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연호정의 발전한 무력을 뒷전으로 놓았다.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연호정의 등장 자체가 반가웠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겠지.’

막원은 타인의 성장에 놀라워는 해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의 꿈은 자신의 무도가 성장하는 것이지, 남을 이기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막원의 이 성격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간 수많은 사람의 질투와 부러움, 의심의 눈길을 겪어 온 연호정에게 있어서는 특히나 더 놀라운 성격이라 할 수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멀쩡하다네. 자네와 신의 덕분에 목숨을 건졌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잊으시라 해도 절대 잊지 않으실 것 같으니, 앞으로 제가 술을 청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마셔 주셔야 합니다.”

“으하하하! 그래야지! 어디 술자리뿐인가? 자네가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있다면, 내 열 일 제쳐 놓고 달려갈 걸세.”

“말씀만 들어도 든든합니다.”

“하기야, 앞으로의 삶을 자네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딱히 별일도 없을 걸세.”

연호정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꼭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될 말이지. 사내가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아서야 쓰겠나.”

“선배라면 천하 어디를 가셔도 편하게 사실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대신 천하 어디에서도 마음 편하게는 못 살겠지. 언제나 자네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테니까.”

“컹.”

“다른 걸 떠나서, 나 역시 배울 것이 많네. 무도(武道)가 어디 무공 수련만 한다고 제대로 된 길을 열어 준다던가? 자네와 함께 세상을 배우며 많은 걸 얻어 갈 생각이라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백병신군의 무력을 알고 있는데도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연호정이 처한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뜻이었다.

막원이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그 위험한 상황에서 날 구해 준 것이 자네야. 더 말할 필요 없네. 앞으로 잘 부탁하겠어.”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 연배에 까마득히 어린 후배 뒷바라지해 주시다간 창피한 일도 많이 겪으실 겁니다.”

“나는 주변 평가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야.”

막원이 연호정의 등을 팡팡 쳤다.

“이럴 게 아니라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달리 할 일은 없지?”

“할 일…….”

연호정이 자신이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예, 당분간은 없습니다. 한잔하러 가시지요.”

“하하하, 좋네. 아! 가는 김에 자네 동료들도 부르지 그러나? 자네가 아끼는 사람들이라면 나에게도 동료가 될 텐데.”

“다들 이미 한 번씩 만나 본 사람들 아닙니까. 정식 만남은 다음에 하도록 하고, 오늘은 저랑 찐하게 한잔하시죠.”

“허허허, 그것도 좋지. 가세.”

두 사람은 묵룡부에서 나와 장안의 객잔으로 향했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그건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부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강호 무림인 중 정점에 도달한 두 사람에게 있어 장안의 객잔까지는 잠시 마실 나갈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구만.”

객잔에는 사람이 많았다.

두 사람은 객잔 꼭대기 층 구석에서 술을 마셨다.

“비왕이 광혈교의 주구였다…….”

나직이 말하는 막원의 눈에 분노의 빛이 어렸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중원 사람이 아니었다. 무림인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핏줄을 중요시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삼교가 획책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신화교의 계략으로 죽을 뻔하기까지 했다. 삼교에 대한 인상이 좋을 수가 없었다.

“정말 무시무시하군. 겉으로 보이는 세상 그대로를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는, 그처럼 상상도 못 할 계략들이 판을 치고 있었어.”

잔을 비운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디 삼교뿐이겠습니까. 세상 어디에도 그와 같은 일은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당장 본가에도 멸문한 구주명가의 끄나풀이 버젓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허어.”

“어디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저라고 그런 짓을 평생 안 하고 살 자신은 없습니다.”

툭.

잔을 내려놓은 막원은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말없이 막원의 잔을 채워 주곤 자신의 잔도 채웠다.

“자네.”

“예.”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 겐가?”

“하하, 마음에 걸리는 건 항상 있지요. 원체 벌인 일도 많고 바쁘게 살아 놔서.”

“그렇기야 하겠지만.”

막원이 턱을 쓰다듬었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고민이 늘어난 것 같아서 말이야. 그때도 바쁘게는 살았지만, 그야말로 거침이 없지 않았나.”

그랬던가.

가만히 과거를 떠올려 본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잘 기억은 안 납니다.”

막원이 잔을 들었다.

잔을 부딪친 연호정이 다시 술을 비웠다.

“자네 취했구만?”

“예?”

연호정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얼굴이 뜨뜻했다. 모르긴 몰라도 빨개졌을 것이다.

“벌써 이렇게 됐군요.”

초절정고수만 되어도 들어오는 주기(酒氣)를 순간순간 해독하여 날려 버린다. 그래서 고수일수록 취하기가 어렵다.

정말 취하려면 자신의 내공을 완벽히 제어하여 들어오는 주기를 가만히 내버려 두어야 한다. 실제로 연호정과 막원 둘 다 내공을 제어한 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니까.

그래도 무극을 돌파한 육신은 완벽에 가까운지라, 내공을 제어해도 쉽게 취하지 않는다. 그만큼 연호정이 들이켜는 술은 독했고, 마시는 속도도 빨랐다.

“오랜만에 정신이 멍해지는 이 느낌, 좋습니다.”

“고민이 있긴 있는 모양이야.”

막원이 잔을 비우고 말했다.

“전에 내가 자네를 뭐라고 불렀더라?”

“예?”

“호칭 말이야. 나도 한참 내 몸에 신경 쓰느라 기억이 안 나는데.”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기억이 안 납니다만, 그냥 연 부관이라고 부르지 않았겠습니까?”

“아, 그랬나?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군.”

“예, 그랬지요.”

“이제부터 형이라 부르게.”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막원이 피식 웃었다.

“왜? 싫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싫은 모양이군.”

“절대 아닙니다. 다만 선배님 명성에 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누가 되다니? 자네의 무력은 이미 무신(武神)의 그것인데 어찌 누가 되나? 조만간 자네 명성이 사해오호를 떨칠 걸세.”

이미 패왕이라는 별호로 천하를 들썩이게 하고 있었다. 그간 홀로 수련에 매진하던 막원만 모르고 있었을 뿐.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누가 되고 말고가 어디 있나? 마음 맞으면 친구도 되고, 의형제도 되는 거지. 자네 여자 볼 때 상대방 집안 보고 만나나?”

“하하.”

여전히 순수함이 느껴지는 말에 연호정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야 좋지요. 뒤봐 주는 든든한 형이 생겼으니,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좋지. 인생 처음으로 생긴 강호의 동생에게 한 잔 받아 보겠네.”

“이거, 개족보 만들었다고 나중에 아버지한테 혼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개족보?”

“선배, 아니 형님 명성이라면 그 배분이 무림 최고 수준인데, 그런 양반을 형으로 삼았으니 문제도 이만저만 문제가 아니지요.”

“언제부터 그런 쓸데없는 걸 걱정하고 살았나?”

두 사람이 껄껄껄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쿵!

연호정은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는 쿨쿨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 버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연호정은 언제, 어떤 순간에도 취해서 정신을 잃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긴장감 넘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고,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막원은, 친분은 있어도 자주 만나 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그런 사람 앞에서 대놓고 취해 정신을 잃은 것이다.

쪼르르르.

자신의 빈 잔을 채운 막원이 팔짱을 낀 채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막원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일었다.

“이 녀석아, 젊은 녀석이 무슨 고민이 그렇게나 많은 거냐.”

연호정은 끝까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리고 막원 역시 고민이 뭐냐고 굳이 캐묻지 않았다.

사실 고민도 고민이지만, 그냥 속이 어지러워 보였다. 막원이 보기에는 그러했다.

익숙한 누군가가 아니라, 마음은 통하지만 자주 보지 못했던 사람을 일부러 골랐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아마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서,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풀어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기야, 한시도 쉬지 않고 온 중원을 떠돌아다니며 이 일, 저 일 해치우는데 사람이 안 지치고 배기겠나.”

잔을 비운 막원이 담담하게 혼잣말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혼란스러울 때는 너의 판단을 믿어라. 자신(自信) 없이 뜸 들이는 시간이 길어지다가는…… 나처럼 바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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