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95화 (795/963)

795화. 흑도의 패권 (6)

흑도를 달라.

그야말로 당당하고도 오만하기 그지없는 요구였다.

황당함이 극에 이른 양천은, 또한 생각했다. 이놈처럼 사람 짜릿하게 만드는 놈은 달리 없을 거라고.

후욱.

불꽃처럼 퍼져 나가는 막강한 기파가 어느새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잠잠해지기만 했을 뿐, 기도를 완전히 갈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양천의 기도는 위험천만하게 느껴졌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노려보던 양천이 툭 던지듯 물었다.

“내 제자가 되겠다?”

“그렇소.”

“내 후계자가 되겠다는 말인가?”

“그렇소.”

“하면 후계자인 네가 묵룡부의 다음 부주가 될 터이니 자연스레 흑도 무림을 가지게 된다, 그런 뜻이냐?”

“그렇소.”

담담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양천은 혼란을 느꼈다.

가만히 양천의 얼굴을 살피던 연호정이 묵비에게 말했다.

“네가 어떤 수를 써도 부주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내기 힘들 거다. 떨어져서 운공에 들어가. 내 걱정은 말고.”

묵비는 일말의 멈칫거림 없이 연호정이 시키는 대로 물러나 운공에 들어갔다.

성천의 고수가 강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무극에 이른 고수들의 싸움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진심으로 분노해 발산하는 투왕의 기파는 지금껏 보아 왔던 어떤 고수와도 차원을 달리했다.

연호정의 말이 옳다. 그녀의 실력으로는 양천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극한의 정신력으로 공격까지는 가능하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우웅.

가부좌를 튼 묵비의 몸에서 강력한 내공력이 발산되었다. 잠시지간에 입은 내상이 커서, 그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양천이 차갑게 웃었다.

“너를 신뢰하는구나.”

“누구보다도 서로를 신뢰하오.”

“네놈이 지켜 줄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지?”

“내가 지켜 주지 못하면 어차피 죽을 테니까.”

“말은 청산유수로군. 내 지금 당장 네 녀석이 신뢰하는 저 궁수를 죽이겠다 마음먹으면, 네놈의 반응이 어떨지 아주 궁금하구나.”

날카롭고 독한 말이었다. 지금껏 양천은 연호정에게 이렇게 도발적인 어조로 말한 적이 없었다.

연호정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러지 않을 거잖소?”

“지금은 그렇지. 하지만 내 마음이 언제 바뀔지는 나조차 모른다. 진심으로 분노했거든.”

더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연호정은 그 말에 드리워진 진실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내 제자가 되겠다…… 네놈의 무력은 이미 성천에 도달했어. 네가 내게 배울 것은 없을 것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무공만 배운다고 생각하면 착각이오.”

“말장난하지 말아라. 그따위 궤변이 통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느냐?”

“말장난도, 궤변도 무엇도 아니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당신에게 배울 것이 많소. 무공 이외에도 많은 것이 있지.”

“…….”

“스승 역시 제자에게 배울 수 있는 법. 나 역시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것이 많소.”

“서로에게 이득인 거래다?”

“딱딱하고 냉정하게 분석해 본다면, 맞는 말이오. 하긴, 세상에는 냉담한 사제지간도 많으니까.”

“헛소리. 그것은 허울뿐인 관계에 불과해. 네놈이 원하는 것은 알맹이겠지. 이 흑도 무림이라는 힘 그 자체 말이다.”

“크게 틀리지는 않소.”

“웃기는 놈이구나. 네놈의 그 얄미운 속내를 아는데, 내가 널 후계자로 들일 것 같으냐?”

차갑고도 시큰둥한 양천의 반응에 연호정은 오히려 안심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대화의 의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설득을 해야겠지.”

“설득 따위 필요할까? 차라리 이 자리에서 널 묻어 버리고 연가를 무림의 배신자 가문이라고 천명하면, 천하를 위해서 나쁘지 않은 일 같은데.”

연호정이 진지하게 물었다.

“왜 화를 내는 거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내 말은, 황제의 부마도위가 되는 것보다 내가 황제와 함께 관부와 무림의 경계를 지우고 세상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 그렇소.”

양천의 볼이 꿈틀거렸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배신이라고 한다면, 좋소. 내가 무림 그 자체를 배신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부주께서는 내가 무림을 배반한 것이 더 충격인 것이오? 아니면 추후 흑도의 제왕으로서 무림을 통합하고자 하는 당신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이 더 충격인 것이오?”

“그것을 구분하는 의미가 있느냐?”

“있소. 충분히.”

그 순간 연호정의 눈빛에 떠오른 한심하단 감정에, 양천은 내심 놀랐다.

자신이 이토록 독하게 나간 것은 처음이었지만, 연호정이 제게 이런 눈빛을 보내는 것도 처음이었다. 서로의 감정이 진심이기에 더더욱 충격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터놓고 말해 봅시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 줄 아시오?”

“…….”

“나는 당신이 경우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하!”

“당신에게는 야망이 있소. 백도를 짓누르고 흑도가 우뚝 서기를 바라는 야망이. 더 나아가, 흑도의 군주로서 무림을 통합하여 새 시대의 무림왕(武林王)이 되기를 바라고 있소.”

“…….”

“아니오?”

양천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굳이 부정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니까.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당신은 선을 넘진 않았소. 무림 일통 이전에 너무나도 강력한 힘을 지닌 외세부터 몰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오. 경우 없이 날뛰는 저 무림맹의 모용군과는 다르오.”

“모용군이라.”

“내가 그자는 끊임없이 배척하고 짓누르지만, 당신과는 진심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소. 야망 때문이건 세상을 위해서건, 당신은 무엇이 우선인지를 아는 사람이오.”

이런 상황에서 어울리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양천은 조금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천하를 떠돌며 흑도의 정점에 선 그가 인정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았다. 그 많지 않은 사람 중에서도 자질이 뛰어나 능히 자신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판단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연호정이 바로 그 극소수의 천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천재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 경쟁 관계는 아니지만 내 편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천재의 인정은, 성천의 강자인 그에게도 나름의 감동을 선사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무엇을?”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소?”

양천은 기가 막혔다.

“그것을 어찌 알겠느냐?”

“정확하오.”

“뭐?”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소. 놈들이 우리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한 것과 반대로, 우리는 아직 놈들에 대한 대략적인 파악 자체를 못 했소.”

“……!”

“그럼에도 감히 예상해 보자면, 놈들은 아마도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더 강했으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것이오. 어쩌면 우리의 머리로는 상상도 못 할 술수를 쓰거나, 성천보다 훨씬 강한 괴물이 존재할지도 모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면 성천과 비슷한 수준의 고수를 중원 무림 측보다 배는 더 많이 보유했을 가능성도 있겠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오. 놈들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승패를 가늠하기 힘들다는 사실 자체지.”

“그래서?”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따위로 해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소?”

“뭣이?!”

“무림 일통을 위해 삼교부터 물리쳐야 한다는 사실 이전에, 전쟁 이후에도 당연한 듯 살아남아 천하를 손에 거머쥐어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정상이오?”

“……!!”

양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우우우우웅!!

잠잠하게 가라앉았던 기파가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무극을 돌파한 고수가 마음이 흐트러졌다고 기파까지 이리 요동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만큼 양천이 큰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연호정이 다소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막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오. 놈들과의 전쟁이 어렵다는 것을. 어쩌면…… 묵룡부 자체가 날아갈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당신 자신의 목숨도 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양천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냉정하게 봤을 때, 연호정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연호정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더하여, 하나의 사실에서 절대 눈을 돌리지 마시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당신은 이미 사음교주에게 한 번 패배했소.”

쾅!

양천의 주먹이 땅을 뚫었다.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눈빛. 지금껏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 자신의 입에서는 나와도 남의 입에서는 튀어나와서는 안 될 굴욕적인 과거가 차가운 겨울바람에 묻어 그의 머리를 아프게 찔렀다.

“지금은 당신이 그를 이길 수 있을까? 모르지. 당신은 그때보다 더 강해졌으니까. 문제는 상대 역시 당신만큼의 성장을 이뤘을지 모른다는 것이오.”

“……!”

“새외에는 그런 대적이 무려 셋이나 있소. 그것도 최소로 잡아야 셋이외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전후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나나 당신에게는 사치란 말이오.”

홍수가 마을을 덮치려 하고 있다. 사람은 대자연의 분노 그 자체인 홍수를 막을 수 없다. 다만 대비할 뿐이다.

그 홍수가, 지금 상황에서는 전쟁을 의미했다.

전쟁은 반드시 벌어진다. 홍수는 무조건 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홍수에서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홍수라는 자연 현상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없는 것일까?

“당신은 전쟁에서 이기려 하고 있소. 그래선 안 되오. 전쟁은 현상에 불과하오. 그 현상을 일으키는 놈들을 없애 버려야지.”

“…….”

“문제는 이미 홍수의 위기가 눈앞까지 닥쳐왔다는 것이오. 즉, 전쟁은 막을 수 없소. 그렇다면, 그 원인을 제공한 놈들을 하루빨리 없애 버림으로써 이 전쟁을 최대한 빨리 종결시키는 게 모두에게 중요하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야망을 이루고 싶다면, ‘당신’이 아닌 당신이 속한 ‘흑도’에게 그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 낫소.”

“……!”

“진정 천하일통의 꿈이 있다면, 당신은 그래야만 할 것이오. 적어도 당신 대(代)에 흑도가 무림을 통일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소.”

“…….”

“하지만 생각해 봅시다. 지금 당장 당신의 후계자가 성장하여 전후에 살아남는다 해도, 그 후계자에게 흑도 일통의 과업을 넘길 수 있겠소?”

“물론…….”

“진정 그만한 가능성이 있었다면, 무리해서 흑도의 체제를 뒤엎으려 하지도 않았겠지. 후대에게 맡겨 버리면 속 편할 일이니까.”

양천이 씹어뱉듯 말했다.

“사람의 미래는 모르는 법이다. 부선은 충분한 재능과 능력이 있는 인재니라.”

“맞소. 그래서, 부선보다 가능성이 있고 뛰어난 인재는 세상에 또 없는 것이오?”

“……!!”

“언제고 말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말하겠소. 당신은 완전히 가닥을 잘못 잡고 있소.”

“가닥을 잘못 잡았다?”

“진정 무림을 일통하고 싶었다면, 삼교에 붙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든 후 무림의 통치자로서 허락을 받는 게 더 빨랐소.”

“뭐라?!”

“후대에게 그 과업을 넘길 생각이다? 그럼 부선을 후계자로 삼아서는 안 되었소. 설령 부선에게 그만한 가능성이 있다 쳐도, 묵룡부의 힘을 총동원해 그녀를 숨기고 키워야 했소. ‘전후’의 일통을 바랐다면 그게 훨씬 효율적이오. 그렇지 않고서는 부선의 존재를 아는 모두가 그녀를 공격할 테니까.”

“…….”

“하지만 우리가 승리한 전후에 부선 혼자만 살아 있는 게 아니라면, 부선이 무림 일통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거요. 전후, 군웅할거의 세상을 노리는 이는 묵룡부 하나만이 아니기 때문이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무림 일통을 바란다면, 당신은 완전히 길을 잘못 들었소.”

“…….”

“그렇게 하루하루 쌓아 가며 도달한 지금 이 순간, 묵룡부가 무림을 일통할 가능성은 개천에서 용이 날 확률보다 낮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