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4화. 흑도의 패권 (5)
“묘하군.”
뒷짐을 지고 저 멀리 야산을 바라보는 백서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기분 탓인가? 왠지 바람이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아.”
그 옆에 선 황석태가 백서의 말을 받았다.
“겨울이잖소. 저 윗동네보다는 못하더라도 호남 역시 춥소.”
“…….”
“물론, 평년과 비교해도 유독 추운 것 같기는 하지만.”
백서가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황석태의 얼굴에는 그간 보이지 않았던 여유가 있었다. 손에 쥐고 있는 적룡신창조차도 특유의 날카로움을 저 스스로 갈무리한 듯했다.
“자네, 정말 많이 변했군.”
“그렇소?”
“흑도 무림 최강의 무력 부대라는 용아철기단의 단주 같지가 않아. 마치 무림에서 은퇴하여 지역 무관의 사범으로 들어간 사람 같네.”
황석태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골 무관의 사범이라…… 그것도 나쁘지는 않소이다.”
“정말 많이 변했군. 농담이 안 통하는 사람이었는데.”
“농담이었소? 몰랐는데.”
“…….”
“그러는 백서도 많이 변하셨소. 누군가에게 농담이나 할 사람이 아니었잖소.”
“그렇군.”
백서가 다시 야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하는 주군의 심경에 따라 보여 주는 모습이 달라야 하는 법일세.”
“그렇소?”
“지난 몇 년간, 부주님께서는 많이 부드러워지셨어. 수하로서 주군을 평가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나 자신의 주군을 평가할 수는 있는 법이오.”
“부주님께서 여유를 갖게 되자, 언제나 날 서 있던 나의 분위기도 많이 누그러진 것 같네.”
“나이 들어서 그런 거 아니오?”
“뭐, 그렇기도 하겠지.”
황석태는 괜스레 머쓱해졌다. 농담이라고 던졌는데, 백서는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해선 안 된다.
“부주님께서는 한참 더 달리셔야 해. 그때까지 든든히 받쳐 드리려면, 나 역시 나름의 변화를 꾀해야겠지. 그런 면에 있어서 지금의 변화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
“변화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든 도태되게 마련이오.”
“그런가.”
괜스레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었는지, 황석태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나저나, 근래 십이지신은 다 뭐 하고 있소? 우리 말고 다른 전투 부대들도 잘 안 보이고, 부의 장로들도 간간이 얼굴만 보일 뿐 어디에서 뭘 하는지 도통 모르겠소이다.”
“왜? 그들에게 관심이 가나?”
“관심은 언제나 있었지. 알 필요가 없었을 뿐이오.”
백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의 영역에서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네. 임무가 없을 때의 자네들이 이 널따란 평야를 가로지르며 훈련에 임하듯.”
“다들 잘하고 있다면 되었소.”
“자네의 그 관심은 걱정에서 기인한 것이었군?”
황석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뱉었다.
“삼교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할 목표를 지닌 조직인데, 하루를 물렁하게 넘겨서야 쓰겠소?”
“……!”
백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게.”
“어디 가서 이런 말 함부로 할 정도로 주둥이가 가볍진 않소이다.”
“알지만 조심하라는 뜻일세.”
“알겠소.”
날 선 눈빛을 가라앉힌 백서가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늘이 심상치가 않군. 조만간 눈이 오겠어.”
“그러게 말이오.”
“조만간 철기단에 임무가 떨어질 걸세. 부대 관리 잘해 놓도록…….”
그때였다.
콰릉!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야산 언덕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백서와 황석태의 눈빛이 대번에 바뀌었다.
* * *
“생사결이라…….”
양천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내심 긴장했다.
연호정은 ‘생사결’을 입에 올렸다. 실제로 벌어진다면야 질 리는 없겠지만, 문제는 이놈이 느닷없이 그런 위험천만한 말을 입에 올렸다는 사실 자체에 있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무림인들에겐 하루하루가 생사결과 같은 법이지.”
“그렇지요.”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의 발언이라면 신중해야 할 걸세.”
“일국의 공주와 백년가약을 맺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뭐?”
“부주께서 공주와 혼인을 하면 어떻겠냐는 말입니다.”
“……?!”
양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호정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황제 폐하의 부마도위가 되시는 건 어떠냐는 겁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놀라움으로 물들었던 양천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다.
“황제의 부마라고?”
“그렇습니다.”
“황제의 딸과 혼인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나?”
“그렇습니다. 아니, 조금 다르군요.”
“……?”
“반드시 하셔야 할 겁니다. 그 외의 선택지는 없습니다.”
순간 양천의 손이 평평한 바위 밑을 잡았다.
훅! 콰아앙!
제법 널따란 바위가 옆으로 굴러가며 자욱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 위에 놓인 술병과 음식은 사방으로 날아갔다. 마치 밥상을 엎듯, 한 손으로 바위를 날려 버린 양천의 힘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번쩍!
양천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까드드드득!
어느새 세 발 뒤로 물러난 묵비가 활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번개처럼 빠른 동작, 그 화살촉은 양천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화아아아아악!
홍련궁을 쥔 묵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고, 오금이 저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래야만 할 거라고?”
묵비와 달리 연호정은 담담했다.
“그렇습니다.”
“그 외의 선택지는 없다?”
“물론 거부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혼사를 거부하시면,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책임질 수 없습니다.”
쿠구구구궁! 쿠구구궁!!
두 사람 주변의 땅이 마구 깨지며 박살 나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분노한 양천이 발산하는 기파는 순식간에 야산 전체를 진동케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초절정고수인 묵비조차 그 기파에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었다. 내공이 미친 듯이 들끓고, 정신이 어지러워 시위를 당기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였다.
후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사색의 기운이 일었다.
진짜로 분노한 양천의 기파는 연호정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었다. 사신기 모두를 극도로 뽑아 올리고 광명신단을 최고속으로 회전시키고 있는데도 뼈가 저린 기분이었다.
‘역시.’
연호정은 생각했다.
‘그때와 전혀 달라.’
흑제성주가 되기 전, 혈룡맥으로 유인한 뒤 격살했던 당시의 양천과는 수준이 다른 무공이었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고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양천 역시 이전에는 보여 주지 못했던 막강한 힘을 손에 넣었다.
‘오십 합…… 아니, 이 환경이라면 칠십 합까지는 어떻게든 되겠지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변수 따위 통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정면 승부로는 승산이 아예 없어.’
싸움이란 붙어 보기 전까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것, 그래도 그 가능성이 한없이 무(無)에 가깝다면 결국 승산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터다.
‘무섭군.’
양천은 진심으로 분노했고, 그 분노를 연료 삼아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살기는 천지가 개벽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감당이 안 되겠는데.’
마군과 싸웠을 때도 패배를 직감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참을 싸우고 난 후에 내린 판단이었다.
양천은 다르다.
흔히들 한 수 차이를 논하지만, 이 정도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애초에 한 수가 아니라 몇 수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싸워 보지 않아도 패배를 직감하게 되는 상대.
환경조차 불리하고 변수가 통할 것 같지도 않은 상대 앞에서 전투를 준비해야 하는 것은, 평생을 아수라장에서 보낸 연호정에게도 유쾌한 일이 못 되었다.
‘게다가 흔들림이 없어.’
연호정은 그 폭발적인 기파를 발산하면서도 냉정하게 가라앉은 양천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극도로 화가 났지만, 그 분노에 이성이 잡아먹히지는 않았다. 감정적인 나와 이성적인 나를 철저히 분리했다.
이 정도로 크게 화를 내면서도 두 눈 가득 냉정함을 드리울 수 있는 자는 온 천하를 통틀어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도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만큼 막강한 무공을 손에 넣은 절대강자라면 더더욱.
그렇기 때문에 양천이 대단한 것이다.
양천이 연호정의 냉정함에 경탄을 마지않았다면, 연호정 역시 위정자로서의 양천이 보여 주는 이성에 긴장을 금치 못했다.
“네놈, 황궁에서 무슨 일을 획책한 것이더냐?”
말투가 바뀌었다.
이성은 명백했지만, 분노 역시 명백하다. 말투와 목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연호정이 솔직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와 대화를 나누었소.”
그의 말투도 어느새 달라져 버렸다.
“많은 대화를 나누며, 이 세상은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소.”
“……?!”
“통일.”
순간 양천의 기세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연호정은 놓치지 않았다.
“관무불침조약이라는, 대다수의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말도 안 될 정도로 위태로운 그 조약을 뭉개 버려야 한다고 판단했소.”
“뭐라?!”
“세상을 하나로 만드는 것. 천하통일(天下統一). 나는 그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오.”
“설마 황제의 편이 된 것이냐?”
황제의 편.
꽤 유치하고도 자극적인 단어였다. 연호정과 황제의 사이는 단순히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굳이 황제와의 관계를, 천자와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소.”
“이놈!!”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연호정의 몸이 오 장이나 뒤로 밀려 나갔다.
‘이런.’
주르륵.
연호정의 코와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양손으로 일권을 막았는데도 내상을 입었다.
그것도 단 한 방에!
‘빌어먹을, 이럴 줄은 알았지만 진짜 괴물이 따로 없네.’
연호정이 힐끔 묵비를 보았다.
묵비는 부들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시위를 당기고 있었지만, 양천을 향했던 화살 끝은 자꾸만 비틀거렸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자세를 유지 중인 것이다.
연호정의 발이 땅을 찍었다.
콰앙!
쏟아져 들어오는 양천의 기세를 막고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하는 사신의 기운이 연호정과 묵비를 감쌌다.
묵비의 몸에 떨림이 줄어들었다. 살짝 불안정해졌던 연호정의 기파도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황제와 나누었던 그 많은 얘기를 일일이 하기에는 자리가 좋지 못하오. 물론 따로 할 필요도 없지만.”
“자리? 그 어떤 자리든, 네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굳이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니겠지.”
콰득! 콰득!
땅 곳곳이 퍽퍽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갔다.
뿜어내는 기가 무지막지한 압력을 가한다. 오랜 세월 이 땅을 지켰던 야산이 한 무신(武神)의 자비 없는 폭력에 울부짖고 있었다.
양천의 시퍼런 안광은 분노와 살기를 넘어 광기마저 담고 있었다.
“무림인인 네놈이, 무림을 배신하고 황제의 앞잡이가 되어 통일을 논해?”
“배신이라…….”
“하면 그것이 배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손등으로 코와 입가에 흐른 피를 닦은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좋은 수완과 정치력으로 흑도를 하나로 합친 일대 종사에게도 못난 구석은 있는 법.”
“뭐라!”
“그렇게 실체 없는 허상의 규율에 사로잡힌 바보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당신이 얼마나 강하든, 또는 얼마나 많은 지지 세력을 가졌든 천하통일은 불가능하오.”
순간 양천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손해만 될 제안을 들고 찾아온 것이 아니오.”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당신과 나, 모두에게 좋을 만한 다짐이라는 무기도 하나 들고 왔다는 거지.”
연호정은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아버지와 동생의 얼굴이, 그간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백도 정파 무림인들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천이 소리쳤다.
“알아먹지 못할 소리 집어치우고 똑바로 얘기……!”
“당신의 제자가 되겠소.”
“……뭐?”
“당신의 후계자가 되겠소.”
연호정이 손을 내밀었다.
“내게 흑도를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