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1화. 흑도의 패권 (2)
“출궁했나?”
“그렇습니다, 폐하.”
연위를 보던 황제가 탁자에 놓인 병을 들어 올렸다.
찰랑거리는 액체 소리가 무척이나 맑게 들렸다.
“한잔 받게.”
연위가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올렸다.
쪼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맑은 액체가 잔을 채웠다.
황제가 말했다.
“산동분주 중에서도 아끼던 놈이야. 그 맛과 향이 일품이지. 마셔 본 적 있나?”
“예전에 한 번 마셔 본 적이 있습니다.”
“입에 맞던가?”
“소인이 마시기에는 너무 과분한 술이었습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운 황제가 잔을 들었다.
“자네도 들지.”
“황송하옵니다.”
두 사람이 잔을 비웠다.
이곳은 어전이 아니라 연위의 거처였다. 야심한 시각, 황제는 또다시 최소 인원만 대동한 채 연위의 거처로 찾아온 것이다.
“술에 질려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애초에 그리 자주 마시지도 않겠지.”
“그렇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질려 버렸다네. 술은 마물이야. 과음하면 이지를 상실하게 되고 속이 나빠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만 되면 또 술을 찾게 되네. 그 중독성이 실로 대단해.”
짐이 아니라 나다. 연위와 독대를 하며, 황제는 천자로서의 무게를 반쯤 내려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러 번 질렸다네. 이유를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함께 취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세.”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야 취할 맛도 나는 것. 가면을 쓴 채 아양이나 떠는 후궁들의 취기는 진실된 것이 아니었다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망가져도 황제는 황제, 눈 밖에 나면 목숨이 위험하거늘 한 말 술을 마신다 한들 취하겠는가.”
“…….”
“자네가 어전의 문을 베고 들어온 이후 신화교의 무리를 모조리 척살하고 이곳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을 때, 나는 다짐했다네. 마음이 맞는 사람과의 자리가 아니면, 다시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기로.”
마음이 맞는 사람으로서 함께하자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연위가 고개를 숙였다.
“황송하옵니다.”
“부담된다면 언제든 말하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진심이야.”
연위는 말없이 황제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천천히 잔을 채우는 술을 보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의아하지 않았나?”
“예?”
“제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지만, 그래도 일개 무부에 불과한 자신을 왜 이리 신경 써 주는가…… 궁금하진 않았나?”
솔직히 연위는 궁금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궁금함을 그대로 표현했다.
“소인보다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많습니다. 폐하께서 소인을 소중히 여겨 주시는 것은 다시 없을 영광이나, 제게서 무엇을 보셨는지 궁금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황제가 빙긋 웃었다.
“지금 자네의 모습 때문에 그러하네.”
“예?”
“궁금한 것은 궁금하다고 말하는 솔직함, 올바르지 않은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배짱.”
“…….”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네.”
연위의 얼굴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소인은 그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게. 나 역시 그러고 있으니.”
“…….”
잔을 비운 황제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린 황궁. 건물 곳곳에 달아 놓은 화사한 등이 무척 아름다웠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양천과의 혼사를.”
“솔직히…….”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그렇습니다.”
“허허, 자네 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을 터인데?”
연위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도 보셨다시피, 제 아들놈에게는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없지.”
“그러나 대국을 보는 안목과 지략,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은 아비를 아득히 능가하고 있습니다.”
“호오.”
“뛰어난 자식입니다만, 언제나 걱정이 많았지요. 소인과는 너무나도 다르기에 강호로 보낼 때마다 밤잠을 설쳤습니다.”
“그랬겠군.”
“하나, 이제는 아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능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쉽지 않았을 터인데.”
“부끄럽게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저 믿어 주면 그뿐인데, 그 단순한 것을 못 해 그리도 속을 썩였습니다.”
연위가 멋쩍은 듯 웃었다.
“물론 걱정을 아예 내려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워낙 성격이 그래 놔서 말입니다.”
“……그렇구먼.”
“그래서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제게는 말하지 않은 노림수가 더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제 머리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질 않습니다.”
황제의 눈이 빛났다.
“달리 노림수가 있을 것이다?”
“제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참 똑똑한 아이입니다. 하나의 일을 처리할 때도 이중, 삼중의 이득을 얻어 내기 위해 다방면으로 접근하곤 합니다. 이번에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또 흥미로운 내용이로군. 다방면이라…….”
“양천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아들놈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당대 무림에서 양천과 가장 많이 부딪쳐 본 사람이 호정입니다. 하물며 이번에는 더더욱 신중하게 처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마도 좋아할 것 같군.”
“예?”
황제가 피식 웃으며 잔을 채웠다.
“양천 말일세. 무림의 절대자라면, 자네 아들을 보고 둘 중 하나를 택할 것 같네. 내치든지, 자기 것으로 삼든지.”
“…….”
“양천 정도 되는 위인이 자네 아들을 내치지 않았다면, 그만큼 아낀다는 뜻이겠지.”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흑도로 올 생각이 없냐며 많이 유혹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나라도 그러겠네. 실제로 나 역시 그랬지 않았나.”
“허허.”
연위는 그저 웃고 말았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의자에 등을 묻은 황제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양천…… 양천이라…….”
연위가 조심스레 물었다.
“달리 걸리는 거라도 있으신지요?”
“걸린다기보다는…….”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자네의 말을 듣고 하나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말일세.”
“예?”
“양천의 안목도 무시는 못 할 걸세. 당연하지. 무력도 대단하거니와, 그 사나운 흑도 무림인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뛰어난 수완과 안목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야.”
“소인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자네 아들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을 게야.”
“…….”
황제의 눈이 깊어졌다.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려 들진 않겠지.”
“……?”
연위는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자신이 알아서 좋을 것 같지도 않았고, 말하지 않는 것을 애써 캐내어 물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말했다.
“만약에 말일세.”
“예, 폐하.”
“정말 만약에, 자네 아들이 흑도 사람이 된다면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그 스스로가 당당하다면, 다 큰 아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습니까.”
“허어…….”
“소인은 아들을 믿습니다. 만약 호정이 스스로 흑도를 천명한다면, 분명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혀를 내둘렀다.
“그야말로 절대적인 믿음이로고.”
“녀석은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스스로의 인생을 증명했습니다. 그럼에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제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자네 가문이 돌팔매질을 받게 되면 어쩌려고?”
“그때는 폐하께서 지켜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라? 허허허허!”
황제는 크게 웃었다.
“사람은 달라도 결국 그 혈관에 도는 피는 똑같구먼. 어쩜 아들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그렇습니까.”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던 황제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흑도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별이 무척이나 많았다.
황제의 눈에 의미심장한 빛이 깃들었다.
‘그 녀석이 정말 내 생각대로 밀어붙인다면…… 상황이 제법 재밌었지겠군.’
* * *
황궁에서 출발한 일행은 사흘 만에 하남에 이르렀다.
“눈이군.”
떠나올 때쯤 슬슬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하남에 다다르니 눈발이 더 굵어졌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는 날씨였다. 본래라면 진즉 눈이 왔어야 했는데, 이번 해는 유독 늦은 듯했다.
“후우.”
가볍게 부는 입바람에 연초를 피우는 것처럼 김이 나왔다.
강량이 말했다.
“오늘 안에 저 언덕을 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내일이면 넘어가기가 힘들 것 같은데요.”
일행 중 무공의 경지가 가장 낮은 강량조차도 초절정고수였다. 눈 쌓인 언덕을 넘어가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다만, 굳이 힘을 더 들여 가면서 길을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하자.”
파아앙!
적당히 달리던 일행이 신법의 속도를 올렸다.
선두에 선 연호정의 뒷모습을 보며, 진양이 중얼거렸다.
“거 참 신기한 신법일세.”
천종운행비.
연가의 절정신법으로, 대나무처럼 꼿꼿한 군자의 자태가 묻어 나오는 신법이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새삼 연호정의 신법이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성격을 떠나, 워낙 역동적인 무공의 소유자라서 신법도 화려할 줄로만 알았다.
‘그러고 보니.’
묵비와 강량 역시 신법이 대단했다.
궁사인 묵비에게 있어 신법은 최고로 중요한 무공이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사격을 가해야 하는 그녀의 신법은, 무극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연호정의 그것과 차이가 없었다.
강량 역시 마찬가지. 흑도 최고의 명문이라는 귀철검문의 귀영신보는 패도적인 검법과 어우러져 절대적인 살법을 탄생시킨다. 흑도에서 귀영신보에 비견할 만한 경신술은 많지 않다.
‘흐음.’
진양이 세 사람의 경신술에 유독 신경을 쓰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무공 때문이었다.
그의 경신술도 남들보다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다. 불곰이라고까지 불리지만, 그 커다란 덩치로도 어지간한 여인들보다도 유연하게 움직이는 게 그였다.
하지만…….
“날이 너무 어두워졌군. 이만 쉬는 게 좋겠다.”
언덕을 넘자마자 연호정은 쌓인 눈을 치우고 나뭇가지를 꺾었다.
푸스스스.
습기를 머금은 나뭇가지에 열을 가해 건조시킨 후, 곧장 모닥불을 피우는 묵비의 실력은 대단했다.
그 익숙함도 익숙함이지만, 내공 조절 능력이 보는 이의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능수능란했다. 초절정고수인 진양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순식간에 뜨끈한 모닥불 두 개를 만든 묵비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왜?”
“에? 아, 아뇨.”
묵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문제라도 있어?”
진양이 입맛을 다셨다.
“다들 실력이 좋구나, 싶어서 말이오.”
강량이 피식 웃었다.
“진 형 실력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잖아? 나보다 강하면서 그게 무슨 소리야?”
그간 붙어 다니면서 두 사람은 제법 친해진 상태였다.
진양이 고개를 저었다.
“죽자고 붙으면 내가 위일지 모르겠지만, 뭔가 탄탄한 기반은 없어 봬서 말이야.”
“호오?”
“노력해야겠구나, 싶어.”
그간 보여 준 모습답지 않게 진지하고 진솔한 발언이었다. 묵비조차도 새삼스럽다는 듯 진양을 바라보았다.
그때,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부족한 걸 좀 채워 볼까?”
“……잉? 지금 말이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실력 늘면 좋잖아? 왜? 피곤한가?”
“어…… 그, 그런 건 아니지만.”
“대비도 좀 해 둬야지 않겠냐? 이번 묵룡부행은 이전과 달라. 만약 양 부주가 우리를 죽일 생각이면, 적어도 살아서 도망은 쳐야지. 안 그래?”
진양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연호정이 손목을 천천히 돌렸다. 우두둑 하는 소리가 무척 살벌하게 들렸다.
“시간 난 김에 네 무공의 밑바닥까지 뜯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