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9화. 대국의 선(線) (5)
황제와의 면담을 끝낸 연호정은 연위를 찾아갔다.
그 방에는 연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제갈아연을 필두로 묵비, 강량, 진양, 기우희는 물론 팽무강과 가득상까지 있었다. 화진천은 황궁 일대 주변 정리 때문에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었구나.”
“예, 그렇습니다.”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눈빛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와 닮았다.
“후회하지 않느냐?”
“한번 결정했으면, 이 결정이 옳은 선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맞는 말이다만, 삼교를 향한 너의 증오를 모르지 않는다. 많이 내려놓았다고는 하나 네 일생의 목표가 삼교의 붕괴라는 것은 분명하다.”
“맞습니다.”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꿈, 그 꿈을 이뤄 드리기 위해서는 한 번씩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할 게다.”
“감수할 것입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더하여, 저의 목표는 황제 폐하께서 목표로 하시는 길의 길목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해 나가면 될 겁니다.”
“그도 그렇다만…….”
연위가 툭 던지듯 물었다.
“이제 삼교가 일 순위가 아니게 되어 버렸잖느냐?”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천하를 하나로 만든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연호정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천하를 하나로 만들려면 삼교가 사라져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폐하께도 받아들이셨습니다. 폐하께서 목표로 하는 길에 삼교가 함께 있다면, 저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
“삼교를 무너트리는 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새로운 시대는 그 뒤에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구나.”
“그리고…….”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삼교를 증오하지만, 이제 이 증오는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너만의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삼교의 광신도들 때문에 피를 흘린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또한 천하에 삼교의 존재가 알려진 이상, 많은 사람이 그들을 경계할 것입니다.”
“…….”
“적의 격멸을 반드시 제 손으로만 이룰 필요는 없겠지요. 이왕이면 내 손으로 끝장내는 게 좋겠지만, 결과가 같다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 종말을 맞이하든 저는 상관이 없습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적을 증오하고, 적을 섬멸할 것이다. 아들은 그처럼 흉흉한 말을 하고 있었다. 아비로서 속없이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위는 기꺼웠다.
어차피 같은 결과라면, 더 이상 증오에 몸을 던져 나 자신을 불태울 필요는 없다. 아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역시 크게 성장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연위가 아들에게 바랐던 모습이었다.
연호정은 연지평과 다르다. 나아가 자신과도, 역대 연가의 사람들과도 완전히 달랐다.
다른 성향, 다른 성격, 다른 삶의 가치를 지닌 혈육에게 군자가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들에게는 아들만의 철학과 더 나은 삶을 이루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지금 보여 주는 이 모습, 비록 증오라는 서글픈 감정이지만 그것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이 모습만으로도 연위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본가 최초로 무극을 열었다는 사실보다, 너의 마음과 사상이 조금씩이나마 올바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 훨씬 더 기쁘구나.”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올바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길이든 피는 흐릅니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시대와 상황이 달라. 네가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만으로도 너의 생은 가치가 있다.”
“감사합니다.”
연위가 탄식을 토했다.
“관무불침이라…… 그 부분에 관해서는 폐하와도 대담을 나누었지만, 나 역시 한 번도 그것을 어색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팽무강이 불쑥 끼어들었다.
“당연하오. 관무불침조약은 수백 년 전에 체결되었소. 우리는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거요. 신경 쓰지 못할 만도 하지.”
“그렇소. 그러나 또한, 우리는 성현들의 말씀을 읽고 역사를 배웠소. 그랬다면 관무불침이라는 조항 자체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과도 같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소.”
“그것도 그렇지. 뭐, 어쩔 수 없잖소. 이미 지나가 버린 일, 이제부터라도 좋은 세상을 위해 힘써야겠지.”
연위가 팽무강을 바라보았다.
팽무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달리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오?”
“괜찮으시겠소?”
“무엇이 말이오?”
“하북의 팽가는 강호육가 중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는 명문가외다.”
“뭐, 그렇지?”
“만약 황제 폐하의 꿈이 실현된다면, 무림이라는 영역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소이다.”
“아하?”
팽무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연가주 말씀은, 수백 년 동안 무림의 명문가로서 나름의 위세를 떨쳤던 본가가, 무림이 사라지고 중원 전체가 제국령으로 선포되면 그간의 지위를 잃게 될 텐데 괜찮겠느냐, 이 뜻이오?”
연위의 표정이 조금 어색해졌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외다.”
역시 연위는 돌려 말할 줄을 몰랐다.
팽무강이 껄껄껄 웃었다.
“명문(名門)의 법도는 지닌 역사와 가치에서 나오는 것이오. 수천 리 대지를 소유하고 산처럼 쌓아 둔 보화가 있다 한들, 대대로 내려온 정신과 무학의 가치에 비할 수 있겠소?”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팽무강이 입맛을 다셨다.
“연가주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지 않소. 사람은 자신이 누렸던 것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 그것이 어떤 숭고한 이유에서든 불만을 품게 되기 마련이오.”
“그렇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의 조정이 필요할 것이오. 제국과 무림 양측 다 합의 사항이 필요할 것이고, 알맞은 정책으로 서서히 하나가 되는 방법도 많겠지.”
팽무강이 연호정을 보며 말했다.
“질서와 법도가 살아 숨 쉬는 하나 된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뭐가 어찌 되었든 무림의 도움이 필요하다. 힘으로 무림을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폐하께서는 지혜로우신 분, 무리한 정책으로 봉합이 안 되는 일을 밀어붙이시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실 거라 믿습니다. 가주님 말씀대로, 폐하께서는 수십 년을 인내하고 사셨음에도 결코 급하게 가시는 법이 없습니다. 서로가 수용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의 손해를 요구하진 않으실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다만, 실제로 그러한 정책이 진행되기 전까지 속단은 금물이야. 지금은 그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 이 정도로 알아 두면 괜찮을 듯싶네.”
담백한 정리였다.
확실히 팽무강은 육가의 가주 그릇으로 손색이 없었다. 연위 말마따나 세상이 격변하면 가진 자는 불안해할 수밖에 없을 텐데도, 명가(名家)가 지닌 가치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그는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다.
“사실 진짜 문제는 명문이니 세력이니 하는 게 아니야.”
팽무강의 얼굴에 진지함이 어렸다.
“자네, 괜찮겠나?”
짧은 한마디에 엄청나게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은 지쳐 보이는 미소였다.
“괜찮게끔 만들어야지요.”
“당장 묵룡부주와 황실의 혼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가 알려진다면, 많은 사람이 자네를 비난할 걸세. 그리고…….”
팽무강이 연위를 힐끔거렸다.
“연가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어.”
연위가 넉살 좋게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그런 순간이 오면 도와주시오.”
“헛! 도움이야 당연히 드리지. 다만 버티는 당사자들이 힘에 겨울까, 그게 걱정이오.”
그때, 연호정이 끼어들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허? 그런가?”
“예. 제대로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팽무강이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했겠나.”
내내 가만히 대화를 듣던 가득상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정 문제가 되면 저희 개방도 연가를 도와줄 겁니다.”
“얼씨구.”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보다 훨씬 더 무지막지한 뒷배가 있지 않습니까?”
“응?”
“황제 폐하 말입니다.”
“……아?”
가득상이 떨떠름한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이 양반이 어떤 양반인데 든든한 뒷배도 없이 돕겠다, 말겠다 했겠습니까. 아닌 말로 연가가 무림에서 버티지 못하면, 그대로 황궁 쪽에 붙어 버리면 그만인데요.”
표현이 좀 그렇지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흑도 무림이라면 모르되, 백도 무림은 절대 황궁을 무시할 수 없다. 만약 황제에게 힘이 없다 한들, 무림맹에 행차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모든 정파 무림인들이 발 벗고 튀어나와 절부터 올릴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명분을 중시하고 도덕과 협을 숭앙하는 백도 무림의 한계였다.
“팽가주님 말씀대로 당장 이렇다 저렇다 할 문제는 아니니, 일단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중요한 것은 양 부주겠지.”
연위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어쩔 셈이냐? 네 성격에 모르는 체할 수는 없을 텐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양 부주의 성격을 볼 때, 오히려 모르는 체하고 있는 걸 더 싫어할 겁니다.”
“으음.”
“그리고 양 부주에게도 거절할 자유가 있습니다.”
“응?”
“우리끼리 얘기했을 뿐, 아직 양 부주의 의사는 묻지 않았잖습니까? 만약 양 부주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팽무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절……이라……?!”
황제 폐하께서 직접 제안하는 혼사였다. 애초에 팽무강은 그것을 거절한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
연위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그래,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엄청나게 커지겠지요.”
“허!”
“이미 한 번 폐하의 제안을 거절한 무림인이 있습니다. 바로 접니다. 거기에 대안이라고 소개한 무림인마저 이 혼사를 거절하게 되면, 폐하께서도 무림을 웃으며 보지 못하실 겁니다.”
“이건 완전히 외통수가 아니냐?”
“외통수지요.”
연호정이 눈이 서늘해졌다.
“그 외통수라는 결과를 갖고 찾아갈 겁니다. 자칫하면 양 부주는 백도 무림과 황궁, 양측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방 안에 있는 모두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황도 상황이지만, 이처럼 위험천만한 도박을 진행하겠다며 스스럼없이 나서는 연호정의 배포에 질려 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못 말리겠다는 듯 가득상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대수가 되든 무극의 고수가 되든, 저 무지막지한 과격함은 도통 바뀌질 않는구만.”
진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더 막 나가는 인간이라는 건 알겠구먼.”
제갈아연도 한마디를 보탰다.
“정보가 샐 것 같지는 않지만, 이왕이면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연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늘 당장 묵룡부로 떠날 것입니다. 떠날 준비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일어서자 묵비와 강량, 진양과 기우희가 따라 일어났다.
연위가 담담히 말했다.
“서둘러 준비하고 돌아오너라. 따로 할 얘기가 있다.”
“알겠습니다.”
하나의 일이 해결되니, 또 다른 일이 닥쳐온다.
다시 바쁜 나날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