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7화. 대국의 선(線) (3)
다음 날.
“오셨는가?”
“예.”
연호정을 위아래로 훑어본 화진천이 피식 웃었다.
“귀군과 싸우지는 않은 모양이구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 양반과 뭐 하러 싸우겠습니까. 이제 싸울 일 없습니다.”
“그래, 다행일세.”
그때, 저 멀리서 묵비가 다가왔다.
“연 공자.”
“잘 쉬고 있었냐.”
묵비가 투덜거렸다.
“쉬긴 뭘 쉬어요. 대민 지원 갔다가 어제야 겨우 끝났어요.”
“엥? 대민 지원?”
화진천이 말했다.
“황궁 전투로 피해를 본 것은 우리만이 아니야. 이곳과 가까운 도시에도 피해가 갔어.”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간에도 피해가 갔다고요?”
“정확히는, 전투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아니었다네. 다만 황실로 오던 상단 일행이 이곳 전투로 인해 진입을 못 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상단원들이 술에 취해 꽤 큰 난동을 부린 모양이야.”
“엥?”
“황실과 가까운 관부의 힘은 무척이나 강하지. 문제는 그 상단이 관부와도 연을 맺고 있었다는 것이고, 관부 측 인사가 상단원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을 오히려 잡아들였다네.”
“…….”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들고일어났어. 어지간하면 그러기도 힘들 텐데, 황실 분위기가 워낙 안 좋으니 도시의 민심도 떨어질 대로 떨어져 버렸지. 거의 민중 봉기에 가까운 사태가 터졌어.”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화진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실에 대한 믿음이 워낙 없었던 게지. 이유인즉, 이쪽 관부도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백성들의 삶이 몹시 피폐해졌어. 황실은 나서지 않았지. 쌓일 대로 쌓인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한 셈일세.”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네. 수많은 민가와 건물들이 무너졌어. 그때, 팽가주가 나섰네. 팽가에서 차출된 무사들이 싸움을 말리고 중재에 나섰지.”
“그걸로 끝입니까?”
“제아무리 하북팽가라도 관부 사람을 어찌할 순 없어. 심지어 황실이 코앞이잖은가? 하여 도시를 지키는 선에서 끝냈네. 일단은 그렇지.”
“중신들에게…….”
“…….”
“아니군요. 이쪽에 하소연해 봤자 다 거기서 거기겠지요.”
“그렇다네.”
“황제 폐하께 직접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화진천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준다면 고맙지. 백성들도 안심할 걸세.”
연호정은 착잡함을 느꼈다.
문득 곡경의 말이 떠올랐다.
‘피를 흘린 것은 오직 제국이다. 제국만이 피를 흘렸어. 제국 그 자체인 황제 폐하께서 피를 토하셨고, 제국의 구성원인 백성들이 죽어 나갔다.’
‘그래, 그 뭣 같은 관무불침 때문이지. 그러나 조금만 떨어져서 세상을 보면, 지금 중원 천하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형태인지를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힘을 잃은 황실. 썩어 버린 관부.
그들을 대신하여 정파의 명문들이 치안을 관리했지만, 정작 부패한 관부 사람들을 제대로 처벌할 수도 없다. 무림인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천하의 하북팽가조차도 그러한데 다른 문파들은 어떻겠는가?
‘중앙 정부에서 멀어지면 관부도 힘이 약해진다.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는 충분히 부패한 관인들을 제거할 수 있겠지만…….’
그리되면 제국법을 무시하는 무림 문파가 득세하여 타락할 위험이 커진다.
연호정은 내심 무척 놀랐다. 세상이 어지럽다는 것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막상 세밀하게 들여다보니 곡경 말마따나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안일했어.’
죽인다고 끝이 아니다.
외세의 침공에 맞서 적을 죽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어떤 조직에 속한 이를 죽인다는 것은, 그 조직 전체를 상대로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그 상대가 관부라면, 누구라도 손을 쓰기가 힘들 것이다.
‘나 역시 단순히 삼교를 없애 버릴 생각을 했을 뿐, 그 이상은 염두에 두질 않았다.’
차이는 있었다.
연호정은 삼교로 인해 내 사람들이 죽어 나갈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한번 겪어 본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많은 전우를 잃어 보기까지 했다. 그래서 삼교를 증오하는 것이고, 그들의 뿌리를 뽑으려는 것이다.
연호정의 대의(大意)는 딱 거기까지였다. 죄 없는 백성이 죽는 것을 좌시하지는 않겠지만, 그 이상은 바라보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런 그에게 있어 곡경의 말은, 그리고 방금 들은 민중 봉기 사태는 꽤 강한 충격을 주었다.
“해서, 예까지 오신 것은 어제 뇌옥에서의 일을 듣고 싶어서인가?”
“동시에 다른 부탁도 하나 할 겸 해서 왔습니다.”
“좋지.”
“놈이 뭐라고 했습니까?”
화진천의 표정이 단번에 우울해졌다.
“대답을 들을 수 없었네.”
“예?”
“말 그대로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어. 놈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네.”
연호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혹, 뇌옥의 간수들이 그를 고문하기라도 한 것입니까?”
“그런 게 아니야. 말 그대로 정신을 놨네. 멍하니 허공만 주시하고 있는데, 넋이 완전히 나가 버렸더군.”
“……?!”
“술법으로 우리를 속이는 건가 싶어서 직접 맥을 짚어 확인까지 해 봤네.”
“어땠습니까? 놈의 몸 상태는.”
화진천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상단전이 반쯤 뭉개져 있었네.”
“……!!”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일 정도야. 아니, 곧 죽을 것일세. 그 상태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테니. 하물며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신다더군. 며칠 내로 숨이 끊어질 것일세.”
“자살입니까?”
“모르겠네.”
“허어…….”
“하나 확실한 것은, 통천에 대해서는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지. 이쪽 일이 끝나는 대로 무당에 찾아가 볼 생각일세.”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도사라고는 하지만 기실 그는 도사라기보다 술사에 가깝다. 술사의 정신은 어지간한 무림인보다 훨씬 더 강력하여, 자살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누군가의 술책인가?’
그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저도 한번 찾아가 보겠습니다.”
“보려면 빨리 가는 게 좋을 걸세.”
“알겠습니다.”
“그래, 이 얘기는 이쯤하고. 내게 부탁할 것은 무엇인가?”
연호정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황실에 대한 정보도 취급합니까?”
“물론일세. 우리 앞마당만큼은 아니지만, 부패한 관리들의 입을 통해 쌓아 둔 정보가 상당하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해서 원하는 것은?”
“황제 폐하의 자식들에 대한 신상 명세, 그 모든 것을 원합니다.”
화진천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 * *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연호정은 바쁘게 지냈다. 뇌옥으로 가서 통천진인의 제자 상태를 확인해 보고, 혹시나 해서 혈옥마군도 살폈다.
황제에게 인근 도시에서 벌어졌던 일을 알려 주었으며, 연위의 몸 상태를 끌어올리기 위해 도움을 주기도 했다.
밤에는 그간 이런저런 일로 보지 못했던 강량과 진양에게 대무를 통해 무공을 가르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연호정이 한동안 찾아오지 않았음에도 전혀 서운한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묵비는 한 번 더 대민 지원을 나갔고, 강량과 진양 역시 낮에는 도시로 가서 팽가 사람들과 함께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기우희가 보이지 않았던 것도 도시에서 사람들을 치료했기 때문이었다. 느닷없이 하북까지 따라와 버렸지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분명하게 알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할 일을 한다.
무림인이지만, 그 강력한 힘으로 싸우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범부가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힘은 백성에게 위협이 됨과 동시에 그들의 일생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들 모두가 천하에 다가가고 있었다.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쌓은 공부를 세상을 위해 쓴다. 그 자체가 천하로 향하는 또 하나의 길인 것이다.
그리고 엿새.
연호정은 황제를 찾아갔다.
“편히 고개를 들라.”
“감사합니다.”
연호정은 이전처럼 용상의 십 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황제가 웃으며 연호정을 내려다보았다.
“그간 아주 바쁘게 지냈다고 들었다.”
“소인보다 바쁘고 힘든 사람이 많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강인하면서도 짐을 무안하게 만드는 말투, 언제 들어도 신선하군.”
“그렇습니까.”
“짐도 이런저런 일 때문에 그대와의 대담을 오래 이어 갈 수 없음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게.”
“알겠습니다.”
연호정이 허리를 폈다.
“청화공주(靑花公主)가 아직 혼인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황제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청화공주 말인가?”
“그렇습니다.”
“과한 연상이 취향인가?”
청화공주는 황제의 여섯 번째 딸로, 그 나이가 이미 마흔에 이르렀다.
통상 공주의 직위를 가졌다면 십육 세, 늦어도 이십 세 안쪽에서 혼사를 치르게 된다. 예외의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바로 청화공주였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소인은 강호의 무부로 살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흐음.”
대놓고 거절이었지만, 황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청화…… 청화라…….”
연호정은 살짝 놀랐다. 턱을 쓰다듬는 황제의 얼굴에 난색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알고 있는가? 혼기가 지났음에도 가정을 이루지 못한 황제의 자식들은 모두 궁에서 쫓겨난다는 것을.”
“예, 알고 있습니다.”
“황태자로 책봉된 차기 황제의 권력을 탐하지 못하도록 쫓아내는 것이지. 냉혹하지만 필요한 법도일세.”
“예.”
“청화 역시 그렇다네. 여인은 황제가 될 수 없다지만, 그럼에도 궁 밖으로 보내는 것은 형평성 때문인 동시에 아주 약간의 위협이라도 줄이고자 함이야.”
“…….”
“제국 역사상 궁 밖으로 쫓겨난 자식들은 거의 없었네. 청화는 그중 하나지.”
“알고 있습니다.”
“청화가 태어나자마자 많은 관리들이 그 아이를 탐냈다네. 당연하지. 황실과 사돈 관계가 될 수 있으니까. 대놓고 말을 못 할 뿐.”
“…….”
“하나 청화가 커 가면서 그 아이를 원하는 집안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 아이가 열일곱이 되던 해에 모든 명가가 관심을 끊었지.”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성격 때문이군요.”
“성격, 나아가 성향 때문이지. 청화는 어릴 적부터 무(武)에 관심이 많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대들의 세상을 무척이나 동경했더랬지.”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헛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황당한 노릇이지. 황실의 일원, 심지어 천자를 아비로 둔 녀석이 그런 환상을 가질 줄은 몰랐다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어. 청화는 천성적으로 직설적이고 과격했으며, 사내가 아님에도 무(武)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네.”
“…….”
“청화는 지금도 혼자야. 지금도 경치 좋은 곳을 거처 삼아 하루하루 무에 열중하고 있다네. 그리고 지금, 어느덧 불혹(不惑)을 앞두고 있네. 그 연배가 황후와 비슷해.”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황제의 눈이 빛났다.
“한데 느닷없이 청화를 궁금해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짐의 부마가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 말이야.”
“부족한 소인이 황실의 일원이 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황제 폐하께서 만족해하실 만한 혼처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대만 한 사람이 또 있는가?”
“저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지요.”
“호오?”
황제의 얼굴에 은근한 흥미가 일었다.
“그게 누구인가?”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묵룡부주, 세간에서 투왕이라 불리는 흑도 무림의 총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