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6화. 대국의 선(線) (2)
곡경과의 만남 후, 다시 내성으로 돌아오는 연호정의 얼굴은 꽤 진지했다.
그때였다.
“연호정 대협.”
연호정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인마.”
제갈아연이 깔깔대며 다가왔다.
“어디 다녀왔어?”
“곡경 선배랑 대화 좀 하느라.”
“……싸운 건 아니지?”
“우리끼리 작정하고 싸웠으면 외성 일대가 반파되었을 거다.”
“하긴.”
성천, 아니 무극을 연 고수들의 진짜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신(神)과 같은 무력끼리 충돌하면 일대가 초토화된다.
나아가 그 정도 기파의 충돌과 경력이 휘몰아쳤다면, 근방의 초고수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제갈아연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알고 있어? 연 가주님께서 깨어나셨어!”
“뭐?”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아버지가?”
“응. 아까 깨셨는데, 폐하께서 직접 가주님을 뵈러 가셨지.”
놀라움의 중첩이었다.
“폐하께서 직접 가셨다고?”
“놀랍지? 모두가 놀랐다니까. 워낙 의지가 확고하셔서 아무도 막지 못했어.”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그 정도인가.’
아버지를 향한 황제의 호의가 실로 심상치 않다.
물론 그 자체가 영광이요, 기쁨이지만…….
“왜 그래?”
“응?”
“어째 좋아하는 기색이 아닌데? 뭐 문제라도 있어?”
“아니, 문제는 무슨.”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제갈아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사 때문에 그래?”
연호정은 깜짝 놀랐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모를 수가 없지. 이미 그 얘기가 관리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졌던데. 그리고 나는 관리들하고 친해.”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망할 문관 놈들, 주둥이가 가벼워도 너무 가볍군.”
“헉! 야! 아무리 그래도 궁내에서 그런 발언은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혓바닥을 놀리니 황제 폐하께서도 기가 막히실 만하지. 그 발언 자체가 자신들의 목을 조를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일개 무림인과 천자의 자식이 혼인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악스러운 일이야. 한데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소문이 떠돈다는 것, 황제 폐하 입장에서도 좋게 볼 수가 없지. 모르긴 몰라도 근시일 내로 중신들이 숙청당하기 시작할 거다.”
심지어 중신들에 대한 황제의 감정도 지극히 나빴다. 어차피 물갈이를 결심했을 테지만, 그 시간은 훨씬 앞당겨질 것이다.
“음,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네.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이 숙청되면 국정이 마비될 텐데.”
“이미 마비가 되다 못해 썩어 가고 있어. 폐하께선 오히려 환부를 도려낼 시간이 앞당겨졌다며 좋아하실 거다.”
“그, 그런가?”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응?”
“그 정도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잖아? 오히려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텐데 뭘 놀라고 있어?”
“내가 좀 똑똑하긴 하지만 완벽하진 않아. 맨날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고 엄청 지쳤다고.”
“그러냐.”
연호정은 무척이나 심드렁한 기색이었다.
제갈아연이 재차 물었다.
“근데 표정을 보니, 어째 이 혼사가 달갑지 않은 모양이네?”
“전에 말하지 않았냐? 아버지 왈, 혼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맞다. 우리 가문 가풍이야.”
“가풍까지야…… 여하간,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의 딸이잖아? 공주라고. 그래도 싫은 거야?”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상황이 싫은 거지. 그리고 알잖아? 내 인생이 어떤지. 나 같은 놈은 평생 혼자인 게 나아. 안사람 고생만 시킬 상이라고.”
제갈아연이 피식 웃었다.
“하긴, 어떤 여자가 너 같은 남자랑 살면서 행복해하겠냐?”
장난 가득한 일격이었지만, 연호정은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았다.
“맞는 말이야. 그래서 소가주도 지평이 맡았으면 좋겠어.”
“뭐?”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세상에 지평만큼 자기 여자한테 잘할 놈이 어디 있겠냐? 좀 답답한 구석은 있어도 올바르고, 사리에 밝고, 자상하고, 심지어 배경도 나쁘지 않잖아?”
이런 팔불출을 봤나.
헛웃음을 짓던 제갈아연은, 문득 연호정의 말이 그리 과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맞는 말 아닌가?’
연지평 성격 좋은 건 누구나 안다.
하물며 강호육가의 일익인 벽산연가의 직계에, 재능도 출중하다. 그렇다고 인물이 못났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누구라도 호감을 느낄 만한 사람이었다. 아마 천하에 방문을 돌리면 연지평과 혼인하겠다고 할 여인들이 수백 리에 걸쳐 줄을 설 것이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직접 제안하셨다면 그건 제안이 아니라 황명에 가까울 텐데, 그걸 어떻게 거부하려고?”
“이해시켜야지. 그리고 내가 황제 폐하의 부마가 되면 무림이 흔들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연호정은 곡경과 나누었던 대화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제갈아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능성이 있는 얘기야.”
“가능성? 이미 무림의 무수히 많은 사람이 날 노리고 있을 거다. 무력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우니 온갖 공작을 벌이려 들걸?”
“그걸 준비만 하는 것과 진짜로 실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준비를 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야. 그래,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어쨌든 공주와 혼인하면 안 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그래서, 어떻게 거부하게?”
“폐하께서도 그리 강하게 요구하신 건 아니었어.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안 하겠다고 하면 이 혼사는 무산될 거야. 방법을 찾고 말고는 없어.”
“그럼 왜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
연호정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연호정의 얼굴은 꽤 심란해 보였다.
말과 표정만 보면 절대 공주와 결혼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했다. 한데 무엇이 저리 고민스러운 걸까?
‘폐하께서 연가를 나쁘게 볼까 봐 무서운 것일까?’
연호정의 얼굴을 살피던 제갈아연은 문득, 왠지 체기가 있는 것처럼 더부룩했던 속이 꽤 시원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호오…….’
제갈아연이 입을 벌렸다.
“꺼악!”
“억!”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뭔 짓이야, 더럽게.”
제갈아연이 배를 통통 두들겼다.
“어제 먹은 게 영 소화가 안 된다 싶더니,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서 말이야.”
“적당히 좀 처먹어라, 적당히 좀!”
“시끄러!”
투덜대던 제갈아연이 연호정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 때렸다.
“마, 그럼 뭐가 문제야? 거절하면 될걸.”
“거절은 기정사실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견적이 안 나와.”
“그러니까! 또 고민할 거리가 있냐는 거지. 아주 얼굴만 보면 세상 불행이란 불행은 다 안고 사는 것 같다.”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난 거절하는 게 좋지만, 이 혼사 자체가 나쁜 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뭐?”
“아깝잖아? 이대로 묻어 두기에는.”
“뭐가? 설마 황실과 무림의……?”
“그래.”
제갈아연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설마 지평을?”
“조금 전에 말한 우리 집 가풍은 그새 잊었냐?”
“아, 맞다.”
“제갈세가 사람 맞아? 주워 온 자식 아니야, 이거?”
“야! 너 그 말 실례야!”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됐다. 일단 아버지나 뵈러 가야겠어.”
제갈아연이 히죽 웃었다.
“폐하와 독대 중이시라니까? 그새 까먹었어? 너도 꽤 멍청한데?”
“폐하의 기(氣)가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어. 대담은 끝났다.”
“어?”
“바보 주제에 무공도 약한 놈이 어디서 배를 내밀어.”
“이 자식아!”
피식 웃은 연호정이 연위의 거처 쪽으로 향했다.
연호정을 따라 걷는 제갈아연은 끝까지 투덜댔다.
* * *
“아버지.”
“왔느냐.”
그 말 이후로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말없이 서로를 보는 두 사람. 그 부드럽고도 묵직한 분위기에 제갈아연도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많이 성장했구나.”
“아버지 덕분입니다.”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존재 자체가 힘이 됩니다.”
짤막한 말이지만, 연위는 가슴이 찡한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네가 본가 역사에 획을 그었다. 내 알기로, 가문에 무극을 열어 무신(武神)의 경지에 도달한 분은 아무도 없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선조들의 대를 이은 가르침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익힌 무공은 다르지만 너 역시 본가의 무공을 배운 이다. 그것을 결코 잊지 말거라. 너의 재능과 경험이 어떠했든, 지금의 네가 이 자리에 서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함을 안고 살아가거라. 그러나 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너의 주관대로 일생을 잘 살다 가면, 그것이 곧 선조들에 대한 보은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소가주 자리는 지평에게 넘기겠다.”
느닷없는, 그러면서도 엄청난 충격을 선사하는 발언이었다.
제갈아연은 깜짝 놀라 연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연위는 담담한 기색이었다. 연호정의 눈은 놀라움으로 물들었지만, 또한 그리 크게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네가 장자로서 가문을 이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실력도 그러하거니와, 이와 같은 난세에는 지평보다 네가 더 가주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내 자식이지만, 너는 이미 아비를 넘어 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천하 곳곳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 강인하고 힘찬 붓놀림을 꺾는 것은 너무나도 아까운 일이다.”
“…….”
“가문이 힘이 되어 주진 못할망정 억센 울타리로 너의 삶을 제한시킬 수는 없다. 힘이 없다면 또 모르되, 너 하나 놓아준다고 무너질 만큼 만만한 가문이 아니니 너는 아무 걱정 말고 힘차게 날아오르거라.”
“아버지.”
연위가 웃으며 농을 던졌다.
“설마하니 사랑스러운 동생에게 밀렸다고 질투하는 것은 아니지?”
연호정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후, 그가 천천히 절을 올렸다.
“못난 아들 때문에 너무 욕을 보셨습니다.”
“이놈아, 누가 쫓아낸다더냐? 혹여라도 본가가 위험해지면 한달음에 달려와야 한다. 출가(出家)해도 좋다고 했지, 연을 끊으라고 한 적 없다.”
“물론입니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연위가 웃으며 연호정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아들의 어깨를 매만지는 연위의 얼굴에 뿌듯함이 어렸다.
“잘 컸다. 세상 어떤 자식이 있어 너에 비할 수 있겠느냐. 지평은 아직 부족한 게 많으니, 바쁜 일이 지나면 네가 잘 챙겨 줘야 할 것이다.”
“꼭, 꼭 그러겠습니다.”
“그래야지.”
이제야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신 것 같아, 연호정은 고마움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의 바람을 꺾고 자식이 원하는 길을 지지해 주기까지 큰 고민을 했을 아버지께, 깊은 죄송함을 느꼈다.
“폐하께서 용정을 하사해 주셨다. 들어가서 한잔하도록 하자. 내 직접 차를 끓여 주마.”
“알겠습니다.”
연위가 제갈아연을 보며 말했다.
“아연이도 와서 한잔하자꾸나.”
“네? 아, 네!”
잠시 후, 연위의 방 안에 고운 다향이 퍼졌다.
“아버지.”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말하마.”
“예.”
“폐하께서 심상치 않은 말씀을 하고 가셨다.”
“…….”
“혼사를 하지 않을 생각이냐?”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되었다.”
제갈아연은 숨도 못 쉴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실과 사돈이 될 기회를 잃었는데도 아쉬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게 가장 궁금했다. 너의 마음 말이다. 왠지 그럴 것 같았지만, 역시 거부하였구나.”
“절 이해해 줄 여자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골치다. 바쁜 일 지나가면 그 성질머리 좀 죽이고 살거라.”
“노력하겠습니다.”
“해서, 할 말이 따로 있느냐?”
“고민이 있어서 말입니다.”
“무슨 고민?”
“저는 안 하는 게 낫지만, 황실과 무림의 혼사 자체는 대단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아쉽습니다.”
“그래서?”
연호정의 얼굴에 은근한 혼란이 깃들었다.
“좋은 생각이 있긴 한데, 이래도 괜찮을지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판단은 섰겠지. 좋은 결과가 나오는 쪽으로. 다만 망설이는 이유는 대상 때문이겠지.”
“…….”
“누굴 생각하느냐?”
연호정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