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4화. 제국의 피 (9)
순간 곡경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늘 이놈과 대화하면서 절대 당황하지 않겠다고, 절대 화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연호정이라는 놈은 무공을 떠나 성격 자체가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저런 말을 대놓고 할 줄은 몰랐다. 스스로가 이룬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너무 재수가 없지 않나?
그러나 연호정은 진지했다.
“나는 보통 놈이 아닙니다. 세상이 볼 때 그렇지요.”
“뭐?”
“어째 이런 자리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가감 없이 말해 봅시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이룬 것이 천하에 다시 없는 위대함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룬 위치에 대한 자부심은 있지만, 누구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세상은 나를 다르게 보지요.”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검선 노선배도, 황제 폐하께서도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이룬 위치를 정확하게 보라고. 처음에는 그것을 과한 겸양은 때로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 정도로만 생각했었습니다.”
“…….”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이 내게 하신 말씀의 의미는.”
곡경의 눈이 번뜩였다.
다시 뜨인 연호정의 눈은 어딘지 모를 착잡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세상이 나를 제멋대로 봐도 나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 속에 사는 사람에게, 나아가 세상과 함께 무언가를 해 보려는 사람에게 있어 세상의 시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겠지.”
“나는 충분히 잘나 보일 겁니다. 백도 정파에서 손에 꼽히는 명문가 출신 장남에, 이립이 되기 전에 강호 최고수라는 성천십삼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또한 무림맹 최강의 유군 부대의 수장이자 맹부(盟府) 동맹의 책임자로서 정사(正邪) 양측의 최중요 인물 중 하나로 급부상했지요.”
“…….”
“중원에 침투한 삼교의 광신도들을 누구보다도 많이 격파했으며, 심지어 황궁 전투에도 참여해 공(功)을 세웠습니다. 물론 나보다 더 큰 공을 세운 사람도 많지만, 그중 한 분이 내 아버지이기까지 합니다.”
“…….”
“거기에 황제 폐하의 부마(駙馬)가 된다? 이 천하가 나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희대의 천재, 시대의 영웅, 고금에 손꼽히는 기린아…… 그렇게만 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겠지.”
“겉으로는 그렇게 평해 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속내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권력에 눈이 먼 자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세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권력에 욕심이 없어도, 그저 뛰어난 누군가를 질시하는 마음에 살의마저 품는 이들도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이가 된다는 것은, 곧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자리에 앉는다는 뜻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어찌하여 수십 년간 스스로를 내려놓고 사셨는지 직접 보셨으니 알 겁니다.”
곡경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놈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 자리에 도달해 보지도 않고 걱정부터 하는 것은 옳다고 볼 수 없다.”
“…….”
“불알 달고 태어난 놈이라면, 모든 걸 감당하겠다는 배포 정도는 보여 줘야지.”
“무슨 말인지 압니다.”
“아는 놈이 그따위 허약한 말을 하고 있어?”
“천하제일인이 되고자 했다면, 천하제일의 권력자가 되고 싶었다면 이런 고민 따위 안 했을 겁니다. 혼자 삼교와 싸워 이길 수 있었다면 고민할 가치조차 없지요.”
“…….”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그 작업은, 어쩌면 삼교와 싸우는 것만큼이나 힘들 겁니다.”
“권력욕에 찌들어 뭐가 중요한지 모르는 놈들은 미리미리 죽여 놓으면 되잖느냐.”
누가 사파 출신 고수 아니랄까 봐 살벌한 말을 잘도 하는 그였다.
놀랍게도 연호정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생각도 안 해 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서야 하나가 되기는 글렀지요.”
“왜지?”
“권력욕에 찌든 이들이 힘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지요. 권력에 욕심을 내는 이들은 이미 충분한 힘을 지닌 자들입니다.”
“……!”
“힘이 없는 자가 원하는 것은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힘을 가진 자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그저 더 큰 힘을 원할 뿐입니다.”
“…….”
“권력욕에 찌든 놈들을 다 잡아 죽이면 무림맹과 묵룡부가 붕괴될 겁니다.”
“빌어먹을 일이로군.”
“당장 묵룡부주를 볼까요? 그는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전쟁은 외세와의 싸움에서 끝나지 않아요. 그는 삼교와의 전쟁 이후, 백도 정파를 집어삼키기 위한 준비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
“제가 그를 그나마 혐오하지 않는 것은, 적어도 그가 훗날의 힘 싸움을 위해 눈앞의 전쟁을 소홀히 할 만큼의 바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정말 흔치 않습니다.”
곡경의 볼이 살짝 떨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시겠습니까? 나는 이미 천하에서 가장 크고 날카로운 송곳입니다. 질긴 주머니 몇 개는 뚫어 놓은 상태지요. 거기에 우리 집안이 황제 폐하와 사돈 관계를 맺으면, 매우 높은 확률로 무림이 붕괴할 겁니다.”
첨예한 권력 다툼의 쓴맛을 보지 못한 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힘과 명성을 좇느라 벌어지는 갈등과 암투를 몸으로 겪어 보지 못한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연호정의 고민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곡경은 연호정의 말에 설득되는 자신을 느꼈다. 그 역시 황궁 관리들의 치졸한 작태들을 신물이 나도록 봐 왔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벌써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나와 본가를 음해하기 위한 밑 준비들이 말이지요.”
“……설마 그러려고.”
“설마 싶은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곳이 세상입니다. 개중 정치판은 최악 중의 최악이지요.”
“…….”
“그래도 세운 공(功)이 있고 나와 아버지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많아, 당장은 대놓고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겁니다.”
“……전부 잡아먹으면?”
“예?”
독한 술로 식도를 불태운 곡경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너와 네 가문이, 백도 정파 자체를 아예 집어삼켜 버리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불가능할 것도 없지. 피를 볼 각오가 되어 있다면.”
연호정의 눈이 서늘해졌다.
“가능 여부를 떠나 본말전도입니다.”
“내가 볼 때, 너는 아직 네가 이룬 위치를 정확하게 모르는 것 같다.”
“……?”
“네 말마따나 너와 연가를 음해하기 위해 준비하는 놈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손가락만 빨게 될 거다. 네가 공주와 혼인하게 된다면 말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황제 폐하를 장인으로 둔 너를 무너트리는 것은 황실의 위엄을 무너트린다는 것과 같고, 너를 공격하는 것은 황실을 공격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
“나는 황실과 연이 있는 무림인일 뿐입니다.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무림인으로서 죽는다면 황궁은 나서지 못합니다.”
“관무불침조약 때문에?”
“관무불침조약 때문에.”
“상관없다.”
“예?”
“나는 황제 폐하의 사람이지 관부 사람이 아니야.”
“……!!”
“네가 폐하의 부마가 되면, 그때부터 나도 널 무시할 수 없다. 네가 잘못되는 즉시 폐하께서는 나를 무림으로 파견하겠지.”
“더 어지러워질 것 같습니다만.”
“그걸 사전에 알려 줘야지. 널 건드리면 황궁은 못 움직여도, 대문파급 전력을 지닌 고수 한 명이 미쳐 날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물끄러미 곡경을 보던 연호정도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술은 여전히 독했다.
“고민은 해 보겠지만, 높은 확률로 이 혼사는 무산될 겁니다.”
“고민해 보겠다? 글쎄, 이미 정해 놓은 답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인다만.”
“정해 놓은 답은 있지만, 더 깊게 고민해 볼 겁니다.”
“알고 있느냐? 네놈은 정말 이상한 놈이라는 거.”
“그렇습니까.”
“그 과격한 성격을 보면 앞뒤 안 가리고 세상을 불태울 것 같은데, 또 이런 부분에서는 신중하구먼.”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요.”
“무슨 피?”
“제국이, 무림이 흘린 피가 너무 많았습니다. 신중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곡경이 툭 던지듯 말했다.
“아직 답을 주지 않았지?”
“예?”
“내가 너를 왜 이리 주시하는지, 왜 이리 집착하는지 말이다.”
“그렇군요. 말해 주십시오.”
“황제 폐하께서 너를 주시하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너에게서 가능성을 봤어.”
“무슨 가능성 말씀이십니까?”
“진짜 제국을 만들 수 있는 교두보로서의 가능성.”
“……?!”
“관무불침조약 같은,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조약 따위 없애 버리고 이 중원 천하를 완전한 제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야.”
연호정이 눈을 부릅떴다.
반면 곡경의 눈은 가늘어졌다. 그 작게 뜨인 두 눈에서 강렬한 위엄이 새어 나왔다.
“너는 말했다. 제국과 무림이 피를 흘렸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제국과 무림을 나눠서 생각해 보면, 무림은 결국 무림이다. 대륙에 사는 무수히 많은 백성은 무림인들이 아니다. 그들 모두 제국의 신민들이다.”
“……!”
“낭만과 풍류 가득한 무림의 이면에는 언제나 원초적인 싸움과 흐르는 피가 있지. 무림은 원래 그랬어. 무림 역시 제국의 일부이지만, 너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럴 만도 하지. 먼저 관무불침조약을 내건 것은 황실이었고, 그것은 분명한 구분을 뜻하니까.”
“…….”
“피를 흘린 것은 오직 제국이다. 제국만이 피를 흘렸어. 제국 그 자체인 황제 폐하께서 피를 토하셨고, 제국의 구성원인 백성들이 죽어 나갔다.”
곡경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본 적 없느냐? 제국과 무림을 서로 다르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를? 결국 다 같은 제국의 구성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관무불침…….”
“그래, 그 뭣 같은 관무불침 때문이지. 그러나 조금만 떨어져서 세상을 보면, 지금 중원 천하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형태인지를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
“누가 먼저 그 조약을 걸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이제 와서는 그 의도도 상기해 볼 필요가 없다.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이 순간과 미래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곡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셨지? 연가를 시작으로 천하 귀족의 판도를 바꾸시겠다고.”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차기 천하제일인이 될 확률이 높은 너를 휘하에 두고 무림을 좌우하려 할 거라고 생각했느냐?”
“…….”
“폐하께서는 그렇게 쩨쩨하신 분이 아니야. 폐하께서 지니신 이상은 그 정도로 만만한 게 아니다. 너는 폐하를 무수히 많은 권력자들과 비슷하게 보았을 뿐, 그분께서 인내하신 세월 속에 흐른 피와 원통함은 보지 못했어.”
“그렇다면……?”
“폐하께서 너를 부마로 삼고자 하시는 것은 세상을 다시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다.”
“……!!”
“온전한 제국. 법과 제도를 무시한 채 신념만 갖고 날뛰는 짐승들을 진정시킨 후, 하나의 거대한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시는 원대한 계획이 그분의 심장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야.”
“그건…….”
“그 꿈의 이름을 사람들은 무엇이라 부르는 줄 아느냐?”
사라라라락.
불어오는 한풍이 헐벗은 나뭇가지들을 희롱했다.
“천하(天下)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