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80화 (780/963)

780화. 제국의 피 (5)

파격적이다 못해 불가해한 제안이었다.

천하의 연호정조차도 황제가 이렇게까지 무리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눈치가 좋다고 한들 상대 역시 수십 년을 인내하며 세상을 바꿀 기회를 노리던 거물이었고, 결정적으로 황궁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미비했다.

말없이 황제를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국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풍전등화와도 같은 상황입니다.”

“알지.”

“그럴 때일수록 궁의 중추들은 하나로 뭉쳐 단단히 집결하고, 세상과 힘을 합쳐 난국을 타개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원론적이지만, 맞는 말이네.”

“이 나라에는 여러 귀족이 있습니다. 예전만큼의 위세는 없다 하나, 그들과 힘을 합쳐 황실부터 하나로 만드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천자의 부탁 아닌 부탁을 거절한 시점에서, 이미 연호정은 죽을죄를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엎드린 관리들은 연호정의 말에 또 한 번 침을 삼켰다. 그의 말이 자신들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대는 정녕 그리 생각하시는가?”

“그렇습니다.”

황제가 관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백관들은 퇴전하여 어도에서 대기토록 하라.”

“어명을 받듭니다!”

관리들이 조심스레 일어나 어전을 나섰다.

그들이 나가자 황보적과 병사들도 함께 어전을 떠났다.

이제 어전에는 황제와 연호정 둘만이 남았다.

스르륵.

고운 비단이 무언가를 스치는 소리.

거대한 그림자가 연호정의 시야를 어둡게 만들었다. 황제가 용상에서 일어난 것이다.

스륵. 스륵.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오는 황제.

고개를 숙인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흐트러지지 않았다.’

걸음 소리만으로도 그 사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비단 연호정만이 아니라 어지간한 고수라면 갖추고 있는 소양에 가까웠다.

‘몸이 망가지지 않았어.’

수십 년을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다고 들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오랜 시간 주색을 탐하다 보면 건강을 잃을 수밖에 없다. 아니, 천하의 고수도 수련을 놓고 그리 살면 병을 앓는다.

하지만 황제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고수처럼 깊지는 않았으나 호흡이 퍽 안정적이고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펑퍼짐한 어의를 입었지만, 체형도 망가지지 않았다.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아하니 내공심법을 익힌 것도 아닌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고개를 들라.”

허리를 편 연호정이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

천자(天子)와 무신(武神)의 눈이 사람과 사람으로서 얽힌다.

용상에 드리워진 음영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연호정 역시 용상에 앉은 황제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내공을 집중하면 보였겠지만, 굳이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 연호정은 마침내 황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젊다.’

낮고 위엄 가득한 목소리에서 나이를 직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얼굴만 보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유 있게 보면 사십 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실제 황제의 나이는 육십이 넘었다고 들었다. 한데도 이와 같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공을 익힌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도 무척이나 젊고 건강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은 사자의 그것처럼 용맹하고 또렷했다. 콧대는 오뚝하게 솟았고 입술은 적당히 두꺼웠으며, 얼굴에 주름은 있었지만 잡티는 없었다.

놀랍도록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위압감 넘치는 외모는 아니지만 고귀함과 당당함이 느껴지는, 실로 황제다운 외모라고 할 수 있겠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보다 이리 가까이서 보는 것이 더 선명하다.”

무엇이 선명하다는 것일까?

“체구가 무척 좋구나. 크고 웅대한 무장의 골격은 아니지만, 단단하기가 바위와 같다.”

“…….”

연호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웃으며 연호정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뒷짐을 지고 조충이 엎드렸던 자리로 걸어갔다.

스르륵.

바닥을 쓰는 어의의 소리가 무척이나 서늘하게 들렸다.

‘놀랍군.’

연호정은 내심 황제의 배포에 놀랐다.

조충의 자리에 선 황제는 연호정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여기서 연호정이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황제의 등을 찌를 수도 있다. 물론 뒤를 돌아서든 말든 똑같겠지만, 사람의 심리상 등을 보이는 것 자체가 자신감의 발로요, 신뢰의 증명이었다.

황제가 조충의 자리에서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전만은 못하다 하나, 조충의 가문은 수 세대에 걸쳐 삼공(三公)을 몇 차례나 배출해 낸 명문가였지.”

“…….”

“조충만이 아니야. 저곳에 앉아 있던 호유정, 그 옆의 진궁, 그리고 세 번째 줄 중앙의 허병까지, 저마다 그 지역의 세도가로서 가히 왕과 같은 위세를 떨쳤더랬지.”

“…….”

“한데 지금은 어떠한가? 그 후예들인 저들의 모습이.”

연호정은 솔직하게 답했다.

“별 볼 일 없어 보였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 볼 일 없지. 사실 그보다 더 나쁘다네. 명문가의 자식이라 배운 건 많지만, 그것을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만 사용하고 선대가 쌓아 둔 재물을 흥청망청 소비한 것도 모자라, 금고가 비면 알량한 권력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더 큰 금고를 채우는 놈들일세.”

“…….”

“배고픈 도둑은 옷과 음식을 훔치고 도망치지. 그러나 이놈들은 나라의 곳간도 모자라 백성들의 피고름마저 짜내고 있네. 세상에서 가장 나쁘고 간이 큰 도둑놈들이야.”

연호정은 황제의 목소리에 서린 분노를 느끼곤 놀랐다.

왠지 황제라면, 언제나 나른하고 위엄 넘치는 목소리만 들려줄 줄 알았다.

지금의 황제는 천자가 아닌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으로서 화를 내고 있었다.

“저놈들을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놔둔 것은 전적으로 짐의 책임이야.”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위정자에게 불가항력 따위는 없네.”

“…….”

“홍수로 백성의 터전과 목숨이 쓸려 간 것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숲이 타 버린 것도, 외세의 침공에 대비하지 못해 나라를 망친 것도 전부 짐의 탓이야.”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리, 그래서 저 자리는 무거운 것이라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저 비슷한 말을 전에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종남 장문인.’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다. 넌지시 찾아온 삼장로와 대화를 나눌 때, 종남 장문인이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한 것이 얼핏 기억났다.

“어디 황좌만 그러할 것인가. 가문, 학당, 군대, 무림의 문파에 이르기까지 수장이란 다 똑같은 것이야. 함부로 올라설 수 없고, 함부로 올라서도 안 되며, 함부로 벗어날 수도 없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수십 년을 인내해 오신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 시간 동안 고통 가득한 삶을 산 백성들의 울분은 누가 풀어 줄 것인가?”

황제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루가 일 년 같았네. 이 길이 진정 옳은 길인가, 차라리 악도들과 싸우다 시해당한 젊은 황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낫지 않은가, 황제로서 죽으면 충의와 협의에 불타는 누군가가 나서서 이 나라를 제대로 만져 줄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나 나는 깨달았네. 뒤를 책임질 자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나 편하자고 죽는 것은 일국의 황제답지 못한 짓임을.”

어려우면서도 간단한 얘기였다.

기실, 상황이 이렇게 된 가장 크고 일차적인 원인은 삼교에 있었다. 욕을 해야 한다면 그놈들에게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황제 역시 비난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죽어도 욕을 먹고, 인내하고 참아 내도 욕을 먹는다.

그것이 수장, 위정자가 가지는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그 오랜 시간을 절치부심하며, 나는 다짐했다네.”

“…….”

“때가 오면 반드시 세상을 뒤집어엎겠노라고. 그리고 생각했지. 세상을 엎기 위해서는 황궁부터 뜯어고치는 것이 맞노라고.”

황제가 연호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귀족과 함께 똘똘 뭉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던가.”

“그랬습니다.”

“내가 보는 이 세상에, 귀족 따위는 없네.”

짐이 아니라 ‘나’다.

무시무시한 원한과 책임감이 공존하는 말, 황제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운명과 세상의 혼탁함을 증오하기에 나올 수 있는 발언이었다.

“예법, 관례, 상식. 하나같이 사람의 눈을 흐리는 사이한 단어들일 뿐이야. 분명 그런 것들이 필요한 때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지.”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 파괴의 시작을, 소인으로 하실 생각이신지요?”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하지만, 나는 자네보다 자네 아비 된 사람을 믿지.”

연호정의 얼굴에 격동이 어렸다.

사람됨이 어떻든 황제는 황제다. 이토록 위대한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버지를 이리도 높게 평가해 주고 있었다.

“자네 아비가 나타나 내뱉는 말을 듣고, 그가 보여 주는 눈빛과 기세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네. 아, 내게 저와 같은 충신이 한 사람만 있었다면 수십 년 인내의 세월이 반은 줄었을 텐데.”

“……!”

“자네는 자네 아비와 다르지만, 다른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야.”

황제가 눈을 감았다.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에서의 귀족 가문은 자네들처럼 큰 능력을 갖추고도 겸손하고, 가진 재물을 세상을 위해 쓰며, 타인의 일에 발 벗고 나설 줄 알아 본보기가 되는 이들이 모인 곳일세.”

“…….”

“그런 가문들이 중원 전역에 퍼져 나라를 살찌우려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 내 꿈이야.”

“…….”

“나는 자네와 자네 아비가, 연가라는 가문이 마음에 드네. 나는 연씨 가문이 새 세상의 초석이 되어 만인의 모범이 되었으면 하네.”

듣고 보니 그저 황위(皇位)의 온존을 위해서 내린 선택은 아닌 듯했다.

‘어마어마한 얘기를 들어 버린 것 같군.’

연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짐짓 얼굴을 굳혔다.

“그나저나 그대도 대단하군. 아무리 황제의 위엄이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나, 일국의 주인이 여식을 주겠다고 하는데도 거부하다니. 제국 역사에 그대와 같은 이는 없었네.”

“자식은 물건이 아닙니다.”

“누가 물건이라던가? 이 난세에 사돈지간을 맺어 세를 불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야.”

황제로서 책임감에 몸부림치는 사람이기에, 그 흔한 말에서도 깊이감이 묻어 나온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소인은 안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능력이 없습니다. 허구한 날 중원을 오가며 손에 피를 묻히기 일쑤일 텐데, 그런 사내를 어떤 아내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대는 너무 낭만적이군.”

“최소한의 존중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마저도 제 친우들에게는 잘 베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속 편하게 살아서 좋겠네.”

다시 계단을 올라 용상에 앉은 황제가 한층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황제로서 뱉은 말을 백관이 들었으니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 보게.”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어째 죽어도 혼인은 안 할 것 같구먼.”

“황실과 사돈지간이 된다는데, 누가 있어 고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올라간 입꼬리부터 끄집어 내리고 말하게.”

연호정이 헛기침을 했다.

황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나가 보게. 오늘의 대화, 즐거웠네.”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혼사, 잘 생각해 보게.”

“……알겠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