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9화. 제국의 피 (4)
깜짝 놀란 고관들이 저마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폐, 폐하!”
“아니 될 말씀입니다!”
“어찌 강호의 무부에게 일국의……!”
순간 황제의 두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밖에 누구 있느냐.”
덜컹!
재차 문이 열리고, 황보적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금군의 병사들을 들이거라. 이후, 짐의 허락 없이 혀를 놀리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옥으로 압송토록 하라.”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촤르르륵!
금군 병사들 이십 명이 반으로 나뉘어 고관들의 좌우로 섰다.
“……!”
고관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들은 이미 한림대학사 조충이 입 한 번 잘못 놀린 탓에 끌려 나가는 걸 보았다.
수십 년을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하게 산 황제에게 이토록 매서운 과감함이 숨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황제가 혀를 찼다.
“연가주의 말에 틀린 것이 없도다. 죽음을 불사하고 직언을 올리는 용과 호랑이 같은 충신들은 어디로 가고,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소인배들만 가득하니 용정의 향으로도 악취가 가시질 않는구나.”
어전의 분위기가 더더욱 싸늘해졌다.
“하나, 황실이 이리된 것은 전적으로 짐의 책임이라. 훗날을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했다지만, 결국 이들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불러온 장본인이니 짐 역시 훗날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신하들을 꾸짖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말이었다.
강호식으로 말하자면 ‘너희도 쓰레기지만, 너희를 쓰레기로 만든 나 역시 쓰레기이니 이 죗값은 달게 받을 것이다.’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이니, 겁을 집어먹은 와중에도 불만을 가졌던 몇몇 관리들은 정신이 다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아주 능수능란하군.’
일신의 위엄이 대단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아랫사람을 휘어잡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천하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권력자가 황제라고는 하나, 아무런 기반 없이 신하들을 소나 말 부리듯 할 수는 없는바.
황제는 자신의 위엄을 토대로 강한 어조를 써 가며 신하들을 찍어 눌렀고, 동시에 자신의 위치가 지닌 특수성을 이용해 일말의 불만마저 잠재워 버렸다.
‘만약 본인의 기반이 확실했다면 굳이 이런 방법까지 쓸 필요는 없었겠지.’
연호정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황좌에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건가.’
한 차례 주변을 둘러보던 황제가 다시 연호정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예법에 어두운 신하들 때문에 말이 끊겼군. 다시 묻겠네. 그대는 짐의 여식과 혼인할 마음이 있는가?”
“그 말씀은 곧, 황실의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왜? 싫은가?”
잠시 말없이 황제를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의 호불호를 떠나, 폐하께서는 이미 원하시는 것을 손에 넣으셨습니다.”
“그건 또 흥미로운 말이로다. 무슨 뜻인지 설명해 주겠는가?”
“강호는 크게 백도 정파와 흑도 사파로 나뉩니다. 수백 년 이상을 서로 죽일 듯 싸워 왔지요.”
“물론 알고 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했던 그들이 얼마 전 손을 잡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폐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광신삼교라는 외적들 때문이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폐하를 욕보이고 황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황제의 눈이 휘어졌다.
“제국과 강호는 하나가 되었다, 이 뜻인가?”
“백도 정파는 언제나 제국 휘하에 있었습니다. 관무불침조약으로 서로에게 관여치 않았지만, 국력이 약해진 이후 구멍이 생긴 치안을 메우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흑도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발언이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이 망가지고 분열되지 않은 것은 자네들이 있기 때문이었지. 짐은 그것을 인정하네. 자네들은 이 중원 대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야.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백도 정파는 흑도 사파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백도 출신의 명망 있는 고수들이 폐하를 도와 악적들을 처단하고 황궁을 바로 세우는 데 힘을 쏟으려 합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굳이 저 같은 야인과 연을 맺지 않아도, 강호 무림은 황제 폐하께서 진정한 천자가 되시도록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드릴 것입니다.”
순간 관리 중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무척이나 컸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
황제가 깊은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미소 짓는 얼굴, 그러나 눈빛은 맑고 깊었다. 눈앞에서 벼락이 쏟아져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강단 넘치는 눈빛이었다.
‘묘한 녀석이군.’
황제는 생각했다.
‘닮았지만, 또한 무척 다르구나.’
그는 연호정에게 부친인 연위와 닮은 면이 있다고 하였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연호정의 강단과 파격적인 면모는 분명 연위와 닮았다. 단순히 그러한 언행을 떠나, 분위기 자체가 닮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닮았다고 하여 근본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성품은 아비의 반절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눈치만큼은 아비보다 훨씬 날카롭다.’
황제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모략에 능한 것인가.’
무능하다고 알려졌다 해도 황제는 황제다. 그런 황제 앞에서, 제아무리 거친 성정을 지녔다 한들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 주기는 힘들다.
처음 어전에 들었을 때부터 이 녀석은 어전의 분위기를 읽고 있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대화에서 자신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대략적으로 예측해 냈다.
상대를 파악하고자 마음먹어서 파악하는 게 아니다. 녀석에게는 주변 환경과 사람의 언행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일상인 것이다.
그런 것들을 순식간에 읽어 내지 않았다면, 이리 편한 대화를 이어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가만히 연호정을 내려다보던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듣고 싶은 말을 척척 해 주니, 그 지혜가 하늘에 이르렀구나.”
강호 무림이 황제의 울타리가 되어 주겠다.
지금 이 발언으로 인해, 관리들은 절대 황제를 우습게 보지 못할 것이다.
당장은 황제의 강렬한 위엄과 매서운 과단성에 압도당했지만, 어전에서 나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성품이 어떠하든, 그들 중 대다수는 각 지방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세력을 모으고 뜻만 제대로 맞춘다면, 황제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불가능하다.
강호 무림의 힘은 대단하다. 그들이 황제의 뒤를 받쳐 주겠다고 한다면, 미래가 어찌 되었든 당장 황제의 권위를 깎아내릴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황제와 무림은 크고도 강력한 명분을 잡고 있었다.
광신삼교의 침공.
황제는 코앞에서 전쟁이 터졌는데도 자리를 지켰고, 무림인들은 황제를 보호하며 외세의 악적들을 물리쳤다.
외적과 맞서 싸워 이 땅을 보호한 그들에게, 만에 하나라도 손가락질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즉 그대 말은, 이미 강호가 짐의 뒤를 받쳐 주고 있으니 굳이 귀한 여식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연을 만들어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짐은 강호 무림과의 인연 때문에 자네에게 여식을 보내려는 게 아니야.”
“하면……?”
황제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툭툭 쳤다.
“강호 무림에는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열셋의 고수가 있으니, 그들을 성천십삼좌(聖天十三座)라 칭한다지?”
성천.
강호인들끼리는 그리 부르지만, 기실 성스러운 하늘이라는 칭호는 황제 앞에서 함부로 쓸 것이 못 된다.
하지만 황제도, 연호정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근래에, 그 전설과 신화로 가득한 이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지. 비왕 공손백룡이 죽었고, 황궁을 어지럽혔던 혈옥마군이라는 악인은 현재 폐인이 되어 옥에 갇혔어.”
“…….”
“만인의 존경을 받던 희대의 고수 열셋 중 둘이 스러졌으니, 성천의 자리는 단번에 열하나로 줄었어. 하지만 공석이 된 두 자리 중 하나를, 한 명의 신진 고수가 꿰찼다고 하였네.”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제가 손으로 연호정을 가리켰다.
“그것이 바로 그대, 벽산 연씨가문의 장자인 연호정이라 들었지.”
“허명에 불과합니다.”
“겸손도 과하면 비례가 되는 법. 그대가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곧 세인들의 안목이 쓸모없다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네.”
“그런 것은 상관치 않습니다.”
“상관해야 할 거야. 진정 천하에 이르기 위해서는.”
“……!”
생각지도 못한 한 방을 맞은 것 같았다.
움찔하는 연호정을 보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세인의 눈과 입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은 뚝심 있는 일이나, 세인의 눈과 입을 무시하고 제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 해도 소인배의 오명을 씻을 수 없는 법.”
“…….”
“무엇 때문에 그리 불편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 자신이 이룬 위치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좋아. 다른 누가 아닌 그대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가만히 황제를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가슴 절절한 가르침,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일개 야인에 불과한 줄 알았거늘, 알고 보니 날카로운 지혜를 갖춘 모략가였어. 위험천만한 모략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줄 알았더니, 지금은 또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도량을 보여 주는군.”
“…….”
“더욱더, 자네가 탐이 나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황제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생각이 복잡한 것이다.
“내, 바보가 되어 수십 년간 주향과 여인의 체향에 묻혀 살았네만, 눈과 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열어 두고 있었지. 궁에 더 신경을 썼다면 좋았겠지만, 그것은 짐으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어. 시시각각 망가져 가는 황실을 보다 보면, 도저히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지.”
안타까움과 아련함, 분노와 착잡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덕분에 강호라는 세상에 대해 남들 이상으로 잘 알게 되었네. 광혼귀군이라는 희대의 고수가 내 곁에 와 준 것도 나의 관심이 그곳에 있던 덕분이었지.”
“…….”
“그래서 나는 자네의 가치를 아네.”
“…….”
“이립이 되기 전에 강호 최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천재 고수. 천하제일가라 불리던 구주명가를 무너트리고 휘하 병사들과 함께 천하를 주유하며 온갖 악인들을 처단한 희대의 무장. 하물며 그것도 모자라 흑도 사파의 맹주를 구워삶고 삼교의 끄나풀들을 제거했으며, 나아가 맹부 동맹의 책임자가 되었으니, 강호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존재로 우뚝 선 것이 바로 자네일세.”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반면 연호정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지고 있었다.
“그대는 훗날 한 걸음만으로도 전 무림에 지진을 일으키는 일대 거인이 될 것이네.”
“…….”
“그런 인재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위정자로서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지.”
“저는…….”
“짐은 자네가 황실의 사람이 되어 바로 곁에서 짐을 보필하길 원하는 것이 아니야.”
“……?”
“강호에서 살아도 좋아. 오늘 이 자리에서 본 그대의 성품, 그리고 연가주의 성품을 생각하면 이 황실조차 그대에게는 호숫물에 불과할 터.”
황제가 턱을 치켜들었다.
“여식을 데리고 강호로 나가 뜻을 펼치게. 그대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짐이 나설 것인즉, 그대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