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화. 제국의 피 (2)
“…….”
성루에 올라서서 말없이 황궁 일대를 둘러보는 연호정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건드리기 힘들어 보였다.
“으쌰! 으쌰!”
“거기! 거기 뒤에 조심해! 돌 쓰러진다!”
“이것들이! 좀 조용히들 못 해?! 천자님께서 계시는 곳인 거 잊었어!”
“헉!”
한참이나 떨어진 외성이지만, 연호정의 귀에는 인부들의 목소리가 하나하나 전부 들렸다.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오감 중 하나를 차단하자 나머지 네 개의 감각들이 훨씬 더 선명해졌다.
흐르는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감각, 아직 채 사라지지 않은 피 냄새,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텁텁한 입맛, 그리고 인부들의 목소리.
후우우우웅.
하늘은 높았고, 바람은 황량했다.
그렇게 연호정은 한참을 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온 줄 다 알면서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서 있는 거야?”
연호정이 눈을 떴다.
천천히 몸을 돌리니, 제갈아연이 성루로 올라오고 있었다.
“왔냐.”
“응.”
제갈아연이 무릎 아픈 노인처럼 아이쿠, 소리를 내며 올라왔다.
두툼한 돌의자에 앉은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북쪽 날씨가 서늘하긴 하네. 돌덩이도 엄청 차갑고.”
“아무래도 그렇지.”
제갈아연이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연호정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외성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제갈아연이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 정말 금방 간다. 그치?”
“그러게나 말이다.”
“벌써 열흘도 더 지났지?”
“오늘로 딱 보름이다.”
“아, 그래? 나도 영 정신이 없네.”
괜스레 시시한 대화가 오갔다.
다시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제갈아연이 이내 한숨을 쉬었다.
“좀 괜찮아?”
“음?”
연호정이 웃으며 팔을 들었다.
“거의 다 나았다.”
“어지간히 심하게 당했다고 들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강철 몸이네.”
“하도 맞으면서 살다 보니 어지간하면 금방금방 낫더라.”
“웃기시네. 사람 몸이 진짜 철이냐? 두드리면 깨지고 작살나지, 단단해지진 않아.”
“그럼 내 몸뚱이가 평범하지 않은 모양이지.”
제갈아연이 웃었다.
연호정은 웃지 않았다. 여전히 담담한 얼굴을 한 채 남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제갈아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감아라.”
“응?”
“머리 긁지 말고 감으라고. 떡이 다 졌구먼.”
제갈아연이 발끈해서 일어났다.
“나 거의 맨날 감거든!”
“맨날 감는데 볼 때마다 머리를 긁냐.”
“아오, 이 망할 놈. 너나 좀 씻어! 땀 냄새 나!”
“약 냄새다.”
할 말 없게 하긴.
투덜거리며 앉은 제갈아연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괜찮지?”
“뭐가?”
“뭐…… 몸이든 어디든.”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할 말 있으면 분명하게 해. 답지 않게 떠보기는.”
“떠보다니! 이렇게 섬세한 사람한테.”
“다 괜찮아.”
연호정이 난간에 양팔을 얹었다.
싱숭생숭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무덤덤했던 얼굴이 조금은 나른해 보였다.
“안 괜찮을 리가 있냐. 싸움도 끝났고, 휴식도 잘 취하는 중이고, 밥이라도 먹을까 하면 매 끼니 상다리가 부러지고, 침상은 하나같이 최고급 비단에…….”
“…….”
“결정적으로 뭐, 아버지가 괜찮으시니까.”
연위의 상태는 빈말로도 괜찮다고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제갈아연은 연호정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살아나신 것만으로도.’
광기에 젖어 무극의 깨달음을 단 하나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곽준의 돌진은 그 자체로 엄청나게 위협적이었다.
특히나 혈마신갑이라는, 항상 몸을 보호하는 마기의 갑옷이 문제였다. 연호정과 곡경의 공격은 일격 일격이 극한의 파괴력을 담고 있기에 타격을 줄 수 있었지만, 기실 떨어지는 바위에 맞아도 멀쩡할 만큼 혈마신갑의 단단함은 대단했다.
그런 단단한 마공의 갑옷을 두른 채 그처럼 엄청난 속도로 달려드는 이를 막아 낸 것이니, 죽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제갈아연 역시 연위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제아무리 자신의 걱정이 깊어도 연호정만 할 것인가.
“조금 전에 한 번 더 가주님께 다녀왔어.”
“아직 안 깨셨지?”
“응.”
“금방 깨실 만한 부상이 아니니까, 당연하지.”
“황제 폐하께서 어의(御醫)들을 붙여 주셨어. 많이 다치셨지만, 회복세는 무척이나 빨라. 당장 엊그제보다 호흡이 훨씬 편안해지셨어.”
“나도 알아.”
제갈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고 있었어?”
“그럼 내 아버지 상태를 내가 모르면 어쩌냐?”
“만날 밖에 나와서 인부들 도와주랴, 뭐 하랴 하느라 잘 들르지도 않는 줄 알았어.”
물론 제갈아연은 연호정이 불효자라서 아버지를 잘 찾아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이 아파도 아버지가 몸져누워 계시다면 옆에서 병간호를 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연호정이라면 괜히 그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나선 것 같아서 속을 끓이고 있을 줄 알았다.
한데 보아하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만날 아버지 옆에서 쪽잠 잔다. 새벽에 어의들 올 때 내 방으로 오는 거야.”
“호오?”
제갈아연이 키득거렸다.
“왜? 불효자라고 오해받기는 싫었던 모양이지? 쓸데없이 자세하게 얘기하네?”
“당연한 거 아니겠냐.”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오해받는 건 싫다. 여러모로.”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멈추었다.
‘오해라.’
상황을 돌이켜 보면 오해까지는 아니었다.
연위는 연호정의 강함을 예전부터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어느덧 어른이 되어, 천하에서 인정받는 거물로 성장한 것을 언제나 자랑스러워했다. 적어도 제갈아연이 볼 때는 그러했다.
하지만 그만큼 걱정도 컸다. 그 무시무시한 무공 실력이야 천하가 다 알고 있으니 어디 가서 당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연위가 정말로 걱정하는 것은 연호정의 성격이었다.
연호정은 당한 것은 철저하게 갚아 주는 성격이었다.
특히나 적을 대함에 있어서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그것을 달리 말하자면 필요 이상으로 살기가 짙다는 뜻이었다.
‘가주님께서는 언제나 호정의 살기를 걱정하셨지.’
실제로 제갈아연 역시 연호정의 살기를 몇 차례 접한 적이 있었다.
살기의 극한을 본 적은 없지만, 그 일부만으로도 연위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녀였다. 만약 자신의 자식이, 제 혈육이 그런 성질머리로 천하를 주유하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성격은 언제나 적을 향해 있으니까 걱정할 만한 일은 안 생기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것이다. 쓸데없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런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는 것이 부모 마음인 것이다.
연호정이 오해가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뜻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정작 아들이 폭주할까 싶어 나서신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그녀가 헛기침을 뱉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시진 않았을 거야.”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시든, 무사하시면 됐어.”
“그래, 그게 중요한 거지.”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바라보았다.
“왜?”
“인마.”
“왜, 인마.”
“난 괜찮으니까 괜히 눈치 보지 말고 너 할 거나 해라.”
제갈아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 괜찮다는 놈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 와서 늙은이처럼 바람만 쐬고 있어?”
“바람이 좋잖냐. 잡생각 정리하는 데도 좋고.”
“으이구, 앓느니 죽지. 너야말로 답지 않게 여기 있지 말고 후딱후딱 내려와서 일 좀 거들어.”
“일할 게 남아 있어?”
“있지.”
“사상자 정리도 다 됐고, 남은 건 인부들이랑 성을 짓는 것뿐일 텐데?”
“내 말 상대가 필요해.”
연호정이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손을 흔들었다.
“멀리 안 나간다. 가라.”
“하여간 싸가지는.”
제갈아연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어이, 연호정 대협.”
연호정이 토악질할 것 같은 표정으로 제갈아연을 바라보았다.
“뭐냐, 그 소름 돋는 호칭은?”
제갈아연이 씨익 웃었다.
“성천에 오른 거 축하해.”
“……됐다. 거 뭐 대단한 거라고.”
“무시무시한 말을 잘도 하시네.”
“사람들이 지어 준 별호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게 훨씬 더 무시무시한 일이야. 뭐, 축하는 고맙게 받을게.”
“나중에 무용담이나 좀 들려줘.”
“재미없는 얘기다.”
“그럼 내 무공이나 봐주든가.”
“그건 시간 내서 해 보지.”
제갈아연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 내용에 비해 너무 담백한 대화였지만, 사실 제갈아연은 연호정이 성천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는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초절정고수가 되는 것과 무극에 오르는 것은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무극이 재능과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었다면 벌써 수백 명이 무극을 돌파했을 것이다.
연호정은 그 상식을 깨부수고 서른도 되기 전에 성천에 올랐다.
제갈아연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정말 너무 빨리 달린다, 너.’
여러모로 연호정은 참 빠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연호정이 이룬 것을 순수하게 축하해 주었다. 다만, 모든 것이 빠른 연호정이 훗날 지쳐서 쓰러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혼자가 된 연호정의 얼굴은 다시 무덤덤하게 변했다.
‘고맙군.’
솔직히 좀 적적했던 건 사실이었다. 이유 없이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하지만 제갈아연 덕분에 꽤 풀어진 것 같기도 했다. 이래서 사람에게 대화가 중요한 것이리라.
피식 웃던 연호정은 문득 연위를 떠올렸다.
‘…….’
연호정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아버지.’
그는 연위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그리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그것을 두고 나쁘다, 좋다 말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사신다면 좋겠지만, 막는다고 막을 수 없는 걱정이라는 걸 알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연호정이 진짜로 신경 쓰는 것은 바로 아버지가 마지막에 선보였던 그 벼락의 일검(一劍)이었다.
‘절대삼검(絶對三劍)이라 하셨지.’
이름 짓기 뭐하지만, 당신께서 이룬 깨달음에 자부심은 있기에 대충 절대삼검이라고 부르는 세 개의 검초.
그중 몇 개를 완성하셨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관에게 듣기로는 어느 정도 틀은 다 잡았다고 하였는데, 그거야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때 절대삼검의 한 초식을 보았다.
아버지와 미쳐 버린 곽준이 정면으로 충돌할 때, 아버지의 장검에서 쏟아져 나온 벼락과도 같은 검기가 곽준의 몸을 그대로 분쇄해 버린 광경.
정확히는, 곽준의 몸이 아니라 혼을 분쇄해 버린 것에 가까웠다. 그의 몸을 이룬 마기의 그릇을 모조리 박살 내 버린 것이다.
그 장면이, 상단전이 극도로 발달한 연호정의 눈에는 곽준이라는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주르륵.
연호정의 귀밑으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위험해.’
아버지가 입은 외상은 곽준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내부가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엉키고 다친 것은 그 절대의 일검 때문이었다.
‘아버지께 너무 위험한 무공이다. 아니, 아버지뿐이 아니라 무극에 오른 고수 누구라도 쉽게 쓰기 힘든 무공일 거다.’
연호정의 눈에 격동이 어렸다.
걱정과 놀라움, 기쁨과 서글픔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심검지경(心劍之境)이라니, 대체 그간 얼마나 고생하셨기에 거기까지 가셨습니까?’
아버지께서 심검을 다시 쓰지 않으시길 바랐다. 연호정은 진심으로 그걸 바랐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걱정이라는 것은 하지 않겠다 마음먹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아버지가 자신에게 걱정하지 말라 하셔도 자신은 걱정할 것이다. 의지만으로는 쉽게 걱정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한숨을 푹 쉬었다.
“뭐가 됐든 불효자다, 불효자.”
그때, 아래에서 제갈아연이 외쳤다.
“호정! 호정아! 야! 연호정 대협!”
연호정이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그렇게 부르지 마, 인마!”
“얼른 내려와! 어전에서 연락이 왔어!”
“……어?”
제갈아연의 목소리는 엄청나게 다급했다.
“화, 황제 폐하께서 널 보자고 하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