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6화. 제국의 피 (1)
“…….”
태사의에 앉아 보고서를 읽는 양천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몹시 심각했다.
이미 몇 번이고 읽은 보고서였다. 그것도 한 장이 아니라 열 장이 넘는 분량이었다.
지금 그것을 반 시진이 넘도록 보고, 생각하고, 다시 보길 반복하고 있었다.
백서는 얌전히 부복한 채로 주군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 옆에 선 부선 역시 스승의 심각함을 느꼈는지,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미쳤군.”
그 한마디를 뱉어 낸 양천의 표정은 묘했다.
뭔가 억울해 보이기도 했고, 감탄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어울리지 않게 삐친 것 같기도 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놈들이 황궁에 기생하고 있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규모였단 말이야?”
백서가 읍하며 말했다.
“참으로 위험한 놈들입니다. 황궁을 그 정도로 장악하고 있었다면, 못해도 반백 년 이상은 공을 들였을 것입니다.”
“그랬겠지. 그리고 반백 년이 넘도록 황궁의 머저리들은 놈들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것이고.”
“…….”
양천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궁이 이리도 초토화가 되어 버릴 줄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 보고서를 읽어서 알 수 있었다. 이쪽에서 그토록 화려하게 치고 들어갔으니, 놈들도 생존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니, 정확히는 이쪽이 아니지.’
양천의 눈이 보고서의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되었다.
“무림맹이라…….”
“…….”
“맹에서는 분명 황후를 도와 궁을 장악하고 있던 우헌 태감을 밀어붙이고 황궁의 위엄을 바로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사절단을 보냈다고 했는데.”
“예, 저도 그리 알고 있습니다.”
“저놈들이 우리한테 약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사절단이 중간에 자의로 마음을 바꾸었다는 뜻이 아닌가?”
“혹은, 이 계획을 세운 무림맹의 군사가 따로 언질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겠지.”
양천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에 얼핏 당황이 드리워졌다.
“설령 그랬다 한들, 현장에서 움직이는 이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면 절대 이런 결과를 내지는 못했을 텐데.”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군. 황후를 만나러 갔다가 곧장 반역에 휩쓸리고, 와중에 그것을 기회로 삼아 황제를 찾아가 직언을 가한 것도 모자라 그 자리에 있는 태감까지 잡아냈다…….”
백서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부주님 말씀대로, 그쪽 군사의 언질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처리하는 것은 결국 현장 사람들입니다. 같이 간 사절단 중 제갈세가의 여식이 있다고 했으니, 그쪽 머리에서 나온 계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책?”
양천의 얼굴에 어린 당황이 짙어졌다.
“이런 걸 계책이라고 할 수가 있나?”
“…….”
“이건 말 그대로 뒤가 없는 직진이었어. 자칫 잘못하다가는 황궁 전체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를 판이었지. 이건 계책도 뭣도 아니야. 그냥 무식한 거야.”
그때, 부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분명 그렇게 보이지만…… 저는 다르게도 생각했습니다.”
“음, 그래. 네 생각도 들어 보자.”
공식적인 자리였지만, 양천은 부선을 존중해 주었다.
부선이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저희는 물론 무림맹 역시 황궁이 신화교 놈들에게 장악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지.”
“물론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황제를 건드릴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요. 황제를 건드리려 했다면, 애초에 황후가 그 정도 권력을 잡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네 말이 옳다.”
“말인즉슨, 놈들은 황제를 괴뢰(傀儡)로 만들어 제국의 정통성만큼은 끝까지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중원 사람들의 마지막 보루는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지요.”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일이었지.”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
“놈들이 황제를 제거하지 않고 괴뢰로 만들었다면, 사실상 그 자체로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닌 말로 놈들이 제국의 병력을 일으켜 하북부터 먼저 쓸고 내려왔다면, 저희는 꼼짝없이 제국과 싸워야 했겠지요.”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무림이 언제라도 반역도당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즉, 직접 황제를 알현하여 정말 그가 저들의 괴뢰가 되었는지를 확인하고, 만약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칼을 뽑을 각오를 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허어.”
양천이 탄식하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언제라도 적이 될 위험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 수장의 자격을 보고 생사를 결정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양천이 혀를 내둘렀다.
“그럼 더더욱 미친놈들이 아닌가? 이거 어째 흑도 사파라는 우리보다 더 막 나가는 거 같으이.”
백서가 고개를 저었다.
“거칠어 보이기는 합니다만, 한편으론 멋들어진 계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황후를 통해 궁으로 들어간 것이니 손쉽게 잠입할 수 있었고, 굳이 반역 사태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능력이라면 어떻게든 황제의 처소까지 치고 들어갈 수 있었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무엇보다, 애초에 황궁을 적으로 인식한 연후에 세운 계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허허.”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네. 고작 셋이었어. 태감을 죽이고 일대를 장악한 후, 황제 휘하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아군을 끌어들이는 것. 이 모든 걸 어떻게 미리 계획할 수 있었겠나?”
“그건 그렇습니다.”
“하물며 금군이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면 어찌했겠나? 너무 위험하고 충동적인 일이었어.”
부선이 입을 열었다.
“만약 그랬다면…… 사절단 일행이 황제를 납치하여 황궁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렇게까지?”
“상대가 무림맹이기에 의외로 보일 뿐, 사실 스승님께서도 같은 상황이라면 별반 다르지 않게 움직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흐음?”
양천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양천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 비슷하게는 움직였을 것 같군.”
부선이 말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양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우리 역시 그렇게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림맹이라서 의외다…… 그 말을 달리 생각해 보면, 무림맹 역시 여유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왜 여유가 없을까? 물론 삼교 놈들이 위험한 거야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그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굳이 그리 파격적으로 행동할 이유는 없는 듯한데.”
그 정확한 이유까지는 모르겠다는 듯, 백서와 부선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때, 양천의 눈이 반짝였다.
“맹주 때문이로군.”
“예?”
“다른 여러 이유도 있기야 할 테지만…… 황궁을 건드리면서까지 그 의중을 살피고, 나아가 적아(敵我)의 구분까지 확실히 알아 두겠다……. 맹주 선발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부선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림맹의 맹주 선발과 황궁에서의 일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요?”
“두 가지가 있지.”
양천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툭툭 쳤다.
“첫째로는, 부정으로 인한 맹의 전력 감소를 해소하기 위함이다.”
“네?”
“무림맹은 삼교의 세작 때문에 이미 한차례 홍역을 치렀어. 그런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
“물론 그렇습니다.”
“맹주가 되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게 많다. 단순히 무공이 강하고 명망이 높은 것만이 전부가 아니야. 정치력이 중요한 만큼 우호 세력이 탄탄해야 함은 물론, 개인의 영향력이 충분해야 해.”
백서가 탄성을 질렀다.
“후보들끼리 무리해서라도 영향력을 넓히려 들면…….”
“그래, 마침 무림에서 잘 먹히는 게 황궁과 관부의 연줄이지. 어지간한 세력은 그쪽과 연이 없지만, 한 주먹 한다는 놈들은 죄다 관리들과 엮여 있어.”
양천의 눈이 빛났다.
“우리와는 달라. 놈들에게는 그런 게 중요한 것이야. 그렇다고 맹주를 선출하는 것인데 그냥저냥 대충 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적어도 각자가 영향력 있는 인사들 몇몇은 끼고 나타날 거란 말이지.”
“…….”
“거기에 황궁의 관리가 섞여 있으면 골치 아파지는 거야. 만약 황궁을 제대로 청소하지 않으면, 자신의 사람으로 삼교의 주구를 뽑게 될 위험이 엄청나게 커지겠지.”
“…….”
“하지만 맹주 뽑자고 삼교의 끄나풀을 끌어들일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나. 애당초 무림맹을 세운 것도, 맹주를 뽑는 것도 그 목적이 삼교와의 전쟁에 있거늘, 그렇게 되면 전쟁 시작도 전에 판이 엎어지는 격이지.”
부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라리 부정을 원천 차단하는 방식을 쓰면…….”
“말했듯, 놈들은 우리와 달라. 사고의 방향 자체가 다르지. 그런 건 다 겉핥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을 게야.”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어지간히 봐 왔지, 나도.”
“그, 그렇군요.”
“흐음.”
양천이 태사의에 몸을 묻었다.
“뭐, 정말로 그런 의도 때문에 황궁을 정리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을 게야. 당장 지리만 보아도 장강 이북에는 정파의 세력이 우글거리고 있어. 한데 황궁이 신화교 놈들 손에 놀아나서 남하하기 시작한다면, 그땐 자기들 발등에 불 떨어지는 격이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여러모로 정리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리고…….”
양천의 눈빛이 바뀌었다.
“정말 깔끔하게 정리되었군. 아마 그들이 기대한 것 이상이었을 게야.”
백서가 입을 열었다.
“부맹이 동맹을 맺었지만, 만에 하나 황제가 저쪽 손을 들어 준다면 이는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조했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아무래도 그렇기야 하겠지. 그래도 우리한테는 그놈이 있잖나.”
“예?”
“연 부관. 보고서를 보아하니 연가주가 황제의 눈에 든 것 같은데, 그 아들이 묵룡부에 손이 닿아 있다면 당장에야 큰일은 없을 게야.”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문제는 전쟁이 끝난 연후의 힘 싸움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는 건데.”
양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빌어먹을, 연호정 이놈 자식은 본인이 무림맹 의정군 대수이기 전에 본부의 부관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괜히 황제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가는 우리도 골치 아파지는데.”
“설마 연 부관이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그럴 놈은 아닌데…… 아오, 이제는 나도 모르겠어. 그 성질머리가 오죽 지랄맞아야지. 당최 예상이 안 돼, 예상이.”
양천이 얼굴을 찌푸린 채 머리를 벅벅 긁었다.
“비왕을 죽이고 성천에 오르기까지 하다니, 이제는 내 주먹 무섭다고 한발 물러설 일도 없을 거 아냐? 싸가지 없는 놈. 생각하니까 열 받는군. 그래도 서열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선배들 다 제치고 지가 왕이야? 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