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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775화 (775/963)

775화. 복마전(伏魔殿), 그리고 복마전(伏魔戰) (13)

퍼어어어억!

시원한 일도로 기천형을 튕겨 낸 팽무강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늙으니 별 게 다 힘들구만!”

퍼퍼퍼펑!

사방에서 쏘아진 열양장을 피해 내는 팽무강의 신법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이크!’

서걱!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공격을 피해 내고 단숨에 목을 날렸다.

슬슬 칼의 무게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초절정에 이른 무력, 막강한 내공과 수준 높은 도법으로 한바탕 난장을 쳤지만, 화포를 집중적으로 부수기 위해 과격하게 움직였고 내공 소모도 극심했다.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화포를 부술 수 있었지만…….

훅!

단숨에 거리를 좁힌 기천형이 악귀처럼 두 주먹을 휘둘렀다.

퍼퍼퍼퍼펑!

팽무강은 묵직한 거도를 신들린 듯 휘두르며 기천형의 권격을 막아 냈다.

우둑! 우둑!

관절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몸에 부담이 실렸다. 널찍한 도배를 타고 들어오는 화기가 신경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무인 대 무인의 싸움이었다면 눈앞의 강자부터 죽이고 그다음 상대를 찾았겠지만, 목적 자체가 적의 전력을 끌어내리는 데에 있었으니 힘의 소모가 극심한 지금의 그가 기천형에게 밀리는 것은 당연했다.

‘더는 안 돼.’

이러다가 부상을 면치 못하게 생겼다. 수성전까지 치르기 위해서는 여기서 빠져야 했다.

파아아아악!

팽무강의 신형이 단숨에 하늘을 날았다.

“이놈!”

놀랍게도, 기천형은 팽무강과 대등한 속도로 움직여 따라붙었다.

‘거머리 같은 놈.’

신법의 속도도 대단했지만, 체공 시간과 허공에서의 자유로운 움직임은 팽무강 이상이었다. 발 빠르게 움직여 적을 일도양단하는 데에 특화된 어기신풍보다 훨씬 더 풍성한 움직임을 보여 주는 신법이었다.

두 사람의 칼과 주먹이 마구 부딪쳤다.

쩌저저저정!

“큭!”

팽무강이 답답한 신음을 내며 뒤로 물러났다.

병장기술은 두 발이 땅에 닿아 있을 때 훨씬 더 막강한 힘을 낸다. 내공술로 적을 몰아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두 발 딛고 서도록 태어난 사람인 이상 당연했다.

하지만 신화교도들의 기공술은 중원의 것보다 더 섬세하고 자유로웠다.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든 말든, 내치는 위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팽무강은 약간의 초조함을 느꼈다.

‘이거 진짜 한 방 맞는 거 아닌가?’

퍼퍼펑! 퍼어엉!

상대가 사정없이 몰아치는 덕분에 어전 쪽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이놈까지 함께 넘어가면 문제가 된다.

‘제길, 어쩔 수 없군.’

팽무강의 눈이 기천형의 뒤를 향했다.

‘귀군이 한바탕해 준 덕분에 여유도 생겼으니.’

조금 전, 사위를 뒤덮는 엄청난 기운과 함께 외성을 일직선으로 관통한 희대의 고수가 적 이백여 명과 화포 수십 문을 날려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 압도적인 등장에 적들의 전진이 확 멈춰 버렸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진하게 될 것이다.

훅!

팽무강의 몸이 빨려 들어가듯 제오 궁문 밑으로 떨어졌다.

기천형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빛이 어렸다.

파아아아악!

궁벽을 밟고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오른 기천형이 남쪽을 향해 외쳤다.

“놈들이 후퇴한다! 다시 움직여라! 우리가 밀어붙이고 있다!”

팽무강이 입을 쩍 벌렸다.

“저 새끼가?!”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화르르르륵!

내성 궁문까지 치고 들어간 대장의 자신감 넘치는 육성은 그 수하들의 떨어진 사기를 다시 끌어 올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때려 부숴!”

“우와아아아!”

콰콰쾅! 퍼어엉!

다시금 적의 전진이 시작되었다.

팽무강이 욕설을 뱉으며 손을 뻗었다.

우우우우우웅!!

강력한 내공으로 펼쳐지는 허공섭물의 술수였다.

허공에 떠오른 기천형의 몸이 일순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어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하지만 기천형 역시 만만치 않았다.

쩌저저저저정!!

화려한 충돌음과 함께 팽무강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기천형 역시 훨훨 날아 궁벽에 처박혔지만, 큰 충격은 받지는 않은 듯했다.

화르르르륵!

기천형의 양손에서 화룡마도의 칼날이 일렁였다.

팽무강의 눈빛이 서릿발처럼 엄해졌다.

“누구 앞에서 칼을 쥐고 있는 거냐?”

병장기가 아닌 진기로 만들어진 화기의 칼날이지만, 팽무강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였다.

“닥쳐라, 곰탱이!”

기천형이 버럭 외쳤다.

“네놈을 죽이고 황제 놈 모가지를 따겠다!”

훅! 쩌저저저정!

기천형의 얼굴에 놀라운 빛이 어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거도를 휘두르는 팽무강. 하지만 그의 칼질은 이전과 달랐다.

더 빠르고, 더 유연했다. 특유의 강력한 힘과 무서운 절단력은 사라졌지만, 공격의 흐름이 장구하게 이어져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쩌저저저저정! 쩌저저정!

두 사람의 칼날이 몇 번이고 부딪쳤다.

팽무강의 얼굴은 엄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눈빛도, 호흡도 바뀌지 않았다.

반면 기천형의 양팔은 갈수록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한번 잡힌 흐름을 이쪽으로 유리하게 끌어오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숨 한 번 쉴 틈도 주지 않고 거도를 휘두르는데,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칼의 감옥이다. 위력은 이전과 같지 않지만, 한번 갇히니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미친!’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는가.

기천형이 이를 악물고 화정을 쥐어짰다.

화르르르르륵!

일순간 더 강해지는 화기.

피슉!

놀랍게도 화기의 벽을 뚫은 도기가 기천형의 몸에 다섯 줄기의 도상을 새겨 놓았다.

열양공의 힘으로 탈출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다. 연환으로 이어지는 셀 수 없는 칼질, 기천형은 당혹감을 느꼈다.

쩌저저저저저저정!!

몇 번이나 부딪쳤을까.

기천형은 입조차 열 수 없었다. 호흡이 점점 달리고 있었다.

극도의 집중력으로 상대의 칼을 마주쳐 튕겨 내는데, 그마저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상대의 도속(刀速)이 더 빨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이게 대체 뭐야?!’

쩌저저저정! 훅!

순간 팽무강이 칼질을 멈추고, 기천형의 양팔이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

기천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상대는 칼을 멈추었는데, 자신만 관성에 따라 큰 동작으로 팔을 휘둘렀다.

초보적인 실수였다. 너무 정신이 없다 보니 상대의 꾀에 그대로 당해 버린 것이다.

팽무강의 눈이 번쩍였다.

“잘 가라.”

번쩍! 콰아앙!!

벼락처럼 빠른 혼원벽력도가 기천형의 화룡마도를 깨부수고 그의 몸뚱이를 내성 성벽까지 날려 버렸다.

“우웨에엑!”

벽 세 개를 깨부수고 날아갔음에도 기천형은 죽지 않았다. 그저 양팔에 깊은 도상이 새겨지고, 그 못지않은 내상으로 각혈을 할 뿐이었다.

“허어, 저놈 몸뚱이 단단한 거 봐라?”

주르륵.

팽무강의 입가에도 핏물이 비쳤다.

“제기랄, 징그러워서 못 해 먹겠군. 저런 놈들을 대체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 거냐?”

순식간에 흐름을 잡고 건곤연환탈백도(乾坤連環奪魄刀)를 열다섯 번이나 펼쳤다.

내상을 안 입을 수가 없었다. 무리한 내공 소모, 충돌로 인한 진동이 몸에 극심한 부담을 주었다.

“어찌 되었든 적장 하나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으니, 이제는…….”

그때였다.

화아악!

팽무강의 몸이 굳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튕겨 나간 기천형은 물론 어전을 향해 돌진하는 신화교도들과 사음교, 광혈교, 창위 모두의 몸이 굳어졌다.

‘이건?!’

당황한 팽무강이 재빨리 궁벽 위로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았다.

퍼버버버벅! 번쩍! 번쩍!

시뻘건 혈광이 엄청난 속도로 좌우를 오가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혈광이 움직일 때마다 핏물이 허공을 수놓았다.

진득한 붉은색이 또 한 번 솟구치는가 싶으면, 그 혈광은 미세하게 더 빨라졌다. 마치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그 생명을 빨아들이고 속도를 늘리는 것만 같았다.

그 기괴한 움직임도 움직임이지만, 더 무서운 것은 기파였다.

콰드드드드득!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혈광이 자아내는 마기.

그리고 그 뒤를 쫓는 거대한 사기(邪氣)와 위압적인 신기(神氣)까지.

“이, 이런!”

쿠구구구궁!! 콰쾅! 쾅!

화포로 공격하는 것보다 배는 더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는 비슷했지만, 지반을 통째로 무너트릴 것처럼 과격한 울림이었다. 세 마리의 괴수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일 때마다 그 주변에 있는 외물이 모조리 터져 나가며 무시무시한 폭풍을 일으켰다.

콰르르르릉!!

서쪽으로 불어닥치는 무형의 폭풍에 건물 서너 채가 그대로 폭삭 주저앉았다.

단순히 속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급함이 절로 느껴지는 세 사람의 거대한 힘을 담은 바람이 사위를 박살 내고 있는 것이었다.

팽무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극!!”

저 혈광은 남쪽의 마인, 그리고 사기의 주인은 곡경이 분명했다.

그리고 어딘지 신비롭고도 위압적인 저 신기의 주인까지, 세 마리의 거대한 괴수가 미친 듯이 날뛰며 황궁 외성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이게 뭐야, 이 시발!!”

수양한답시고 잊고 살았던 저급한 욕설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팽무강이 어전을 향해 외쳤다.

“모두들 어전을 보호하시오! 무극의 고수들이 이곳까지……!”

그때였다.

화아아아아악!

한 줄기 거대한 검기가 충천하더니,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팽무강의 눈이 커졌다.

“연가주!”

파아아아악!

연위는 단숨에 팽무강을 지나쳤다.

창백한 안색, 아직 상단전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내공은 제법 회복하였으나 내상이 심하여 움직임이 예전만 못했다.

그래도 그는 빨랐다. 무극의 고수에 뒤지지 않을 만큼.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질주하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숭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차아아아아앙!

내성과 외성의 경계, 거대한 성벽 위에 올라선 연위가 천라제국검을 뽑아 들었다.

‘한 번만 더.’

그는 팽무강보다 더 빨리 저 마인의 존재를 느꼈다.

푸화아악!

엄청난 속도였다.

마치 짐승이라도 된 듯 두 손으로 땅을 짚어 가며 움직이는데, 그 빠른 곡경이 아직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이놈.”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입은 내상은 물론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은 상단전에서 오는 고통마저 잊은 듯, 너무나도 밝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기어이 애비보다 먼저 올라갔구나.”

왜일까?

제국검을 뽑아 들고, 자신보다 먼저 더 높은 경지에 오른 아들의 얼굴을 확인하면서.

연위는 지금껏 얻은 피해와 피로가 모조리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단 한 점의 피로는 물론 내상과 상단전 이상에서 오는 두통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퍼어엉! 퍼어어어엉!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충격음.

혈광의 마인은 그 잠깐 사이 신화교도 삼십여 명의 목을 뽑아내고는 그 피에 젖어 날뛰었다.

그때, 연호정의 월도가 허공을 갈랐다.

번쩍!

한 줄기 섬광이 마인의 왼팔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크아아아악!”

마인의 움직임이 그제야 멈추었다. 완전히 미쳐 버린 듯 짐승처럼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괴성을 지르는 마인의 모습은 참혹하기까지 했다.

퍼어어엉!

곡경의 흑사신장이 마인의 몸통을 후려쳤다.

푸스스스!

놀랍게도 마인은 멀쩡했다. 충격은 느낀 듯했지만, 풍겨 나오는 사기를 흡수하기라도 한 듯 이전보다 더 강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곡경의 얼굴에 낭패가 어리고, 연호정의 눈빛에 살기가 어릴 때.

“날뛰지 마라, 마귀야.”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일대 협객의 목소리.

하늘의 그물로 제국을 수호하는 황제검(皇帝劍)을 쳐든 희대의 검사에게서 형용키 어려운 서기(瑞氣)가 뿜어져 나왔다.

번쩍!

고개를 돌린 마인의 눈에 연위가 포착되었다.

미소로 가득한 연위의 얼굴에 엄한 기색이 어렸다.

“예가 어디라고 감히 그 난장을 치는 것이냐!”

“크아악!”

퍼어어어어엉!

연위를 향해 달려드는 마인의 속도는 이전보다 더 빨랐다.

그때, 연위는 들을 수 있었다.

자신보다 커져 버린 아들의 다급한 목소리를.

든든하게 자신의 뒤를 맡아 주었던 도맥 종주의 목소리를.

그리고 저 멀리 어딘가.

한시도 잊어 본 적 없는, 너무나도 그립고 그리운 반려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까지.

‘걱정 마시오. 다 컸지만, 아직 부족한 게 많은 녀석들을 두고 벌써 가진 않소.’

연위의 눈에 신광이 어렸다.

‘아직은 갈 때가 아니니 보고 싶어도 참아 주오.’

번쩍!!

제국검의 검첨에서 솟아오른 심검이 벼락과도 같은 힘을 품었다.

퍼어어어억!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일인일수(一人一獸)가 뒤엉킨 채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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