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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771화 (771/963)

771화. 복마전(伏魔殿), 그리고 복마전(伏魔戰) (9)

콰드드득!

땅을 갈며 튕겨 나간 기우신의 몸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웨에에엑!”

피투성이가 된 몸 위로 또 한 번 각혈을 한다.

굴강한 가슴이 손바닥 모양으로 움푹 꺼졌다. 온몸을 휘감았던 쇠사슬은 양팔에만 겨우 달려 있었으며, 상체의 피부 곳곳이 찢어지고, 기이하게 새어 나오는 불꽃이 머리카락과 눈썹 일부를 태웠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 등 뒤에서 붉고 푸른 화염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진기의 역류였다. 그가 품고 있던 화정이 날뛰며 회복이 아닌 파괴를 이어 가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을 무방비 상태로 맞았으니 죽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지만, 이미 죽은 것과 진배없는 상태다.

고수들끼리의 승부가 한 끗 차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었다. 절대 방심치 않고 싸우겠지만, 진기로 보호받지 못한 틈으로 무극의 일격이 작렬하면 제아무리 절대의 고수라도 목숨이 남아나지 않는 것이다.

“……?!”

한 방에 기우신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린 곡경 역시 후속타를 이어 가지 못했다.

저절로 벌어진 입, 멍한 표정이 일품이다. 그 자신도 이런 결과가 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쿨럭!”

어디선가 들려오는 각혈 소리.

곡경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무너진 궁벽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연위가 한 움큼 피를 토하고 있었다.

입에서만 나오는 피가 아니었다. 코에서도 검붉은 피를 흘리는데, 안색이 기우신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곡경의 눈이 흔들렸다.

‘방금 그건?’

상중하, 모든 단전의 힘을 끌어 올린 그였다.

그래서 보였다. 달아오른 상단전의 힘이, 본디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칼날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설마?!’

스르륵.

연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혈관이 터졌는지 두 눈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코에서 나오는 피는 멈추었지만,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듯 몸이 비틀거렸다.

곡경이 떠듬거리며 물었다.

“당신 방금…….”

전음으로는 서슴없이 반말을 해 댔지만, 이제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연위가 눈과 입가의 피를 닦아 내며 물었다.

“제대로 들어갔소?”

곡경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오.”

기우신이 곡경의 옆구리에 일권을 박아 넣을 때, 그는 최초로 심검을 발출했다.

하지만 지금의 경지로는 공격 자체를 막아 낼 수 없었다. 기우헌을 상대했을 때보다 더 강하게 내쳤음에도, 고작 일권의 위력을 줄인 정도가 전부였다. 오히려 심검의 반탄력에 연위 자신이 내상을 입었다.

제아무리 심검이라도 그것을 발출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육체와 순도 깊은 진기가 필요한 법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튼튼한 상단전을 개화한 무극의 고수였으니, 어지간한 일격은 통하지 않는다.

상대의 마음, 영혼을 가를 정도의 일격.

말하자면 무극의 고수가 도달한 상단전의 경지를 뛰어넘는 일격을 가해야 했다. 그만한 고수의 정신을 베는 위력의 심검이라면, 말 그대로 자신의 상단전이 파탄 날 각오를 해야 했다.

‘위험했다.’

심검으로 기우신의 상중하 삼단전을 쪼개 버렸다.

그 순간 연위는 죽음을 느꼈다. 내상 이전에, 심검이 주는 반탄력으로 상단전이 파괴되어 죽을 뻔한 것이다.

천만다행히도 목숨은 부지했지만, 지금도 안심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날뛰는 상단전의 신기를 제어하느라 극심한 내상을 다스릴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콱!

하지만 연위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검갑째로 쥔 검을 지팡이 삼아 선 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꼿꼿했다.

“당신…….”

“……?”

홀린 듯 연위를 보던 곡경은 순간 연위의 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천라제국검(天羅帝國劍)?!”

훅!

곡경의 몸에서 살벌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당신, 그 검을 어디서 얻었는가?”

연위가 의아한 눈으로 곡경을 바라보았다.

“이 검을 아시오?”

꽤 고풍스러운 검이었지만, 그것도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병기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수수한 장검으로 보일 뿐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불민한 이 사람에게 하사해 주신 검이오만.”

“……!!”

곡경의 눈이 흔들렸다.

“폐하를 뵈었나?”

“그렇소.”

“폐하께서는…… 안전하신가?”

“물론 안전하시오.”

곡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행이로군.”

옥체에 아무 이상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들으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폐하께서 그 검을 하사하셨다고?”

“그렇소.”

곡경의 얼굴이 굳어졌다.

‘폐하께서 직접 제국검을 하사하셨다…… 저 검사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당금 황제의 안목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걸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천라제국검은 황궁삼대보검(皇宮三大寶劍) 중 하나였다. 강호에서 흔히 말하는 신병이기(神兵利器)는 아니었지만, 무극의 고수가 내리친 일격에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강도를 자랑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지만, 제국검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충무지검(忠武智劍).’

천라제국검의 이명은 바로 충무지검으로, 제국 최고의 공훈을 세운 무장(武將)에게 하사하는 상징적인 보검이었다.

대대로 천라제국검을 하사받은 무장은 둘밖에 없었다. 한 명은 역모로 나라가 뒤집힐 때 목숨을 걸고 황제를 지킨 이였고, 다른 한 명은 외세의 침략으로 망국(亡國)의 길을 걷게 된 나라를 지켜 낸 이였다.

그 정도로 대단한 보검을 연위가 받았다. 역사상 세 번째로 제국검의 주인이 된 것이다.

심지어 강호의 일개 무부가.

몇 번 입을 달싹이던 곡경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검, 죽을 때까지 잘 보관하시오.”

“물론 내 몸처럼 여길 것이오.”

“몸처럼 여기는 정도로 끝나선 안 되오. 그 검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닌 검인 줄 아시오?”

“황제 폐하께서 내려 주신 검이니 그것만으로도 다시 없을 영광이오.”

곡경은 답답해졌다.

“그 검의 가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오!”

“내게는 검일 뿐이오.”

“뭐, 뭐라고?!”

“폐하께서 하사해 주셨으니, 이 검으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악도들을 겨눌 것이오. 그것이 전부요.”

곡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천라제국검은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세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한데 이 고집스러운 검사는 그저 한 자루 검으로 치부한다고 한다.

‘……!’

뭐라 소리치려던 곡경은 이내 한숨을 쉬었다.

‘하긴, 폐하라면.’

비록 자신이 모시는 분이지만, 황제 폐하의 성격은 여러모로 파격적이었다. 연위 말마따나 정말 그럴 용도로 주셨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제에게 하사받은 보검을 저렇게 부담 없이 쓰는 것도 보통 성질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여간, 그 싸가지 없는 놈 배짱이 어디서 왔는지 알겠소이다.”

순간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내 아들을 만난 적이 있소?”

곡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르고 있었소? 지금 남문에서 마인과 싸우고 있는 녀석이 당신 아들이오.”

“……!!”

연위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그, 그 마인과 싸우는 고수가?”

“근래에 근사한 별호도 얻었다고 들었소. 비왕 공손백룡을 때려죽였으니 세상이 시끄러워질 만도 하오만.”

곡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도 패왕이 뭐야, 패왕이.”

“……!”

“크흠, 잘난 아들내미 둬서 좋겠소이다.”

비꼬는 의도가 다분한 어조였다.

하지만 연위는 곡경의 어조에 한 점도 신경 쓰지 못했다.

‘이 녀석.’

그가 느꼈던 마인의 힘은 여기 곡경과 비교해도 한 치의 모자람이 없는 것이었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이보다도 더했다.

말하자면 성천급의 강자라는 뜻인데, 그런 고수를 상대로 제 아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단다.

‘비왕을 처치했다고? 이놈아, 언제 거기까지 올라간 것이냐?!’

연위의 얼굴에 벅찬 감정이 떠올랐다.

곡경이 입맛을 다셨다.

“모르고 계셨나 보군. 하긴, 원체 떨어져 있었다고 듣기는 했소이다.”

얼이 빠져서 연신 헛웃음을 짓는 연위의 표정이 압권이다.

가만히 연위를 보던 곡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들은 서른 전에 무극, 아비는 무극 전에 심검. 참 나, 천하제일세가(天下第一勢家)라고 칭송받을 게 두 눈에 훤하구먼.”

“무공 좀 강하다고 천하제일 운운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게 아니오.”

“잘났소. 뭐 얘기는 이 정도로 해 두고…….”

곡경이 기우신을 바라보았다.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곡경의 사공은 기우신의 육신을 철저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기우신은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곡경의 눈이 대번에 살벌해졌다.

“덕분에 간만에 몸 좀 풀었다. 잘 가라.”

곡경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황천괴산사공의 기운이 잔뜩 밀집되어 있었다.

그때, 연위가 말했다.

“귀군.”

“왜 부르시오.”

“그래선 안 되오.”

곡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 말이오? 설마 이 자식을 살려 두라는 것이오?”

“살려 둬선 안 되겠지. 하나 지금 죽여선 안 되오.”

“이유는?”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시하고 벌써 손을 휘둘렀을 것이다.

우우웅.

연위의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푸른빛이 어렸다.

동시에 연위는 머리 한구석이 찡! 하고 아파 왔다. 순간적으로 중심이 잡히지 않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작자를 죽이면 우리도 죽소.”

“뭐?”

“이자의 몸 안에 거대한 폭탄이 있소. 신화교도들이 품은 화정(火精)인 것 같은데, 너무나도 불안정하오.”

“……?!”

“귀군도 볼 수 있을 것이오.”

끼아아아아악!

사공이 들끓어 오르며 자연스레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곡경의 신기(神氣) 어린 눈이 기우신의 체내를 살폈다.

‘……!’

연위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기우신이 품은 진기의 핵은 하단전이 아니라 중단전에 있었다. 그 중단전은 태양처럼 강렬한 기운으로 휩싸여 마구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런.’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불안정하다.

놀랍게도 그 기운이 인간 본연의 생명력, 원정(原精)을 대체하고 있었다. 그것이 몸 전체를 장악하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 알아서 죽는다고 하던 게…….’

그리고 지금, 그 막강한 기운이 소멸 중이었다.

원정을 대신하고 있으니, 저 기운이 소멸하면 목숨도 끊어진다.

곡경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었군.”

더 강하게 치고 나올 수 있었음에도 수세를 중심으로 겨룬 것은 자신을 이 자리에 묶어 두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교도들의 황궁 점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적의 최강 전력 중 하나를 보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무리하게 싸우다가 당하면 어차피 자폭한다. 그게 가장 깔끔하겠지만, 만에 하나 그 폭발에서도 곡경이 죽지 않으면 일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곡경의 손이 휘둘러졌다.

퍼버버벅!

무자비한 손길에 기우신의 사지가 잘려 나갔다.

울컥!

기우신이 피를 토했다. 하지만 여전히 죽지는 않았다.

곡경이 기우신의 목을 잡고 그대로 외성 밖으로 던져 버렸다.

허공을 날기 전, 곡경은 기우신의 눈을 볼 수 있었다.

한스럽고도 미련이 남은 눈빛. 동시에 제 일을 마친 데에서 오는 만족의 눈빛.

“갑시다.”

파아앙!

곡경이 연위를 부축하여 어전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잠시 후.

번쩍! 콰아아아아앙!

무지막지한 폭발과 함께 외성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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