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70화 (770/963)

770화. 복마전(伏魔殿), 그리고 복마전(伏魔戰) (8)

‘점점 가까워지는군.’

신화교 출신치고는 화기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화기의 밀도만큼은 어떤 고수보다도 대단했다. 지금의 연위로서는 닿을 수 없는 영역, 내공의 밀도가 무시무시했다.

‘이것이 무극이로구나.’

다급한 상황에서도 연위의 얼굴은 꽤 묘했다.

자신과 다른 차원에서 거니는 고수의 기척을 느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기척을 느낀 것일 뿐 무력의 편차를 확실하게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느껴진다.

목적지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괴물들의 난투극에 신음하는 천지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완전히 다르다.’

스륵.

넘실거리는 기운에 밀려온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대단한 농도였다. 한 줌의 힘으로 태산을 부술 것 같은 느낌, 극한의 부동심으로 이름 높은 연위조차 괴물들의 기운에 몸이 알아서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요대에 걸린 검집을 쥐자 마음이 편해졌다.

‘예상한 범위 내다.’

무극의 고수가 뿜는 진정한 힘은 아직 본 적 없지만, 그들이 중원 최강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단순했다.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힘을 마음껏 휘두르는 괴수들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의 막연한 상상으로 잴 수 없는 힘이었다.

그러나 연위는 심검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올랐고, 그렇기에 미약하게나마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것, 행할 수 없는 것들을 분석해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지만, 그들조차 쉬이 닿을 수 없는 영역에서 얻은 힘을 완성되지 못한 몸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가능성은 충분해.’

물론 버겁다. 아차 하면 손 한 번 써 보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일격을 먹일 수는 있을 것이다.

‘목숨을 건다면.’

목숨을 걸지 않는 생사결은 없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대응조차 못 해 보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그렇게 연위가 이각을 더 달렸다.

더 빠르게 달릴 수도 있었지만, 다소 은밀한 접근을 위해 신경을 써야 했다.

후욱!

연위의 눈이 흔들렸다.

‘드디어.’

고수들의 역장 안으로 들어왔다.

‘실로 엄청난 너비로구나!’

얼추 계산해도 오십여 장의 거리가 남았다. 한데도 두 고수가 뿜는 기파 때문에 팔다리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이쪽으로 살기를 집중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스르륵.

거대한 궁의 첨단부에 내려선 연위가 안력을 집중했다.

콰쾅!

귀청을 떨어 울리는 폭음과 함께 쇠사슬을 쥔 거한이 궁벽을 뚫고 날아갔다.

훅!

거의 동시에 움직인 회흑빛 사신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거한을 향해 쌍장을 휘둘렀다.

콰콰쾅!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늘에서 유성 몇 개가 떨어지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럽게만 느껴지는 회흑색 사이한 운무로 휩싸인 장력은, 땅에서 폭발하자마자 일대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스으으으윽.

자욱하게 올라오는 연기마저도 회흑빛이었다.

연위의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지독하구나!’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사기(邪氣)의 폭풍이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멀리서 느꼈을 때와는 다르다. 오감 전체를 흐리게 만들 정도의 압도적인 사기, 그 농도가 너무 짙어서 오히려 깨끗한 정기(正氣)처럼 느껴진다.

끼아아아아악!

사방에서 귀곡성이 울렸다.

연위의 눈에 푸른 광채가 떠올랐다. 저 기괴한 귀곡성으로부터 두뇌를 보호하기 위해 상단전의 신기가 알아서 치솟고 있었다.

‘……!!’

두 눈에 몰린 영혼의 기운.

그 순간 연위는 보았다. 저 회흑빛 사기로 무장한 괴인의 주변을 떠도는 원혼(冤魂)의 환상을.

수십 마리의 섬뜩한 귀신들이 저 사악한 이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저승에서 소환된 악귀들이 주인의 몸을 보호하는 듯, 괴한의 열양공이 주는 피해를 일차적으로 분쇄하기까지 했다.

‘상단전!’

저 또한 상단전의 힘이다. 극치에 이른 사공으로 존재하지 않는 귀신을 불러낸 것이다.

물론 술가(術家)의 관점에서 보면 귀신은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사공의 고수는 술가와 연이 없었다.

극한에 이른 무공으로 상단전이 개화(開化), 술가법도의 영역에 이르렀다.

그래서 저런 것이 가능한 것이다. 자연스레 일어나는 귀곡성만으로 사람을 미치게 하고 상대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 지독하게 비틀린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공이었으나 이룬 경지는 가히 천외천이라 할 만했다.

‘저자가 필경 광혼귀군 곡경일 것이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다가가기 힘든 기도야.’

연위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자, 이제 나도 참전해야 하는데.’

두 초고수의 격전은 보는 이의 눈을 돌아가게 할 만큼 화려하고 무시무시했지만, 기실 그 힘의 여파는 대단할지라도 움직임은 훤히 보였다.

초절정고수와 무극에 이른 고수의 속도 차이는 크지 않다. 비왕 공손백룡처럼 아예 규격 외의 경공술을 지닌 경우가 아니고서야, 연위의 속도 역시 성천에 뒤지지 않았다.

‘맞상대하게 된다면 다르겠지만.’

연위가 곡경을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조여드는 불꽃의 쇠사슬을 귀기 어린 표정으로 격파해 내는 신들린 무공.

가만히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연위가 일순 눈을 빛냈다.

‘지금!’

[광혼귀군 곡경, 맞소?]

연위의 전음은 너무나도 선명히 곡경에게 닿았다.

곡경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연위가 역장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의 존재를 느낀 그였다.

그리고 그것은 기우신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벽산연가의 가주요. 빠른 일 처리를 위해 그대를 도우러 왔소.]

곡경은 기우신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전음을 날렸다.

[끼어들지 마. 거치적거린다.]

거칠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하나 생사결로 한참 예민해진 와중이었다. 그 성격에 욕을 안 한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또한 그의 말은, 거칠지언정 사실이었다. 절대고수들 간의 격전에서는 어떤 식의 변수라도 위험 요소가 된다. 그 변수를 자신의 힘으로 삼아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는 천하에서도 몇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이 전투는 근소하게나마 곡경이 우위에 있었다. 차근차근 상대하다 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곡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연위의 생각은 달랐다.

[당신들의 싸움을 틈타 신화교 놈들이 어전을 공격할 거요.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이 좋소.]

괜히 상대의 마음을 흐트러트리는 발언일까?

그렇지 않다. 이 정도로 마음이 흐트러져 싸움다운 싸움을 못 한다면 성천의 자격이 없다.

스륵.

자세를 푼 곡경이 천천히 기우신의 주변을 돌았다.

[아니까 어전으로 가. 이쪽은 내가 맡는다.]

[얼마나 걸릴 것 같소?]

[몰라! 놈도 강해! 한나절이 걸릴지, 찰나에 승부가 날지 아무도 모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곡경은 느끼고 있었다. 이 싸움이 생각보다 장기전이 되리라는 걸.

기우신은 철저하게 방어세로 일관하면서도 영역에서 벗어나는 순간 짐승처럼 덤벼들었다.

이렇게나 끈질기게 덤벼드니, 천하의 곡경도 일격필살의 공격을 날릴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지구력에 있어서만큼은 상대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연위도 짐작하고 있었다.

[한순간을 노리시오.]

[시끄러워! 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

[상대가 반응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거요. 그 틈을 놓치지 마시오.]

순간 욕설을 내뱉으려던 곡경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뭐지?’

된통 욕을 퍼부어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목소리를 듣자 기묘한 신뢰가 생겼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약한 무인이지만, 왠지 그의 말마따나 기우신이 반응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곡경은 상대의 말에 점점 솔깃해지는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며 당황했다.

그리고 기우신은 그 순간을 포착했다.

파아아아앙!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쇠사슬이 단숨에 곡경의 목을 노렸다.

속도도 속도지만, 그 예리함이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철저하게 수세로 상대하다 적의 빈틈이 드러나는 순간 결정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 그것이 기우신의 전술이었다.

곡경의 눈이 부릅떠졌다.

피슉!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재빨리 옆으로 몸을 기울인 곡경, 그의 목덜미에 핏물이 번졌다. 쇠사슬에서 몰아치는 경풍에 피부가 찢어진 것이다.

‘이런 제기랄!’

신뢰고 뭐고 울화가 치밀었다. 곡경이 입술을 깨물며 기우신에게로 파고들어 흑사신장(黑邪神掌)을 날렸다.

퍼어어어엉!

기우신의 몸이 출렁거렸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맨몸으로 받아 냈다. 곡경의 자세와 기도가 흐트러진 것을 보고 승부를 건 것이다.

“죽어라.”

기우신의 왼 주먹이 곡경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곡경의 눈이 충혈되었다.

‘빌어먹을!’

퍼어어어억!

섬뜩한 타격음과 함께 곡경이 삼 장 옆으로 밀려났다.

‘……?!’

찰나의 순간, 곡경은 의아함을 느꼈다.

‘뭐야?’

이번 일격은 받아 줄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갈비뼈 서너 개는 부러질 중상을 각오했다.

하지만 옆구리가 찡, 하고 아팠을 뿐 그 이상의 충격은 없었다.

파아아악!

재빨리 몸을 휘돌려 기우신에게 접근한 곡경이 쌍장을 휘둘렀다.

퍼퍼퍼퍼펑!

두 사람의 권장이 부딪치자 반쯤 허물어진 궁벽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곡경이 기우신을 바라보았다.

애써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지만, 기우신 역시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이번 일격으로 승부의 추가 단숨에 기울어질 거라고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

훅!

순간적으로 거리를 벌린 곡경이 맞닿은 엄지와 중지를 튕겨 냈다.

티이이이이잉!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회흑색 구체가 생성되더니 기우신의 미간을 노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 그리고 예리함.

극에 이른 내공 조예로 펼치는 탄지공(彈指功), 탄영천공지(彈影穿孔指)였다.

쩌저정!

기우신은 겨우 탄지공을 피했다. 어깨 어림에서 출렁이던 쇠사슬 일부가 탄지공의 경풍에 맞아 그대로 바스러졌다.

주르륵.

기우신의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그의 진기는 쇠사슬까지도 몸의 일부처럼 여기며 소통하고 있었다. 한데 그것이 끊어져 버린 탓에 약간의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기우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도우러 온 아군이 승부의 결과를 바꾸진 못할 것이다!”

파아아앙!

기우신 곡경을 향해 쏘아졌다.

곡경이 두 손을 튕겼다.

티팅!

대비하고 있던 기우신의 양 주먹이 탄지공 두 발을 그대로 튕겨 냈다.

원하는 만큼의 피해는 주지 못했지만, 어쨌든 옆구리에 맞은 일권으로 내상을 입은 상대였다. 이제는 정면으로 맞붙어도 승기를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곡경 역시 상대의 의도를 읽었다.

‘개 같은!’

내상으로 기가 흔들려 움직임이 한 박자 느려졌다. 회피하여 탄지공을 날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정면 승부였다. 곡경이 이를 갈며 흑사신장의 힘을 끌어 올렸다.

그때였다.

번쩍!

‘……?!’

곡경의 눈이 커졌다.

‘뭐야?’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그의 눈은 날붙이 비슷한 반투명한 무언가가 기우신의 가슴을 꿰뚫는 걸 보았다.

훅!

빠르게 접근하던 기우신의 속도가 무섭게 줄어들었다.

전신에서 뿜어내던 막강한 기운이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마구 흐트러졌다. 기우신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순간 곡경은 연위의 말을 떠올렸다.

‘상대가 반응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거요.’

번쩍!

곡경이 전면으로 돌진하며 기우신의 가슴팍에 일장을 박아 넣었다.

쾅!

굵은 쇠사슬이 수십 조각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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