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8화. 복마전(伏魔殿), 그리고 복마전(伏魔戰) (6)
콰르르릉!
대지를 갈아 버리는 경풍이 어느 순간 턱! 하고 막히더니 소멸되었다.
무극을 열고 하늘로 날아오른 자들의 진기는, 어떤 무공을 익혔든 그 순수함이 대자연의 그것에 한없이 가까워지게 마련이다.
자연력(自然力)이 한순간 사라지는 일은 없다. 서서히,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스러져 흩어질 뿐이었다.
비록 자연에서 나기 힘든 기운이지만, 사공(邪功)의 극치를 이룬 곡경의 진기 역시 자연력과 비슷한 특성을 보였다. 그건 곡경만이 아니라 그 영역에 도달한 모두가 비슷할 것이다.
한데 그 힘이, 나아가던 길을 멈추고 씻은 듯 사라졌다.
“……빌어먹을.”
곡경의 눈이 깊어졌다.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없고, 참 가지가지 하는군.”
곡경이 바라보는 곳에는 하나의 커다란 불덩어리가 존재했다.
치이이이익!
어느 한 곳의 이지러짐 없이 완벽한 구체를 이룬 불덩이는 대지에서 한 자 높이에 떠 있었다.
불덩이 주변의 땅은 흡사 용암처럼 보였다. 지글지글 끓는 땅에서 피어오른 허연 연기는 불덩이에 닿는 순간 훅 사라졌다.
영롱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보석과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타 죽는 죽음의 보석이었다.
가만히 불덩이를 노려보던 곡경이 슬쩍 우측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아아악!
열기에 의지라도 실린 것 같았다.
곡경이 이동하는 순간 불덩이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가 창날처럼 그를 노렸다.
곡경이 손을 휘둘렀다.
퍼엉!
폭음과 함께 무형의 열기가 산산이 흩어졌다.
곡경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지독하군.’
열기를 쳐 낸 손등이 뜨거웠다.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기의 방어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독한 열기였다.
가만히 서서 불덩이를 노려보던 곡경이 저 멀리 남쪽을 돌아보았다.
“……속 뒤집히게 만드는구먼.”
남쪽에선 화려한 마기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마기가 어찌나 지독하고 거대한지, 연호정의 패도적인 기운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강력한 마공이다. 나에 필적하거나…… 어쩌면 나보다 위일 수도 있겠어.’
곡경이 인상을 찡그렸다.
‘광혈교의 마공과는 근본이 달라. 이건 중원에서 난 마공이다. 그렇다면…….’
마선인가?
‘정말 마선이라면, 마선이 이놈들과 손을 잡았다면.’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뱉은 곡경이 불덩이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만 숨고 나와라!”
파바바바바박!
사악함이 절로 느껴지는 일갈에 땅 곳곳이 퍽퍽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훅!
거대한 불덩이가 요술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곡경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치리링! 치리리링!
괴인은 엄청난 덩치의 소유자였다.
산발한 머리카락 때문에 나이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덥수룩한 수염이 코밑과 턱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찢어진 상의가 허벅지까지 늘어지고, 하의는 정강이 밑으로 찢기고 불타서 맨발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터질 듯 부풀어 하의를 꽉 채우는 허벅지 근육, 훤히 보이는 가슴팍에도 바위처럼 크고 단단한 근육이 가득했다. 그 위압적인 몸을 좌우 사선으로 가로지른 쇠사슬이 굉장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곡경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목숨을 걸어야겠어.’
약간의 기파도 드러내지 않는다. 특유의 강렬한 불꽃도, 악랄한 살기도 없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곡경의 본능은 상대의 위험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곡경이 입을 열었다.
“누구냐? 신화교 쪽이냐?”
“…….”
“뭐,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 정도로 정신 나간 화기를 뿜는 열양공은 신화교 말곤 없으니.”
“…….”
“말수가 없군.”
곡경이 신중하게 일 보를 밟았다.
“그럼…….”
그때였다.
퍼어어억!
움찔거리는 몸.
곡경이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의 가운데가 시커먼 쇠사슬로 뚫려 있었다.
“이……!”
부르르 몸을 떨던 곡경이 왼손으로 쇠사슬을 잡았다.
오른손으로 쇠사슬을 쥐고 있던 괴인이 말없이 팔을 당겼다.
화악!
가슴이 뚫린 곡경의 몸이 신기루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괴인의 얼굴, 그 안에서 한 쌍의 붉은 광채가 뿜어졌다.
쩌어어어어엉!
유연하게 몸을 돌린 괴인이 쇠사슬이 감긴 양팔을 위로 쳐들었다.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진 쇠사슬 중앙을 짓누른 것은 바로 곡경의 수도(手刀)였다.
이내 곡경의 발이 괴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쾅!
짧고 강렬한 폭음과 함께 괴인이 십여 장이나 튕겨 나가 건물 하나를 깨부쉈다.
“흐음.”
바닥에 내려선 곡경이 옆구리를 털어 냈다. 그의 옆구리 쪽 의복이 까맣게 그을려 너덜거리고 있었다.
“방심 못 할 놈이군.”
놀랍게도 곡경의 가슴은 멀쩡했다.
괴인의 쇠사슬이 뚫은 것은 곡경의 사공이 일으킨 환상이었다. 실체보다 더 실체 같은 환상, 천하 모든 사공의 정점이라는 황천괴산사공(恍擅壞散邪功)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연호정과 가볍게 손속을 나눌 때는 완전하게 개방하지 않았던 그 무공.
후우우우웅!
독한 열기로 뜨거워졌던 일대가 곡경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회흑빛 사기로 인해 싸늘하게 식었다.
단순히 기온이 내려간 것이 아니었다. 그 사이하고 소름 끼치는 기운이 생명체의 공포를 자극하고 있었다.
후두두둑!
무너진 건물 잔해를 뚫고 나온 괴인.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무척이나 멀쩡해 보이는 외양이었다.
‘역시 그렇군.’
곡경이 어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미친놈을 황궁 밖으로 유인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인가?’
그때였다.
“아프군.”
흠칫 놀란 곡경이 괴인을 바라보았다.
목덜미를 잡은 괴인이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얼마 만에 맞아 보는 일격인지 모르겠구나. 상당한 힘이야.”
거대한 덩치답게 낮고 울림이 큰 목소리였다.
곡경의 눈이 깊어졌다.
“벙어리인 줄 알았는데 말을 할 줄 아는구먼?”
“아, 조금 전에 말인가?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지. 취해 있었거든.”
뭐에 취해 있었는지, 곡경은 묻지 않았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후우, 정말 세상일이 내 마음 같지가 않구만.”
화르륵.
괴인의 몸에서 붉은 화기가 넘실거렸다.
지금껏 봐 온 신화교도들의 화기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온몸으로 화기를 발산해 진기의 방벽을 둘러치는 것이 통상적인 신화교도들의 방식이었다면, 저 괴인은 몸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손바닥만 한 불꽃을 뿜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여느 신화교도들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마치 화공(畫工)이 그린 이야기 속 괴수를 보는 듯했다.
“조금만 더…… 정말 조금만 더 집화(集火)가 진행되었다면, 청화(靑火)를 뚫고 순식간에 백화(白火)에 이를 수 있었을 텐데.”
괴인이 쓰게 웃었다.
“하나 하늘이 내게 웃어 주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지. 다른 녀석에게 맡길 수밖에.”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는 거기까지 하시고.”
우두둑. 우두둑.
곡경의 두 손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얌전히 물러갈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아니어도 곧 죽을 거다.”
“뭐?”
자신의 죽음을 너무 당당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말한다.
듣는 이로서는 괴상한 농담인가 싶어 황당해할 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괴인의 붉은 눈빛을 본 곡경은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죽기 전에, 신화의 호법으로서 최선을 다해야겠지.”
“오호라, 호법이었나?”
“너 때문이다.”
“……?”
치리리링.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괴인.
오관이 뚜렷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이목구비는 서역인의 그것이었다.
“네놈의 기척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백화는 몰라도 청화는 뚫었겠지.”
“뭔 개소리야?”
“내 이름은 기우신(起雨伸)이다.”
“……?”
“나를 화신(火神)에서 교의 호법으로 돌아오게 만든 네놈을 용서치 않겠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쏘아진 기우신의 손이 곡경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곡경의 눈빛이 돌변했다.
‘빠르다!’
속도도 속도지만, 그 박력이 대단했다. 기우신이 박찬 땅에는 일 장이 넘는 고랑이 파여 있었다.
멱살을 잡은 기우신의 팔뚝을 쥔 곡경이 사공을 끌어 올렸다.
그때였다.
퍼어어엉!
폭음과 함께 곡경이 오 장이나 밀려 나갔다.
곡경의 앞섶은 죄다 타 버려서 가슴과 명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드러난 맨살은 화상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곡경의 눈이 흔들렸다.
기우신이 왼손을 들어 보였다.
“염련폭(炎蓮爆)이란 것이다.”
멱살을 잡고 다른 손으로 공격할 줄 알았는데, 잡은 손에서 화기가 폭발했다.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다. 곡경은 자신이 이리 허무하게 일격을 허용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번쩍!
한 줄기 붉은 선으로 화한 기우신이 어느새 하늘 높이 떠올랐다.
머리 위로 쭉 편 길고 두꺼운 다리가 마치 쇠로 만든 기둥과 같았다.
곡경이 지면을 딛고 도약했다.
콰아앙!
곡경이 서 있던 자리 반경 오 장에 달하는 영역이 박살이 나 버렸다.
후웅!
뛰어오른 곡경의 몸이 그대로 기우신을 향해 날아갔다.
그 움직임은 무척이나 묘했다. 직선으로 날아가는데도 마치 허공을 멋대로 부유하는 유령처럼 보였다.
기우신의 몸이 회전했다.
부아아아앙! 쾅!
허공을 가른 쇠사슬이 대지와 궁벽을 반으로 쪼개 버렸다.
훅!
어느새 기우신의 전면에 선 곡경이 그의 가슴에 쌍장을 가져다 댔다.
콰앙!
폭음과 함께 날아간 기우신의 몸뚱이가 땅에 삼 장에 달하는 고랑을 만들었다.
절정고수, 아니 초절정고수라도 그 지경이 되었다면 온몸의 뼈가 다 부러져서 사경을 헤맸을 것이다. 즉사했을 가능성도 컸다.
쾅!
하지만 기우신은 너무나도 멀쩡히 일어나 쇠사슬을 휘돌리고 있었다.
신화교도 특유의 허공을 격하는 불꽃의 장력 같은 건 쓰지 않았다. 접근전이 특기인 것인지, 힘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빠르고 강해. 확실히 강적이라 할 만하지만.’
곡경은 예상보다 어렵지 않은 전투의 흐름에 안심하면서도 한 줄기 의아함을 품었다.
‘왜 진심 같지가 않지?’
쿵!
재차 진각을 밟은 곡경이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후우우웅.
회흑빛 안개가 오른손을 넘어 오른팔 전체를 휘감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고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은, 정말이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사악한 기운이었다.
기우신이 움찔했다.
화아아아아악!
곡경 주변의 배경이 순식간에 어두워진 것 같았다.
두 눈 가득 사악한 청색 살기를 피워 올리며, 조금은 구부정한 자세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곡경의 모습은 사신(邪神)이자 사신(死神) 그 자체였다.
“……뭐, 네놈이 뭘 노리는지는 모르겠다만.”
끼아아아아악!
곡경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몽환적으로 들렸다.
그 주변으로 귀신의 귀곡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환청임이 분명한데도 기우신은 움찔했다.
정신에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귀곡성.
이 또한 상단전의 공명을 통한 자연스러운 공격이었다. 상대의 정신에 타격을 주고 부동심을 흐트러트려, 싸움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곡경은 사공의 대가였다. 누구나 상상 가능한 사술을, 막을 수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려 무공과 하나로 일치시켰다.
“어차피 죽을 거, 더 빨리 죽여 주마.”
기우신이 사납게 웃었다.
“어디 해 보아라.”
퍼어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곡경의 손이 기우신의 얼굴을 잡고 땅에 처박았다.
콰앙!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이 귀찮은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