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5화. 복마전(伏魔殿), 그리고 복마전(伏魔戰) (3)
“허억! 허억!”
“응? 이년 봐라.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어?”
“사, 살려…….”
콰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여인의 머리통이 그대로 뭉개졌다.
발로 밟은 게 아니라 철추로 내리친 것만 같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좋구나.”
취한 듯 몽롱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사내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하의만 대충 가린 몸, 굴강함이 절로 느껴지는 꽉 짜인 근육이 압권이었다. 그 몸의 칠 할을 피와 살점이 덮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지옥에서 홀로 살아남은 마귀처럼 보였다.
“이제 좀 풀리는군.”
그의 몸처럼, 거대한 방 안도 온통 피투성이였다.
여기저기에 열 구가 넘는 시체들이 팔다리가 뜯겨 나간 채로 흩어져 있었다. 그중 여덟은 나체의 여인들이었고, 나머지는 건장한 사내였다.
사내가 한옆에 둔 곰방대를 들었다.
화륵!
손끝에 삼매진화(三昧眞火)를 피워 곰방대에 불을 붙인 그가 힘껏 연기를 빨았다.
흘러나오는 연기는 상당히 독한 향을 풍겼다. 그 향이 피비린내 가득한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아주 좋군.”
마공을 회복하기 위해 오랫동안 그 철방에 갇혀 있었다.
그간 쌓이고 쌓인 색욕과 살심을 며칠 동안 다 풀었다. 철방에 머물며 구 할을 회복했던 마공도 그 과정에서 거의 완전한 힘을 되찾았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지.”
오랜만에 얻은 쾌락이 너무 커서, 이제는 또 오랫동안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갚아야 할 게 있다면 반드시 갚는다. 그것을 무시하고 살아가기에는 빚이 너무 컸다.
몽롱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던 사내의 눈에 일순 끔찍한 마기가 어렸다.
퍼억!
손에 쥔 곰방대가 분질러졌다.
“찢어 죽일 땡중.”
갑자기 무허의 얼굴이 떠올랐다.
웃음 너머의 진의를 파악하기 힘든 그 얼굴이.
갈 때가 다 된 늙은이 주제에 주먹이 어찌나 매섭던지, 일격을 교환할 때마다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받았었다.
처음이었다. 상대의 무공에 저도 모르게 경의를 품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상대의 무공에 평생을 모르고 살던 두려움을 느낀 것은.
‘그 정도로 차이가 났던가.’
비록 삼군(三君)의 이름이 신선제왕보다 한 수 낮게 평가되고 있지만, 사내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승부라는 것은 본래 한 끗 차이다. 무공이 강할수록 승률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승률을 보장하지는 못하는 법이었다.
한 수 차이라면 어떻게든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무허의 주먹 세 합을 받아 낸 이후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십 초.
정확히 십 초였다. 전투 능력을 상실하기까지가.
당대 무림, 천하제일에 가장 가깝다는 권신(拳神)의 주먹은 그렇게나 무서웠다.
물론 상성의 차이도 있었다. 사내의 마공력이 무허의 항마신공보다 조금만 더 강했다면, 반대로 그가 상대를 압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차이는 심했다. 상성 이전에 깨달음과 무리(武理)부터가 달랐어.’
당시엔 인정하지 못했다. 수준이 다르다는 사실을.
하지만 지금은 인정했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서는 평생 무허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기다려라.’
푸스스스.
떨어진 곰방대가 스스로 불타올랐다. 그 불은 신화교도들의 열양공과 달리 끈적끈적한 핏물처럼 무겁게 넘실거렸다.
‘삼 년 안에 찾아가 주지. 그날이 소림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땡중을 죽이고 소림까지 몽땅 불태울 것이다. 그의 분노는, 그의 한은 그렇게나 컸다.
“후우.”
사내는 숨을 고르며 범람할 것 같은 살기를 다스렸다.
그때였다.
“……?”
사내의 고개가 남쪽으로 향했다.
“이 기운은……?”
미약한, 너무나도 미약한 기운의 편린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기감은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솟구친 기운의 편린 속, 감당키 힘든 난폭한 성질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사내의 얼굴이 밝아졌다.
화아아아아악!
혈정마공(血晶魔功)이 저절로 일어나며 그의 몸에 붙은 피딱지를 모조리 벗겨 내기 시작했다.
“그놈이구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상대였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상대가 강하다는 것을. 그리고 상대의 근본이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지금껏 음지의 수많은 고수들을 상대로 싸워 왔고, 개중에는 자신보다 훨씬 더 잔혹한 마귀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놈들은 마(魔)에 홀렸을 뿐, 마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천성이 유약하여 어떤 유혹에도 스스로를 다잡지 못하는 놈들이었다.
놈은 달랐다.
가슴 시린 한, 깊이를 알 수 없는 분노를 품고도 자신을 잃지 않았다. 그걸 넘어 무극을 열고 신세계에 발을 들인 초인이기도 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땡중에 대한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펄럭!
하의를 입은 사내가 여전히 헐벗은 상체 위에 장포를 걸쳤다.
준비는 그걸로 끝이었다. 전신에 마력이 화려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퍼어엉!
손짓 한 번에 방의 외벽은 물론 그 너머의 복도까지 날려 버린 사내가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놀란 도사가 뛰어왔다.
“어, 어르신?!”
사내가 씨익 웃었다.
유난히 도드라진 송곳니가 도사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선물을 받으러 가겠다.”
“그, 그게 무슨……?!”
콰앙!
한줄기 폭음과 함께.
핏빛 광채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 * *
“……!!”
기천형의 얼굴이 일순 창백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성문까지 온 모든 고수가 연호정의 기도에 사로잡혔다.
완전하게 개방하지 않았는데도, 그 존재감의 일부만 드러냈는데도 몸이 굳어 버렸다.
‘뭐야?’
후우우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이 몸을 스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게 된다. 바람에 섞인 기운, 일대종사(一代宗師)의 존재감이 그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이럴 수가!’
잠잠했던 바다에 일순간 파도가 치는 것처럼.
어디서 적당한 무공 한 수 익힌 놈처럼 보이던 상대에게서 갑작스레 무지막지한 기도가 풍겼다.
초절정고수를 압도하는 기운은 어디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같은 급에서도 이룬 경지에 따라 실력 차가 천차만별이라지만, 지금 상대가 풍기는 존재감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영역에 거하고 있었다.
“……극문?!”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
훅!
순간 기천형 주변에 있던 고수들 모두에게서 강렬한 화기가 치솟았다. 기천형의 중얼거림을 듣고 현실을 직시하자 저도 모르게 내공이 튀어 버린 것이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민감한 놈들이군. 그게 그렇게 바로 느껴지나?”
“……!”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내 요구나 빨랑빨랑 들어줘라.”
연호정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궁 안에 있는 너희 병력들 다 끌고 와. 이년 모가지 꺾어 버리기 전에.”
기천형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느닷없는 순간에 감당키 힘든 괴수 한 마리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괴수의 손에는 신화교의 두 성녀 중 하나가 인질로 잡혀 있었다.
‘뭐지? 뭐야?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머리가 굳어서 돌아가질 않는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번쩍!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왜? 싫은가?”
“…….”
“장담컨대 지금 나는 너희 모두를 쳐 죽일 수 있다. 그 뒤에 즉시 궁으로 쳐들어가서 너희 동료들까지 싹 잡아 족칠 수도 있지.”
“…….”
“자비를 베풀어 줄 때 얌전히 고개 숙여라. 내 인내심은 그리 깊지 못해.”
아무리 머리가 안 돌아가도, 당황만 하지 않았다면 기천형은 절대 이 제안을 듣고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했다. 상대의 존재감에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들은 영광스러운 신화교의 전사들이었다.
감당키 힘든 상대와 싸우다 죽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신화교를 위해서라면, 세상 모든 것을 불태워 새 세상을 만들 화신(火神)을 위해서라면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천형은 그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지를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심검에 마음이 흔들렸고, 어깨에 내려앉은 부담감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기천형을 노려보던 연호정이 버럭 소리쳤다.
“빨리 결정하지 못해!!”
“헉!”
무지막지한 호통에 기천형이 화들짝 놀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연호정이 헛웃음을 흘렸다. 기천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건 뭐 오합지졸도 아니고, 굳이 이런 인질극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구먼.”
그때였다.
기우희가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연호정은 기우희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기우희가 침을 삼켰다.
“누, 누군가가…….”
은은한 공포가 깃든 목소리.
연호정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누군가? 무슨 말이지?’
그때였다.
훅!
연호정의 눈빛이 파랑을 일으켰다.
‘이건?!’
기천형이 연호정에게서 압도적인 위압감을 느꼈듯, 연호정 역시 황궁 서쪽에서부터 불타오르는 한 줄기 기세에 그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마기?’
번쩍!
기운을 느낀 순간, 저 머나먼 하늘 위로 핏빛 광채가 솟구쳤다.
쿠르르릉!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데도 마치 유성(流星)을 보는 듯했다.
소리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저 핏빛 유성이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순간 무시무시한 충격파로 인해 일대가 초토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유성은, 바로 이곳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연호정의 눈빛이 돌변했다.
‘빌어먹을!’
사락!
기우희의 옷깃을 잡아 자신의 뒤로 보낸 연호정이 월도를 사선으로 휘둘렀다.
백호공, 호왕구벽세였다. 새하얀 돌풍의 도기(刀氣)가 마구 이지러지며 열린 성문 안, 신화교도들을 향해 짓쳐 들었다.
기천형을 포함한 초절정고수들은 본능적으로 좌우로 몸을 날렸다. 그 뒤에 선 정예 고수들은 한 박자 느리게 움직였다.
콰아아앙!
휘몰아친 도기가 정예 고수 십여 명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는 황궁제 화포 두 문을 쓰러트렸다. 고수들이 몸으로 막지 않았다면 바퀴는 물론 포신에도 칼자국이 났을 것이다.
기우희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연 대수님!”
“빌어먹을! 협상 결렬이다! 지금은 이런 짓을 할 때가 아니야!”
연호정의 눈이 유성을 좇았다.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던 유성이 그 잠깐 사이에 거리를 삼 할이나 줄였다. 경공술의 경지도 대단했지만, 그만한 경공술을 받쳐 주는 마기의 농도가 실로 무시무시했다.
그때였다.
퍼어어엉!
저 멀리 어딘가에서도 화려한 불꽃이 치솟았다.
정확한 방위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곡경이 침투한 곳 너머에서 솟구친 것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불꽃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은, 유성처럼 날아오는 핏빛 마인의 기도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런 제기랄!!”
쾅!
엄청난 진각으로 힘을 받은 연호정이 유성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퍼어어어엉!
화포 이상의 폭음을 내며 쏘아진 적백(赤白)의 권풍이 유성에게로 날아갔다.
하지만.
‘……?!’
일직선으로 돌진해 오던 유성이 일순 버드나무처럼 휘어지며 연호정의 권풍을 피해 냈다.
실로 무시무시한 몸놀림이었다. 제아무리 무극의 고수라 해도 허공에서 저런 몸놀림을 보인다는 것은, 심지어 비슷한 경지의 고수가 휘두른 공격을 피해 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고수다. 나보다도 더!’
그리고.
콰아앙!
화려한 마기를 피워 올리며 성문 앞에 두 발을 디딘 짐승이 연호정을 보며 사납게 웃었다.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