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3화. 복마전(伏魔殿), 그리고 복마전(伏魔戰) (1)
“…….”
제칠 궁문 동성(東城)의 마루 위에서 어전을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신화교 화독비각(火毒秘閣)의 각주, 기천형이었다.
“……빌어먹을.”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린 그가 동문 밑으로 내려섰다.
후우웅.
기묘한 신법이었다. 두둥실 떠오른 채로 서서히 하강하는데, 마치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숲에서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스르륵.
가볍게 착지한 기천형이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온몸에 핏기가 없는 외눈의 여인이 있었다. 여인이지만 훤히 드러낸 양팔의 근육이 건장한 사내 못지않았다.
체구 또한 무척이나 건장했지만, 하나 남은 눈에 초점이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기천형이 외눈의 여인, 홍룡궁을 부축하고 있는 무사에게 물었다.
“상태는 어때?”
무사가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정신을 놨습니다. 이제는 물을 마시는 것조차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빌어먹을 년.”
성큼성큼 홍룡궁 앞으로 걸어간 기천형이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퍽! 퍽!
홍룡궁의 얼굴이 순식간에 퉁퉁 부어올랐다. 벌어져 있던 입과 코에서는 붉은 핏물이 쏟아졌다.
기천형이 버럭 외쳤다.
“정신 안 차려, 이 망할 년아!?”
홍룡궁이 흐릿한 외눈으로 기천형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서서히 고개를 내린 그녀가 무어라 웅얼거렸다. 알아듣기 힘든 소리였다.
한옆에 서 있던 화독비각의 부각주 요공이 한숨을 쉬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모양입니다. 내공도 완전히 뒤엉켰어요.”
“그건 보면 알아!”
“이제 그만…….”
“죽이라고? 물론 죽여야지!”
기천형이 주먹을 휘둘렀다.
빠각!
홍룡궁이 뒤로 튕겨 나가며 바닥을 뒹굴었다.
어찌나 옹골차게 후려쳤는지, 허공으로 부러진 이 몇 개가 튀었다. 살벌한 소리로 볼 때 광대뼈도 온전치 못할 것이다.
사아아악!
기천형의 몸에서 무서운 살기가 일었다.
“죽여도 그냥 죽이면 안 되지. 쳐 죽여야지.”
“각주님.”
“상관이 적에게 사로잡혔는데도 겁이 나서 달아난 년이야! 신화교의 말단 교도들도 안 할 짓거리를 홍룡에 속한 년이 한 거라고!”
기천형이 무사에게 소리쳤다.
“저년 똥통에 처박아 놔! 일 끝나면 그때 때려죽일 테니까!”
“예.”
무사가 홍룡궁을 들쳐 메고 북쪽으로 걸어갔다.
흥분해서 씩씩대던 기천형이 숨을 골랐다.
요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일까요?”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놈들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기우헌 부각주는 적에게 사로잡힐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 충성심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기천형 역시 요공의 말에 동의했다.
비록 꼴도 보기 싫은 놈이지만, 그 능력과 충성심만큼은 확실했다.
놈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시키는 일을 군말 없이 해 온 것도, 그가 언제나 신화교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극문을 연 고수의 살기 앞에서도 당당했던 놈이다. 적에게 사로잡히느니 그 자리에서 화정을 폭발시켜 자폭했을 것이다.
생각은 그렇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너도 느꼈었지?”
“예?”
“며칠 전 새벽 말이다. 어전에서 전투가 벌어지던 날.”
“…….”
“지금껏 기우헌은 궁내에 벌어진 모든 일을 홀로 처리했어. 그때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녀석에게는 확신이 있었을 거야.”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녀석은 실패했다. 놈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아. 녀석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
“죽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천형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의 그 살기를 정면으로 쬐었다면, 그대로 정신을 놔 버렸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 자폭할 틈도 없이 사로잡혔을 수도 있어.”
기천형과 요공은 물론, 내성 안쪽 곳곳에 포진해 있던 삼교의 고수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지독한 살기에 몸을 떨었었다.
그 살기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아무도 그 근원지를 확인할 생각조차 못 했을 정도였다.
비록 내성 안에 극문을 연 고수는 없었지만, 만만한 실력자도 없었다. 당장 기천형만 해도 기우헌만큼은 아닐지언정 어딜 가도 일문의 수장급 인사라 불릴 정도의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기묘한 살기에는 얼어붙고 말았다. 그날 그는 밤새도록 거처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러다 동이 트고 나서야 기괴한 살기에서 벗어나 움직일 수 있었다. 그것은 그만이 아니라 살기를 느꼈던 모두가 겪은 증상이었다.
‘도대체 뭐였지?’
그 정도 살기는 어디에서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교내 호법조차도 그만한 살기를 드러내진 못할 것이다.
‘뭔지 모를 환상까지 보았다. 형상이 분명하지 않은 괴물…… 팔과 얼굴이 여러 개였어.’
기천형의 눈이 흔들렸다.
그 살기가 주는 공포에서 벗어난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니 반사적으로 가슴이 떨려 왔다.
요공이 입을 열었다.
“아마도 사술의 일종이 아닐는지요.”
평소에 이런 말을 들었으면 고작 생각해 낸 게 그거냐며 면박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극문을 연 고수도 드러내기 힘든 살기를 광범위하게 발산했다면, 이쪽이 모르는 사술을 썼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교주님에 필적할 만한 고수가 어전에 있을 수도 있지.”
요공의 눈이 흔들렸다.
“각주님.”
기천형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리 교주님께서는 신인이시다. 광혈과 사음의 주인들이 아니면 누가 있어 그분의 경지에 도달했겠어.”
“…….”
“다만, 우리의 능력으로 어찌하기 힘든 뭔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
“신중해야 해.”
말을 하면서도 기천형은 좌절감을 느꼈다.
그는 언제나 신중함을 소심함으로 매도하는 사람이었다. 워낙에 다혈질인 데다가 생각하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한데 신중함이라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온갖 병력을 다 끌고 총공격에 나서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요공에게 물었다.
“호법께서는?”
요공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현재 외성 북부 삼참고(三懺庫)에 계십니다.”
기천형의 눈이 깊어졌다.
“아직이신가?”
“얼마 전 팽가 병력 백을 증발시킨 것으로 또 한 번 원정(原精)이 흔들리셨다고 합니다. 반나절 정도는 더 몸을 추슬러야 칠 할을 회복하실 것이고, 몸의 완성은……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젠장…….”
수십 년간 야금야금 황궁을 장악한 그들은 황궁 외성 곳곳에 비밀 거처를 만들어 놓았다.
그중 몇몇에는 각종 영약과 식량을 구비해 두었고, 몇몇에는 회복에 좋은 기물을 중심으로 온갖 주술을 걸어 두었다.
‘눈을 뜨신 지가 몇 년인데, 설마 이렇게까지 늦춰질 줄이야.’
물론 당초 예상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였다.
처음 ‘그분’이 이곳에서 회복을 시작하실 때는 이십 년을 보았다. 어차피 몇 년 안에 해결 볼 일은 아닌지라 다들 느긋하게 기다렸더랬다.
하지만 그분은 예정보다 훨씬 빨리 눈을 뜨셨고, 회복세 역시 예상보다 몇 배는 빨랐다.
하여 신화교도들은 기대했다. ‘그분’이 눈을 뜨시면 굳이 궁의 권력을 이용해 황궁을 뒤집어엎지 않아도 될 테니까.
어쩌면, 지금의 후계자들을 모두 제치고 차기 후계자로 내정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 회복세는 몸이 완성을 향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늦어졌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본래보다 십 년은 더 빨리 대계를 이룰 거라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와서 지지부진해진 것이다.
물론 며칠 전 태감이 황후를 축출하고 황궁의 남은 권력을 장악했다면 굳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방법이 없군.”
기천형이 눈살을 찌푸렸다.
“병력을 집결시켜라.”
“예?”
요공은 깜짝 놀랐다.
“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모아 놔. 팽가주 놈부터 만나겠다.”
어전에 모인 병력은 철저하게 농성 중이었고, 그중 팽무강이 이쪽과 몇 번이나 교섭을 벌였다.
팽무강은 교활한 교섭자였다. 그리고 기우헌을 잃은 이쪽의 대표자는 기천형이었다. 기천형은 적의 생각을 읽거나 판세를 보는 눈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은 이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불의 교도이자 무사였지만, 화운비각 출신들처럼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진 못했다.
“금군이 지니고 있는 소화총은 무시하지 못할 물건이다. 만약 전면전이 벌어지면, 우리 병력 몇백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어.”
“물론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금군의 소화총은 재장전에 시간이 걸립니다. 모든 것을 건 승부라면 우리의 압승일 겁니다.”
“잃지 않아도 될 병력을 잃을까 봐 이러는 것이다.”
이 또한 기천형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찝찝함에 자꾸만 자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일단 간다. 병력 집결해 놓고, 신호가 떨어지면 그 즉시…….”
그때였다.
삐이이이이익!
허공에서 귀청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천형과 요공이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멀리 남서쪽 성문에서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오고 있었다.
효시(嚆矢)였다. 적을 맞히고자 쏜 화살이 아니었다.
그런 화살이 줄을 지어 날아오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서른 발은 넘었다.
“뭐야!?”
어디에서 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언뜻 봐도 이삼백 장은 훌쩍 넘는 거리였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투두두두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온 효시들이 외성 곳곳에 산발적으로 떨어졌다.
기천형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파아아아악!
기천형이 단숨에 몇 개의 궁문을 가로질렀다.
그토록 대단한 신법을 갖고도 외성까지 가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정말이지 기가 질리는 너비였다.
“각주님!”
떨어진 효시를 쥔 교도들이 다급히 기천형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그거 뭐야? 어디서 쏜 거야?!”
“큰일 났습니다! 이걸 보십시오!”
교도가 건넨 서신을 펼친 기천형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야?”
“사, 사실일까요?”
서신을 와락 구긴 기천형이 다른 교도들이 내민 서신도 펼쳐 보았다.
똑같은 내용이었다. 필체는 제각각이었지만, 내용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부르르.
서신을 쥔 기천형의 손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할까요? 지금 외성 밖에 있답니다!”
“……!”
“각주님!”
서신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기천형이 버럭 소리쳤다.
“남은 홍룡과 비각 애들을 불러라! 사음과 광혈 놈들한테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라고 해!”
“예, 예!”
“그리고!”
화르륵!
서신을 불태운 기천형이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그 도사 놈에게도 말해 놔라. 그 망할 짐승 놈을 풀어야 할 수도 있다고.”
* * *
황궁은 너무 넓어서 그 안에 어떤 고수가 있는지, 얼마나 많은 고수가 포진해 있는지는 연호정과 곡경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가오는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온다.”
연호정이 곡경을 바라보았다.
곡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편에서 침투하겠다. 만약 무극의 기세가 느껴지면 그 즉시 날 도우러 와라. 최대한 빨리 죽여 버려야 해.”
“명심하겠소.”
파아아앙!
곡경이 성벽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다.
연호정은 기우희와 함께 남쪽 성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쿠구구구궁!
성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호정이 차갑게 웃으며 기우희의 목에 월도를 겨누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