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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761화 (761/963)

761화. 천도(天道)의 변화 (6)

두두두두두!

무서운 속도로 대지를 달리는 명마들의 두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잠 한숨도 제대로 자지 않고 하남을 통과해 하북에 진입했다. 선두에서 말을 모는 연호정의 얼굴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이봐.”

어느새 연호정 옆으로 말을 몰고 온 곡경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좀 쉬는 게 어때?”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묵비, 강량, 진양, 기우희의 얼굴이 차례로 보였다.

묵비는 그럭저럭 봐 줄 만했지만, 강량과 진양은 상당히 지친 기색이었다. 기우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서역인 특유의 하얀 피부가 아예 파랗게 질려 있을 정도였다.

연호정이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한 시진만 더 달립시다.”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곡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곡경 역시 황제가 걱정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 체력을 분배해야 함을 알고 있지만, 마음 같아서는 진즉에 신법을 펼쳐 황궁에 도달했을 것이다.

기실, 본래 곡경의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함께 말을 모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 시진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말들의 입가에 거품이 일었다. 그러고도 출발했을 때와 비교해 조금도 속도가 줄지 않았다. 과연 명마는 명마였다.

연호정이 월도로 작은 야산을 가리켰다.

“저기서 잠시 쉽시다.”

잠시 후.

“크허억!”

말에서 내린 강량이 대놓고 바닥에 너부러졌다.

진양은 콜록대며 엉덩이를 두들겼고, 기우희는 얌전히 앉았지만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연호정이 진양에게 말했다.

“수고스럽겠지만 마을로 내려가서 말들이 먹을 건초 좀 잔뜩 구해 와 줘.”

“젠장, 알겠수.”

투덜대면서도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역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묵비가 말했다.

“내가 다녀올게요.”

“아니, 너는 나와 먼저 가야 해.”

“네?”

연호정이 진양에게 말했다.

“네가 돌아올 때쯤 우리는 여기 없을 거다. 개방에 따로 연락을 취해 놨으니 천천히 뒤따라오면 될 거야.”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구만. 일단 알겠소.”

“그래, 미안하다.”

진양이 피식 웃었다.

“이런 일로 대장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 아니라고 알고 있소.”

그 말을 끝으로 진양이 순식간에 야산을 타 내려갔다.

연호정이 기우희 앞에 앉았다.

“괜찮아?”

“네? 아, 네.”

대답은 그리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이 중 제일 약하다지만 엄연히 초절정고수인 강량도 지쳐서 너부러지는 판에, 그녀가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라 할 만했다.

연호정이 기우희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평소라면 괜찮다고 했을 그녀도 지금은 제법 고됐는지 가만히 있었다.

우우우우웅.

사신기가 그녀의 몸 곳곳을 파고들었다.

극도로 지친 근육을 어루만지고 허해진 오장육부에 기운을 북돋웠다. 신경도 어느 정도 풀어 주었으니, 온전한 상태는 아니라도 숨은 돌릴 만할 것이다.

잠시 후, 기우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 좀 괜찮냐?”

“네, 고마워요.”

“고맙긴. 내가 미안하지.”

기우희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하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피식 웃은 연호정이 일어나 곡경을 보았다.

팔짱을 낀 곡경은 북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연호정이 옆에 서자, 곡경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언제 출발할 생각이냐?”

“이각만 더 쉽시다.”

“이각…….”

곡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적당하군.”

가만히 곡경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을 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런 말을 하기에는 너무 강행군 아니었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곡경 역시 피식피식 웃었다.

“황궁 정보단에서 연락을 받았다.”

“나도 아오.”

“언제 봤냐?”

“달리는 와중에 은밀한 기척을 느꼈소. 대단한 수준이더군.”

“그렇게 미쳐서 달리는 중에도 용케 느꼈군. 하긴, 네놈 수준이라면 당연한가.”

곡경이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황궁의 정보력은 맹부나 개방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어. 하지만 적어도 하북과 산동 지역에서만큼은 그들 이상이다. 빠르기도 엄청 빠르지.”

“그렇겠지.”

“반나절 전에 정보가 왔으니 이틀 전 일이겠군.”

“무슨 말이오?”

“이틀 전에 황궁에서 난이 터졌다.”

“……?!”

“물론 반란이 일어났다거나 황궁 곳곳이 불바다가 되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어. 다만…….”

“다만?”

“우헌 태감이 죽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곡경이 쓰게 웃었다.

“너희 가문에 이래저래 빚을 지는군.”

“그럼?”

“그래, 태감을 죽인 사람은 강동 연씨가문의 수장이라고 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어지간히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야. 어전에서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는군.”

연호정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랬단 말이지.”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곡경이 고개를 저었다.

“무극을 열고 하늘을 거니는 놈이 그런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다.”

“내 표정이 어때서 그러는 거요.”

“네 부친이 공을 세운 게 그리도 기쁜 거냐?”

“공은 누구나 세울 수 있소. 그런 걸로 기뻐하기에는 천하가 너무 어지럽지 않소?”

“그럼 왜 그리 기뻐하는 거야?”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잘 계시는 것 같아서 말이오.”

“너 같은 냉혈한도 혈육 귀한 줄은 아나 보네?”

“냉혈은 선배가 더 냉혈이지.”

“지랄하네.”

이런저런 일을 겪어서 그런지, 두 사람은 제법 친해 보였다.

비록 황제 휘하에서 움직인다지만 곡경은 연호정에게 있어 분명한 아군이었고, 곡경 입장에서도 연호정은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호정 손에 비왕이 죽었고, 그 부친이 태감을 죽이지 않았는가.

두 사람의 사이가 눈에 띄게 가까워진 이유였다.

“너도 푹 쉬어라. 네놈 성향을 보아하니 최전방에서 어지간히 날뛸 텐데, 앞으로 쉴 시간도 없을 거야.”

“알겠소.”

곡경이 허리를 두들기며 강량 옆에 앉았다.

강량이 움찔했다.

곡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뭐?”

“……아닙니다.”

“찝찝하냐? 내 악명 때문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한테는 엄청난 선배님이십니다. 제가 흑도 명문 출신 아닙니까.”

“새끼, 네가 연호정 저놈보다 귀여운 맛은 있네.”

“켁!”

“칼질은 좀 하냐? 보아하니 기본기는 잡힌 것 같다만.”

“나중에 기회 되면 가르침 좀 내려 주십시오.”

“뻔뻔한 새끼. 나 같은 고수한테 가르침 한 번 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후배잖아요.”

“넉살 좋네?”

“사람 따라 다르지요.”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연호정 역시 북서향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곡경의 말을 듣자 한결 안심이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뵙지 못했어. 하지만 무극의 고수가 아닌 이상 아버지를 당해 낼 자는 많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탁무자와의 길고 길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세상사 이렇게도 흐르고 저렇게도 흐르는 법이지. 우리 도사들이야 그렇게 속 편하게 살고는 있다만, 솔직히 부끄러울 따름이야. 고생하는 사람이 그리 많은데, 나는 이곳에 처박혀서 한 발자국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으니.’

‘차라리 통천진인을 찾아가는 건 어떻습니까?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노선배가 작정하고 잡으려 들면 못 잡을 것도 아닐 텐데.’

‘……그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니지.’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다만, 고생하는 사람들이 눈에 밟히기는 해도 아직까지 천도(天道)가 뒤틀린 것 같지는 않아.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바꿔 말하면, 천도가 뒤틀릴 것 같으면 그때는 나서실 거란 뜻입니까?’

‘그 전에 나서야겠지.’

‘…….’

‘네 녀석에게는 미안할 뿐이다. 초장에 이런저런 말은 많았지만, 네가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모르지 않아. 그것도 일신의 영달이 아니라 이 중원 천하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도 잘 안다.’

‘할 수 있으니 하는 겁니다.’

‘능력이 안 돼도 뛰어다녔을 거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

‘…….’

‘황궁으로 가라.’

‘그럴 생각이긴 했습니다만…… 갑자기 어찌 그러십니까?’

‘뭐가?’

‘왠지 황궁으로 가는 걸 떨떠름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서요.’

‘내가 언제, 인마. 오히려 가라고 등 떠밀 생각이었다.’

‘그렇습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 젊고 힘 넘치는 녀석이 부친을 도우러 가야지 누가 갈 거야? 아버지의 전장? 헛소리다. 혈육 역시 천도의 일부야. 부모가 자식 생각하는 것처럼, 자식이 부모 생각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순리이기도 하지.’

‘…….’

‘당분간 네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네 눈에는 정(情)이 있어. 살벌한 세상에서 살아가겠지만, 지금 네가 보여 주는 그 마음만은 잘 지켜 내기를 바란다.’

‘말씀 감사합니다.’

‘이왕이면 빨리 가는 게 좋을 거다. 황궁은 또 하나의 복마전이야. 네 부친의 무공과 기지가 아무리 대단해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게 황궁이야.’

‘알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내게 약간의 시간을 다오.’

‘왜 그러십니까?’

‘네 녀석 일행, 상단전이 활짝 열린 그 아이를 위해 구결 하나 써 주려고 그런다.’

‘구결이요?’

‘당장 효과를 보는 건 아니지만, 자주 외우고 익히다 보면 자연스레 상단전의 방벽이 튼튼해질 게다. 지금의 나는 불가능하지만, 그 아이는 충분히 가능할 거야. 그쪽으로 재능이 있어 뵈더군.’

‘감사합니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야. 그 아이가 딱해서 그러는 거야.’

‘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밤에는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마. 나 때문에 시간 잡아먹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좀 귀찮은 순간은 있었지만, 좋은 만남이었어요.’

‘……너 진짜 재수 없는 거 아냐?’

‘자주 듣습니다.’

‘내 제자 성격까지 물들이진 마.’

‘뭐, 자기가 알아서 하겠죠.’

‘킁.’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또 뭡니까?’

‘…….’

‘노선배님?’

‘이 세상은…….’

‘……?’

‘이놈의 세상은 참으로 묘하다. 사마외도가 득세할 것 같으면, 저 신묘한 천도는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또 다른 무언가를 끄집어내지.’

‘…….’

‘너도 그와 같다.’

‘……?!’

‘당금 무림이 아무리 전성기라 한들, 그것은 우리 땅에서나 통하는 거야. 당장 삼교만 해도 중원의 전력 이상이 아니더냐?’

‘…….’

‘그래서 이 땅은, 이 대륙은 너 같은 괴물을 만들어 냈나 보다. 그리고 그것은 너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

‘또 다른 대항마들을 하나둘씩 꺼내 들기 시작할 거야. 네 녀석이 가장 먼저 났으니, 앞으로 등장할 대항마들과 함께 천도를 지켜 내 보도록 해라.’

‘어려운 말씀이로군요.’

‘하던 대로 하면 돼. 너는 충분히 잘 가고 있다. 그냥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

‘흑도로 가든 백도로 가든, 아니면 둘 다 안고 가든 내 제자는 잘 챙겨 주길 바란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천도라…….”

그때, 연호정 옆으로 묵비가 다가왔다.

“갑자기 천도라니요?”

연호정이 묵비를 바라보았다.

묵비가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아니야.”

“뭔데요?”

“그냥, 너도 대항마 중 하나일까 싶어서.”

“대항마요?”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푹 쉬자. 하북으로 들어가면 쉬고 싶어도 못 쉬어.”

이각 후.

기우희를 업은 연호정과 곡경, 묵비와 묵룡대가 야산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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