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60화 (760/963)

760화. 천도(天道)의 변화 (5)

시간이란 그저 나아갈 뿐이다.

늦출 수도 없고 멈추지도 않는다. 각자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다를지언정, 앞을 향해 부단히 굴러가는 시간의 수레바퀴를 잡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세상은 시대를 만들고, 만들어진 시대는 시간의 수레바퀴로 인해 구시대라는 이름으로 역사가 된다.

그렇게 나타나는 새 시대, 새로운 세상.

시간이라는 절대적 진리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강호 무림에, 한 줄기 폭탄 같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의 시작은 사천에서부터였다.

모종의 집단으로 인해 대란(大亂)이 터진 사천당가는 반역도들로 인해 홍역을 치렀고, 큰 피해를 감수한 끝에 난을 잠재웠다.

그리고 그 안에 한 명의 고수가 있었다.

서른의 나이에 정식으로 출사하여 최고의 후기지수가 된 모용가의 무인과 함께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었던 호장(虎將).

당가의 가주 당관과 함께 내란을 잠재우고, 인간으로 태어나 하늘에 도달한 마(魔)의 절대고수를 죽인 천재 무사.

그 무사는 사천을 떠나 섬서에 이르렀고, 그곳에서도 놀라운 활약을 했더랬다.

종남 전쟁.

그 전쟁에 이르러 광신삼교라는 모종의 집단이 존재함을 만천하가 알게 되었다.

암암리에 퍼진 소문이 아니었다. 신화교, 사음교, 광혈교라는 각각의 이름은 물론, 그들 하나하나가 중원 무림과 일전이 가능한 수준의 놀라운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세상에 알려졌다.

그 소문이 이렇게 빨리, 그리고 확실하게 퍼지도록 이끈 주체가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누군가는 개방이라 했고 누군가는 묵룡부라고 했지만, 기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중원의 절반 이상이 모르고 있던 외세의 존재가 완전히 수면 위로 드러났다는 사실.

그리고 그 외적들과 수년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워 온 희대의 협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종남 전쟁에서, 무극을 개방한 적측의 절대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 또한 알려졌다.

성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아도 무극을 열었다는 것 자체가 천지가 뒤집힐 일이었다. 무극을 열었다는 것은 곧 인간의 몸으로 재해와 같은 힘을 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천재 무사’는 이번에도 적측의 절대고수를 죽이고 전장의 판도를 뒤바꾸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천재 무사의 무력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천재 무사는 아직 이립에도 이르지 못한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천재가 많고 괴물이 많다지만, 무극이라는 영역은 재능이 있다고 도달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다. 재능만으로 도달할 수 있었다면 족히 수백 명이 무극을 열었을 것이다.

하물며 성천의 강자들 역시 희대의 재능을 타고난 괴물 같은 이들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삼십이 안 된 나이에 무극을 열지 못했다.

하여 사람들은 무언가 술수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리 강한 적들을 제거했으니 충분히 대단한 위업이었다.

하지만 천재 무사에 관한 소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비왕 공손백룡.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제일을 논하는 경공술의 대가로, 그 무력은 삼군과 동급으로 취급되지만 절대의 속도를 손에 넣었기에 신선제왕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 성천의 고수.

그가 강호 무림에 적을 둔 괴짜가 아닌, 외세인 삼교 소속이라는 충격적인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그 소문은 이내 진실로 판명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개방의 용두방주가 그것을 사실이라고 공표한 것이다.

천하가 충격에 빠졌다.

성천십삼좌는 강호 무림의 자랑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신앙으로 분류되었고, 누군가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절대고수 중 하나가 대륙을 손에 넣으려는 외적들과 한배를 탔다 하니, 이처럼 경악스러운 소문도 달리 없을 것이다.

성천의 신화. 불변의 하늘.

그 하늘에 붉은색 붓 자국이 그어졌다.

사람들은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누군가는 용두방주의 말조차 거짓이라고 떠들어 댔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드러난 진실을 외면할 수는 있을지언정 거짓으로 매도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세인들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천지가 뒤집히는 소문이 또 한 번 천하를 강타했다.

천재 무사, 벽산의 호장.

강동의 호랑이로 불리던 젊은 고수가 비왕 공손백룡까지 처단했다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은 공손백룡의 정체보다도 훨씬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제아무리 공손백룡이 외적과 한패였다고 한들, 그의 무공은 진짜였다.

순수 무력만도 낮게 잡아 봐야 삼군과 동급이다. 그리고 삼군 역시 성천십삼좌이며, 반 수 차이든 한 수 차이든 그들의 대단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무극을 연 것과 성천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그야말로 천지 차이인바.

연달아서 터지는 충격적인 소문에 세인들은 점차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세인들은 세 개의 사실을, 현실을 분명하게 받아들였다.

첫째, 중원은 더 이상 평화롭지 않다.

언제나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무림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한데 똘똘 뭉쳐도 이기기 힘든 적들이 새외에서 버젓이 눈을 치뜨고 있다. 더는 중원 내 주도권 싸움에 목을 맬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누구도 쉽사리 믿을 수 없다.

신앙처럼 떠받들어지는 성천십삼좌에도 적의 간세가 있었다. 온 천하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파가 있으니, 실로 많은 곳에서 적의 간자들이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종남 전쟁, 사천대란 등등은 고작 몇 년 준비해서 터질 만한 일이 아니었다.

못해도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천문학적인 자금력과 소름 끼치는 계책으로 무림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을 것이다.

충분한 힘이 있어도 완벽한 승리를 위해 인내하는 적들.

사람들 사이에 주변에 대한 불신과 광신삼교에 대한 공포가 슬금슬금 번져 나갔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강호 무림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 세상은 감당키 힘든 적들 앞에서도 새로운 힘을 가져다주었다.

무림맹이 그러했고 묵룡부가 그러했다. 단순한 권력 집단이 아닌, 적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령부(司令部)들이 생겼으니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고수까지.

세인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인 세 번째 진실은 바로 호장의 무공이었다.

벽산호장 연호정.

강동 연씨가문의 장자로 태어나 강력한 무공과 거침없는 과단성, 뛰어난 두뇌를 바탕으로 순식간에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게 된 기린아.

무림에 출사한 후 수년이 지난 지금,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던 연호정은 이제 그조차도 뛰어넘어, 진정 천하제일을 논하는 절대자들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제는 나이가 어리다고 얕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오히려 젊기에 더더욱 높이 평가받아야만 하는 신인(神人)이 등장한 것이다.

패왕(覇王) 연호정.

백도의 명문, 육가의 일원에게 붙은 별호라기엔 지나치게 거칠고 사나운 명칭이었다.

하지만 출사 이후 연호정의 행보를 살펴보면, 그처럼 어울리는 별호도 달리 없었다.

시대의 패자(霸者)라서 패왕이 아니다. 강호 무림을 위해서라고는 하나 그가 구현하는 무공과 독하기 그지없는 손속, 순식간에 싸움을 평정하여 강제로라도 상황을 바로잡는 무지막지한 성향이 그를 패왕이라고 불리게 만든 것이다.

패도의 왕, 패왕.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괴력의 무공, 어떤 전장에서도 패배한 적이 없는 무적의 승부사.

비왕 공손백룡이 차지하고 있던 왕의 자리에, 비로소 벽산의 호장이 들어가 앉았다.

어느새 먼지가 쌓인 구시대를 밀어내고 새로운 시대의 선두 주자가 된 절대고수.

광신삼교를 향한 공포를 단숨에 희석시키는, 새 시대의 상징이 태어난 순간이었다.

* * *

“패왕이라…….”

화진천이 쓰게 웃었다.

“거 더럽게 오만한 별호로고. 하지만 어인 일인지 그놈과 어울리긴 하는구먼.”

“그러게나 말입니다.”

두툼한 문서 뭉치로 부채질을 하는 가득상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온 천하를 뛰어다니다가 급하게 스승을 만나러 온 길이었다. 제아무리 놀라운 경공의 소유자라지만, 며칠 밤을 꼬박 새우고 뛰어온 길이라 죽을 맛이었다.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거다.”

“저는 재미없어요. 근데 뭐가요?”

“연호정 그놈에 관한 소문을 낸 건 우리지만, 그놈에게 별호를 붙여 준 건 세상 사람들이야.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의외로, 마치 직접 본 것처럼 타인을 정확하게 정의 내리고는 하지.”

“음.”

“패왕 연호정…… 패왕…… 쩝, 왠지 좀 불길한 별호로군. 그놈 말년에 칼 맞고 뒈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무림인 중에 칼 안 맞고 자연사하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것도 그렇다만.”

“게다가 그 양반 때문에 독으로 고생한 분이 뭐 하러 걱정까지 해요?”

“새끼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솔직히 정은 안 가지만, 그 자식 아니었으면 지금쯤 대륙이 절단 났을 수도 있어.”

가득상이 씨익 웃었다.

“이제야 사부님도 그 양반의 진가를 알아주는군요?”

“왜 네놈이 기뻐하는 거냐? 좋아하냐?”

“좋아하죠.”

“소름 끼치는 새끼.”

“됐고, 일단 일 얘기부터 하시지요.”

“말 돌리는 거 봐라. 이제는 제법 여유가 생겼다 이거냐?”

“안 바쁘십니까?”

화진천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리 바쁜 와중에도 묘하게 여유가 느껴지는 제자의 모습, 이제는 정말 방주직을 넘겨줘도 될 것 같았다.

가득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황궁이 난리입니다. 아시지요?”

“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산동성 덕주였다. 덕주는 하북과 지척이었다.

“팽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우헌 태감, 아니 신화교의 간자를 제거하고 몇몇 고수들을 죽였다고요.”

“그리고 무림맹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지.”

“다 아시네요?”

“넌 언제나 이 사부보다 한발 늦구나.”

“여하간 일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황궁은 무림보다 더한 복마전이에요. 지금 황궁에 적의 간자들이 얼마나 숨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가득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마 절대고수 한둘 정도는 있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연 대수가 황궁으로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양반 혼자서는 안 될 겁니다.”

“정면 승부로 비왕까지 꺾은 인간인데?”

“제가 그 양반이랑 친하긴 한데, 냉정하게 보면 아직 왕의 칭호를 받을 만한 무력은 못 될 겁니다. 원체 싸움에 능해서 어찌어찌 성천에 이름을 올렸다지만, 분명 부족해요.”

“그걸 네놈이 어떻게 알아?”

“안 봐도 아는 게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 양반한테 패왕이라는 별호를 붙여 준 것처럼.”

“잘나셨어, 정말.”

“농담은 그만하시고, 어쩌실 겁니까? 아무리 많은 병력을 동원해도 동등한 고수가 없으면 위험합니다. 최악의 경우, 어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튈 수도 있어요.”

화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위험이 다분하지.”

“어쩌시렵니까?”

“어쩌긴 뭘 어째? 내가 연락한다고 그 엉덩이 무거운 성천들이 옳다구나, 하고 황궁까지 오겠어?”

“안 오면 매장을 시켜 버려야죠, 싹바가지 없는 인간들 같으니.”

“……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어.”

“알아요.”

“일단은 기다려 보자.”

“기다리라니요? 한시가 다급한 순간인데!”

“이 새끼가 기다리자면 기다리지 뭐 그리 말이 많아.”

화진천이 눈을 감았다.

“연호정 그놈과 곡경이 함께 움직이고 있어. 최악의 상황은 생기지 않을 거다.”

“사부님!”

“섣불리 성천급 병력을 데리고 오면 일이 더 커져.”

“…….”

“조금만 기다려라. 수는 생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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