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54화 (754/963)

754화. 가면 쓴 용 (4)

“……?!”

팽무강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팽무강에게 사로잡혀 있던 황보적은 물론, 비수 두 자루를 쥐고 주변을 경계하던 제갈아연의 표정 역시 바뀌었다.

‘이건?’

세 사람의 눈이 일제히 어전 방향을 향했다.

화아아악.

실제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높게 솟은 거대한 궁의 지붕 위로 시뻘건 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어디선가 거대한 산불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세상이 붉어진다.

실제가 아니다. 실재(實在)하지 않는 색이요, 광경이었다.

하지만 중원 기공술에 능통한 세 고수의 눈에는 그것이 명백히 보였다. 특히나 근래 깊은 학식과 지혜를 연마하여 상단전의 크기를 크게 키운 제갈아연의 눈에는 그 붉게 물든 하늘이 마귀의 얼굴처럼 보일 정도였다.

더없이 뜨겁고도 사납고, 더없이 사악하고 음험한 불길.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화마(火魔)가 극단적인 악의를 품고 강림한 것만 같다.

“팽가주님!”

“나도 알고 있다!”

팽무강이 황보적을 내려다보았다.

“자네도 느꼈겠지?”

“……설마 연가주요?!”

팽무강이 버럭 소리쳤다.

“이제 정신 좀 차려, 이 벽창호 같은 놈아! 저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기운이 어찌 연가주의 내공일 수 있겠는가!”

“……!”

“우헌이다! 강호 무림과 황궁을 농락하고 대륙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놈들! 그중 신화교라는 종교에 몸을 담은 우헌 태감이 본색을 드러낸 것이야!”

황보적의 눈이 흔들렸다.

팽무강이 천인장을 바라보았다.

“전원 그 무기를 내려라! 지금 당장 어전으로 향해야 한다!”

천인장의 눈이 흔들렸다. 강단 넘치는 그로서도 고수들의 심상치 않은 반응 앞에서 당황을 금치 못했다.

팽무강이 재차 외쳤다.

“황보적!!”

황보적이 눈을 질끈 감았다.

“현 시간부로 금군은 전원 어전으로 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 폐하의 안위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금군 전체가 고개를 숙였다.

“장군의 명을 받듭니다!”

툭!

팽무강이 황보적을 밀어젖혔다.

황보적이 외쳤다.

“내 내공을……!”

순간 황보적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봉인되었던 내공이 어느새 완전한 자유를 찾은 것이다.

황보적이 놀라든 말든, 팽무강은 즉각 문석 앞에 도달했다.

“어전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소! 황후 폐하 역시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 금군과 함께 어전으로 오시오!”

확 달라진 말투였지만, 문석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님을 알았다.

“전원 어전으로 간다!”

팽무강이 제갈아연에게 말했다.

“무조건 내 뒤를 따라오거라!”

“네!”

파아아아앙!

그 누구보다도 빨리 어전으로 달려 나가는 두 사람.

팽무강의 얼굴에 초조함이 어렸다.

‘연가주!’

* * *

푸스스스!

사방으로 번지는 기괴한 아지랑이.

그 아지랑이는 딱히 문제 될 게 없었지만, 기우헌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열기만큼은 분명 위험했다.

훅!

재빨리 황후 곁으로 다가온 연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우우우웅!

“꺄아아악!”

황후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연위는 일국의 국모가 치욕을 느낄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양손으로 내공을 조절, 손도 대지 않고 황후를 허공에 띄운 연위는 단숨에 그녀를 황제 옆으로 보냈다.

스르륵.

가볍게 용상 옆에 앉게 된 황후의 표정은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한 듯 보였다.

‘음.’

연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화아아악!

기이한 아지랑이로 온몸을 감싼 기우헌의 몸에서는 그간 꾹꾹 봉인해 두었던 압도적인 화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 열기가 너무 과해서 호흡조차 제대로 되지 않을 지경이다. 이대로 가다간 내공의 발산만으로 어전 전체가 불타오를 수도 있겠다.

그 전에, 황제와 황후의 옥체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다분했다.

연위의 검첨이 기우헌을 향했다.

퍼어어어어엉!!

일순간 터져 나온 무시무시한 검력(劍力)이 포탄처럼 쏘아져 기우헌의 몸을 날려 버렸다.

그대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기세로 내친 검격이었지만, 연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기우헌은 죽지 않았다고.

그것은 날아가던 기우헌의 육신이 어전 밖, 어도(御道) 부근에서 둥실 떠오른 채 멈춰 선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연위가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황제와 황후를 향해서였다.

“악적을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악적을 처리하기 전에 황제와 황후의 안전부터 챙기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연위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기우헌부터 잡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황후가 다급히 입을 열려 할 때.

“천자의 자리가 용상이라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응당 이곳이 아니겠는가?”

어쩐지 황제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나오는 듯했다.

“수십 년을 죽은 것처럼 지냈거늘,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아무 일도 아닐 터. 그대는 그대의 검으로 천좌의 주인에게 범한 무례를 씻도록 하라.”

연위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스르르르륵.

쪼개진 어전 문밖.

하나둘씩 모여드는 불꽃의 마인들이 있었다.

어도 중앙의 허공에서 여전히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는 희대의 악적. 그리고 그를 향해 모여드는 짐승과도 같은 화마(火魔)의 악귀들.

가만히 그들을 둘러보던 연위가 이내 버럭 소리쳤다.

“일국의 주인께서 머무시는 곳에 흉심을 숨기고 기어들어 와 천하의 법도를 어지럽힌 대죄인을 벌하겠다!”

쩌어어어어엉!

그동안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연위의 무시무시한 사자후(獅子吼)였다.

불가의 신공을 연성하지 않았는데도, 연위의 외침은 매서운 위력을 발하고 있었다. 일갈에 실린 내공보다 그 안에 담긴 진심과 협의가 더 엄청났다.

어도를 향해 다가오던 신화교도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움찔하며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번쩍!

피어오르는 검극사기.

역대 연가의 무사들을 통틀어 검극사기를 이 정도 경지까지 연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위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진청색 검극사기는 그의 전신을 휘감은 것도 모자라, 어전의 기와를 넘어 궁의 첨단부까지 닿았다.

화아아아아악!

영롱하고도 압도적인 자태였다.

일신의 무력이 무극에 도달하지 않아도, 평생을 가다듬어 온 정통의 무공과 금강석보다 단단한 정심(貞心)이 여기에 있다.

그 비할 데 없는 강인한 마음이, 주인이 품은 진기를 극단적으로 강렬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오직 세상을 지키겠다는 신념하에 분연히 검을 들고 황궁까지 찾아와, 목숨을 걸고 직언까지 가한 강호제일의 판관검(判官劍)이 완벽하게 개화하는 순간이었다.

훅!

그 타오르는 불꽃보다도 더 사납고 순수한 청색의 기파 앞으로.

마치 운명의 대척점에 서기라도 했다는 듯, 모든 아지랑이를 벗어던지고 진짜 모습을 드러낸 기우헌의 모습은 이전과 판이했다.

화르르르륵!

연위의 진청색 기파가 역류하는 물살처럼 신비로웠다면, 기우헌이 발산하는 황금빛 기파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그 자체였다.

구부정했던 허리가 펴지고, 하의를 제외한 모든 의복이 불살라져 본래의 육신을 드러냈다.

하얗기 그지없는 피부. 그러나 그 아래에 드러난 육신은 완벽하게 가다듬어져 있었다.

매서운 화기에 불타 버린 신발은 재가 되어 흩어졌고, 그대로 드러난 맨발 양옆으로는 황금빛 화기 네 개가 수레바퀴의 형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봉신의 전설 속 보패 영주, 민간 최고의 영웅신으로 떠받들어진 신장(神將) 나타삼태자(哪吒三太子)를 보는 듯했다.

아니, 보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영락없는 나타였다.

키이이이이이잉!

기우헌의 오른손 밑으로 또 다른 바퀴 모양의 거대한 금빛 칼날이 드러났다.

어디서 어떻게 꺼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를 형상화하여 만든 조화가 아니라 분명하게 실재하는 병기였다.

마치 건곤권(乾坤圈)과 같은 모양새. 어느새 원형의 칼날 안쪽, 손잡이를 쥔 기우헌의 눈빛은 시뻘겋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기어이, 네놈이 일을 그르치는구나.”

기우헌의 모습은 처음과 무척 달랐다.

태감이었을 때의 외양은 언뜻 보아도 오십이 훌쩍 넘은 초로의 그것이었는데, 지금 그의 얼굴은 중년에도 이르지 못한 사내처럼 젊기만 했다.

“대계는 진즉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더 손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었거늘, 네놈 하나로 인하여 본교의 교도들이 더 심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

기우헌이 미소를 지었다.

하얗게 드러나는 치아, 인간의 이가 아니라 맹수의 이빨을 보는 듯 송곳니가 유독 길고 날카로웠다.

“너만 아니었다면 비루한 인생이나마 천수는 누렸을 것인즉, 금일 너희의 국주(國主)와 국모(國母)가 불타 사라지는 것은 오롯이 너의 잘못이니라!”

“그 썩은 내 나는 입 다물어라.”

기우헌의 기파는 연위에 비해 모자람이 없었다. 아니, 방대하게 넘쳐흐르는 내공과 사납게 일렁이는 살기만 보면 천하의 연위도 십 합을 넘기기 힘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연위는 기우헌 앞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기파는 사납지만, 그것만으로 승패가 나는 것은 아니다. 내공과 진기의 사나움에서는 밀릴지라도, 그간 쌓아 온 지고의 무(武)와 깨달음은 연위의 귓가에 절대 질 리가 없다고 속삭여 주고 있었다.

더 이상 차오를 데가 없을 만큼 꽉 차오른 자신감, 승리를 향한 신앙.

지금 이 순간 정(正)과 의(義)의 화신이 된 연위는, 부처의 수행을 방해했다던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주인이 온다 한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연위의 동공이 완전히 파랗게 물들었다.

“네놈들 중 누구 하나도 살아서 황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멍청한 놈!”

번쩍! 티이이이이이잉!

번개처럼 날아간 건곤권이 연위의 검에 막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검극사기가 충만하게 담긴 검이 아니었다면 검이 부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연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뒷짐을 쥔 왼손, 자연스레 땅을 밟은 두 발.

고요하게 내린 철검 주변으로 진청색 검극사기가 심상치 않은 예기를 자아냈다.

기우헌의 눈이 번뜩였다.

“물러나라!”

“참(斬).”

파바바바바박!!

참이라는 한 글자와 함께 십 장 거리를 돌파하는 여덟 개의 거대한 검기가 있었다.

기우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촤아아악!

그를 향해 다가오던 교도들 중 여덟 명이 세로로 쪼개져 버렸다.

쏟아져 나오는 대량의 선혈이 그들 자신이 피워 올린 화기로 고스란히 증발해 버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기우헌조차도 연위의 팔검기(八劍氣)가 너무 빠르고 많아서 대응할 시기를 놓쳐 버렸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다가오던 교도 중 가장 쓸 만한 것들 열둘 중에 여덟이 죽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가 삼대검법 중 하나, 군자팔검세(君子八劍勢)였다. 그 자신을 세상의 기둥으로 삼아 다가오는 모든 적의를 무마시킨다는 군자의 검법이었다.

그러나, 연위의 이번 공격은 군자의 검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살벌했다.

“역적은 목을 내놓을 준비가 되었느냐?”

“제법이구나. 몇 합 안에 눌러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이거 꽤 긴 싸움이 되겠어.”

“착각지 말라. 이것은 싸움이 아니다.”

연가의 삼대검법은 하나같이 희대의 절기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철검대연삼십육식(鐵劍大衍三十六式)은 그 위력은 평이하나 천하 모든 검의 이치를 담아낸 무공이고, 군자팔검세는 막강한 검기(劍氣)로 적을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무리가 인상적인 검예였다.

그리고 마지막 검법.

연위의 조부, 전전대 연가의 가주가 올바름만으로는 악을 교화시킬 수 없음에 절망하여 군자팔검세를 기반으로 만들어 낸 연가 최악의 살인검.

“사냥이지.”

화아아아악!

진청색 검극사기가 왠지 모르게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정명하고 엄했던 연위의 표정도 왠지 날카롭고 사납게 변한 듯했다.

“내 오늘, 역적들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짐승으로 돌아갈 것이다.”

울컥!

검을 쥔 연위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연가의 마지막 삼대검법.

아수라팔검(阿修羅八劍)의 현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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