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9화. 피 묻은 황좌(皇座) (10)
훅!
연위의 신법은 무섭도록 빨랐다.
빠르지만, 그냥 보다 보면 또 그렇게 빠른 것 같지 않기도 했다.
더 빠른 속도를 얻기 위한 과장된 동작이 전혀 없다. 필요한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최고급에 달한 경공술을 보여 준다.
‘이것이다.’
어전으로 들어가 진짜 역적을 잡기 위한 일.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와중에도 연위의 몸은 밸 대로 밴 깨달음을 끊임없이 복구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수련한다는 마음가짐을 넘어섰다. 몸이 알아서 깨달음에 녹아드는 동시에 그것을 분석하며, 더 깊은 경지를 탐색하고 있다.
무림맹에서 정해진 시간, 정해진 강도의 수련을 끝낸 뒤 어제의 단련을 오늘 개화시킬 수 있도록 극단적으로 몰아붙였던 것이 빛을 발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구나.’
다급하기 그지없는 순간임에도, 연위의 눈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제고 반드시 올라가야만 하는 그곳을.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올라가야 하는 비천(飛天)이 연위의 심신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보보(步步)마다 무(武)의 숨결이 묻어 나온다. 보는 것이 곧 깨달음이요, 듣는 것 모두가 더 합당한 무학의 길을 제시한다.
닿는 곳마다 반 치의 깊이를 더하며, 결국 이르는 곳은 지금껏 한 번도 도달해 보지 못한 무(武)의 심해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저 멀리서 시퍼런 불꽃을 쏟아 내는 고수 몇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신화교의 고수들이었다. 어느 정도의 실력자들인지는 한눈에 보였다.
연위의 기감은 그것을 찰나지간 파악했고, 몸은 이미 대응 준비를 끝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더 깊은 심해의 무를 향했다.
이 상황, 이 싸움에 완벽하게 집중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강했다.
퍼어어엉!
쏘아지는 불덩이가 연위를 스쳐 지나가며 땅을 폭발시켰다.
일순간 치솟는 불길이 무시무시했다. 순간 호흡이 안 될 정도였다. 강렬한 화기가 공기를 앗아 가며 더 거세게 타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여느 고수 같았다면 단박에 집중이 깨져 버렸을 순간에도, 연위의 움직임은 비단처럼 곱고 부드러웠다.
사각! 퍼어엉!
한 번의 유검(柔劍)으로 불덩이를 튕겨 내고, 이어진 검격(劍擊)으로 뒤이은 장력을 곧게 분쇄해 냈다.
충만하기 이를 데 없는 검극사기가 연위의 온몸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조금만 가까이 있어도 화상을 입을 만큼 고온의 불꽃인데도 연위가 걸친 옷자락의 실밥 하나 태우지 못했다.
정면으로 돌진하던 연위의 몸이 일순 회전하며 나아갔다.
서걱!
‘놔두어라.’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주인 잃은 머리통이 하늘 높이 날아갔다.
‘온몸을 풀어라. 나아갈 길은 검이 알아서 만들 것이다.’
서걱!
또 한 번의 절삭음.
방금보다 더 깔끔하고 날카로운 소리에 이어 또 한 명의 머리통이 허공을 날았다.
‘부드럽게.’
번쩍!
이전보다 한층 더 빨라진 참격에 신화교의 교도 하나가 세로로 쪼개졌다.
연위다운 깔끔한 공격이었지만, 또한 그답지 않게 잔혹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연위는 결과를 보았을 뿐, 그 결과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의 검은 적의 섬멸을 향해 있되, 검날부터 이어지는 신체의 중심은 언제나 최고의 무(武)를 담아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완고하게.’
퍼버벅!
전진을 멈춘 연위가 검을 곧게 세웠다.
고요하고도 고요하다. 그러나 그 자세를 취하기 전, 이미 사방으로 쏘아진 검기가 적들의 가슴에 주먹만 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검격을 쏘아 냈지만, 관통 부위에는 큰 구멍이 뚫렸다.
이미 검이 그리는 형상에서 아득히 벗어난 무공이었다. 원한다면 검으로 권장술과 같은 타격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이놈!”
훅!
지닌 패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괴한이 있었다.
금군 무장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금군이 아니다. 전신에 꽉 차 있는 황금빛 화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금제순화공(金帝純化功). 신화교가 자랑하는 최고급 무공 중 하나였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호무장 번작이 연성하고 있던 무공을 익혔다면 교내에서도 그 입지가 상당한 고수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실력 역시 강적이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연위가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돌진하여 도끼를 휘두른 거한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족히 오십 근은 넘어 보이는 도끼를, 강철로 만들었다고는 하나 얇디얇은 검날로 튕겨 내 버렸다.
압도적인 내공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거한의 내공 역시 연위의 내공에 비해 별 손색이 없었다.
그럼에도 일검에 튕겨 나갔다. 돌진하며 휘두른 힘까지 생각하면 더 대단한 일이었다.
“이노옴!”
번쩍!
거대한 외날의 도끼가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큰 변화는 없지만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휘둘러지는 순간부터 호흡을 방해하는 고온의 열기는 덤이었다.
오른손으로 검병을 쥐고 있던 연위, 그의 왼손이 길쭉한 검병의 끝을 잡았다.
쩌어어어어엉!
또 한 번 정면 승부였다.
“이익!”
거한의 얼굴이 붉어졌다.
힘으로는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던 신력(神力)의 소유자였지만, 양손으로 검을 쥔 연위의 일검에 또다시 도끼가 튕겨 나갔다.
순간적으로 어깨가 빠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충돌 순간 힘을 빼지 않았다면, 팔꿈치든 어깨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부러졌을 것이다.
“도끼는 그리 다루는 것이 아니다.”
양손으로 쥔 검을 중단으로 세우는 연위.
너무나도 평이한 자세였지만,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 검극사기는 거한의 금빛 화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무겁고 둔탁한 병기일수록 후속타를 상정해서는 아니 되는 법. 혼을 실은 일격으로 상대를 패퇴시키지 못하면 당하는 것은 본인일 수밖에 없으니.”
“닥쳐라!”
거한이 다시 한번 도끼를 휘둘렀다. 그 역시 연위처럼 두 손으로 도낏자루를 쥐고 휘두르는데, 그 속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 빨랐다.
검과 도끼가 벼락처럼 부딪쳤다.
쩌저저저저저정!
소름 끼치는 금속음과 함께 허공에서 번쩍이는 불꽃이 터져 나왔다.
청석 바닥을 딛고 있는 두 사람의 발 주변으로 거미줄 같은 금이 퍼져 나갔다. 극단적인 발경이 서려 있는 병장기의 충돌에, 접근하던 고수들이 깜짝 놀라 물러섰다.
연위의 눈이 고요해졌다.
쩌저저저저정!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화려해지는 부딪침.
진청색 검기를 담은 흉기가 검속(劍速)을 높였다.
쩌저저정! 쩌저저저저정!
거한이 이를 악물었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그의 어깨와 상체에는 수십 개의 검상이 새겨져 있었다.
실제로 검에 당한 것이 아니었다. 연위의 쾌검(快劍)이 도끼의 경력을 분쇄하며, 그 너머에 있는 거한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쩌어어어어엉!!
한 차례 거센 부딪침과 함께 거한이 소리를 질렀다.
“크아아악!”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괴성을 터트린 거한이 뒤로 튕겨 나간 도끼를 재차 쥐고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연위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여전히 중단으로 세운 검이 짧게 비틀렸다.
삭!
순간 거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그의 양손이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손에 쥐고 있던 도끼 역시 마찬가지 신세였다.
‘언제?!’
양손이 잘려 나갔다는 충격과 고통보다도 의아함이 앞섰다.
종으로 서 있던 검이 사선으로 움직이는 순간 양 손목에 부드러운 비단이 휘감기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게 끝이었다. 위기를 느끼지도, 살기의 방향을 읽지도 못한 것이다.
“크윽!”
양손과 병기를 잃은 거한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손해를 입은 즉시 최선의 방위, 최고의 속도로 물러난다. 연위에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른 채 당해 버렸지만, 공방의 흐름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는 자였다.
물론 연위는 그마저도 읽어 내고 있었다. 거한의 육신, 그 육신에서 흘러나오는 진기가 후방으로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물러난 만큼 그대로.
어느새 코앞까지 도달해 있는 연위를 보며 거한은 경악했다.
연위가 냉정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때였다.
‘……!’
무게 없는 불꽃처럼, 한 줄기 날카로운 화기가 연위의 목덜미를 향해 쏘아져 왔다.
엄청나게 빠른 일격이었다. 당관이 내던지는 암기가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만큼의 무게감은 없다.’
거한의 몸을 휘감던 무형의 검기가 순식간에 풀어지며 연위의 등 뒤로 향했다.
동시에 그의 오른팔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터엉! 퍼어억!
거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본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널찍한 가슴 한가운데에 사발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뚫린 가슴 주변에는 검게 타들어 간 흔적이 남았다.
“어떻게……?”
이 날카로움, 이 속도.
거한은 이 무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홍룡 중 하나, 신화교가 자랑하는 희대의 궁수 홍룡궁이 쏘아 낸 일격이었다.
한데 그 일격이 왜 자신의 가슴을 뚫었는가?
거한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
그제야 그는 홍룡궁의 무형탄이 자신의 가슴을 뚫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르륵.
자세를 바꾸는 연위. 그의 검에 살짝 그을린 자국이 보였다.
자신을 향해 쏘아진 화기 가득한 무형탄을 검배로 튕겨 진로를 바꿔 버린 것이다. 진로가 바뀐 무형탄은 그대로 거한의 가슴에 적중했다.
“이……!”
이 놀라움을 대체 어떤 표정과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잘린 손목으로 연위를 가리키던 거한이 이내 그대로 쓰러졌다.
쿵! 퍼버벅!
쓰러진 거한의 몸 곳곳에서 붉은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무형탄에 더해진 연위의 검기가 체내로 파고들어 온몸의 혈맥을 찢어발긴 것이다.
“내 아들과 같은 병기를 쓰는 자, 그리고 딸처럼 여기는 아이와 엇비슷한 궁술을 보유한 자를 이렇게 보는구나.”
연위의 신안(神眼)이 저 멀리 오십 장 밖에 위치한 건물 꼭대기에 닿았다.
“그러나, 둘 모두 내 자식들만 못하다.”
연위가 몸을 돌렸다.
훅!
그의 등을 향해 다섯 발의 무형탄이 날아들었다.
연위가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렀다.
터터터터텅! 푸화아악!
물살처럼 휘몰아치는 검기의 파도가 네 발의 무형탄을 하늘 높이 튕겨 내고, 남은 하나의 무형탄은 쓰러진 거한의 몸으로 튕겨 냈다.
이미 생기를 잃은 몸뚱이가 또 한 번 불길에 당했다. 화정이 사라진 듯, 무형탄에 맞은 거한의 몸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파아악!
연위가 재차 어전 쪽으로 몸을 날렸다.
홍룡궁의 화살은 더 이상 날아들지 않았다.
* * *
쿵! 퍼어엉! 퍼버버벅!
흔들리고 폭발하고 터지는 온갖 소리가 난입했다.
‘……?!’
우헌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뭐야?’
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거지?
‘설마 벌써 거길 다 뚫었다고?!’
홍룡검도 그렇지만, 제일 궁문에서도 한참 떨어진 어전 인근 너른 공간에 배치된 고수들의 숫자는 거의 문파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한데 이 폭음은 무엇인가? 이 충격파는 무엇인가?
무공을 봉인한 자신은 물론, 황제와 황후조차 확연히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충돌이 왜 느껴지는 것인가?
‘연위? 설마 연위 하나만 오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설령 몇 명의 고수들이 함께한다 해도 벌써 저기까지 뚫린 것이 말이 되는가?’
그때였다.
콰콰쾅!
무시무시한 폭음이 어전 바로 앞에서 터졌다. 그 소리와 충격에 용상마저 흔들릴 지경이었다.
황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태, 태감!”
우헌이 침을 삼키며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그는, 지금 이 순간 놀라움에 사고가 멈춰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용상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소신이 바로…….”
서걱! 쿠구궁!
한 줄기 절삭음과 함께 어전의 커다란 문이 사선으로 잘려 나갔다.
그리고 그 너머.
달빛과 사방에서 번지는 불꽃을 등지고 선 한 명의 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