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8화. 피 묻은 황좌(皇座) (9)
고요하기 그지없는 어전.
용상에 방만하게 앉아 있는 천자(天子)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이한 음영으로 가려진 용상 너머에 드러난 것은, 그 자리의 주인이 턱을 괴고 앉아 있다는 것뿐이었다.
황후는 우헌을 보고 있었고, 우헌은 미동 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고요하고도 고요했다. 어전 멀리서 한창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이곳까지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
우헌의 눈이 깊어졌다.
‘뭐지.’
궁내대장군 문석과 그 무리가 제삼 궁문을 넘었을 때, 금군과 동창 소속 신화교도들이 움직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확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문석과 그 일행이 움직였다는 보고가 들어온 시간을 계산해 보면, 이쪽에서 시기를 못 맞췄을 리는 없다.
문제는 ‘누군가’의 움직임이었다.
‘홍룡검(紅龍劍)이 벌써 움직였다고?’
홍룡검은 신화교에서 몇 없는 정통 검객이었다.
신화교의 열양공은 그 특색이 명확하여, 같은 경지라도 더 많은 내공을 필요로 한다.
그 강력한 내공력을 바탕으로 기공(氣功)에 능하기에, 대부분이 육장(肉掌)을 쓴다. 병장기를 이용하는 것보다 화기(火氣)를 이용하는 것이 더 강력하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홍룡검은 신화교의 무공을 익혔지만, 특이하게도 대륙의 검술과 새외의 병장기술을 합쳐 자신만의 독특한 무도(武道)를 완성한 검의 대가였다.
기공 이외의 무공을 완성하면 그 또한 신화교의 무학에 편입되니, 상부에서도 홍룡(紅龍)들에게 상당한 지원을 했다.
달리 직책은 없지만, 대우는 무장급이다. 무공을 분해하고 창조하는 재능이 지극히 뛰어나기에 수뇌부도 어지간해서는 건드리지 않는다.
홍룡검은 홍룡 중 홍룡궁(紅龍弓), 홍룡도(紅龍刀)와 함께 가장 강한 고수였다.
그런 홍룡검이 벌써 나선 것이다.
‘흥이 돋을 만한 상대를 만났다는 뜻인가?’
다른 홍룡과 마찬가지로, 홍룡검 역시 자신의 무공을 완성하는 것 이외에 일엔 관심이 없는 놈이었다.
홍룡검과 홍룡궁 둘을 황궁에 데리고 온 것도 황궁무고(皇宮武庫)에 엄청난 양의 무공 비급이 비치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이 신화교의 절학과 비교가 안 됐지만, 개중에는 독특하고 신묘한 무공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우헌의 눈이 빛났다.
‘연위로군.’
아쉬웠다.
우헌은 자신의 무공을 반쯤 봉인해 놓은 상태였다. 황제 앞에서 무공을 익힌 티를 내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지간한 절정고수 수준의 예민함을 갖고 있었지만, 확실히 감각이 둔했다. 신화교의 무공을 연성한 이들이 아니면 쉬이 기파를 읽을 수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그만큼 연위의 무공이 강하다는 뜻. 그러나 그쪽 방벽을 뚫지는 못할 것…….’
그때였다.
“태감.”
우헌이 더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예, 폐하.”
“내, 이곳에 더 있어야 하는가?”
듣는 이를 아연실색게 하는 말이었다.
역모가 터졌다고 했다. 현재 역적들이 어전을 향해 몰려오는 중이라고 했다. 금군을 출동시켜 잡아 오게 했다지만, 이 중차대한 순간에 자리를 떠나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황후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혐오감이 깃들었다. 제아무리 표정 관리에 능한 그녀라도, 이 순간만큼은 황제의 무능함에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헌은 속으로 웃었다.
“황송하옵니다. 하나, 조금만 기다리시면…….”
“짐을 이 자리에 앉혀 놓고 싶다면, 적어도 반역도당의 수괴가 누구인지 정도는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헌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의외로군.’
황제가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지금에 와서는 원체 주변에 무관심하고 자기 자신만 아는 사람이 그였다.
그것이 과해져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보고를 받아도 들은 체 만 체하곤 했다.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사는 것이다.
그런 황제가 지금에 와서 불편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제아무리 역모라고 하지만…….
‘하기야 불안하기도 하겠지. 십삼태자와 손을 잡은 하남 도지휘사도 역모죄로 목이 날아갔으니.’
우헌이 입을 열었다.
“소신은 반역을 일으킨 자들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 수괴가 누구인지는 아직 확신하지 못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표면에 드러난 사람은 알지만, 그 너머에 또 누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는 뜻이옵니다. 소신의 우둔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기실, 이것도 굉장한 무례였다.
다른 일도 아니고 반역, 역모였다. 그 집단의 수괴가 누구인지 알고 있음에도 황제에게 기다리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기함할 일이었다.
황후가 날카로운 눈으로 우헌을 노려보았다.
“태감의 위세가 참으로 당당하구나. 폐하께서 알고자 하시면 알려 드려야 함이 옳다. 하물며 역모가 아닌가. 제아무리 권세가 드높다 한들 폐하를 업신여기다니, 이는 참형에 처해도 모자람 없는 중죄라는 걸 모르는가?”
우헌이 재차 읍했다.
“소신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저는 폐하만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태감!”
“이 죄는 추후에 달게 받을 것입니다. 부디 소신을 믿어 주십시오.”
저렇게까지 나올 일인가?
분노한 기색을 드러낸 것과 달리, 황후는 초조함에 휩싸였다.
‘높다. 참으로 높다.’
자세는 공손했지만, 우헌의 여유를 읽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다.
‘이 역모 사태…… 저놈이 나를 노리고 공작했을 확률이 높아.’
물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
황후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폐하.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역모가 터졌는데 자리를 뜨겠다고 한다. 황제가 아니라 황후라지만, 이 또한 평범한 반응은 아니었다.
그때, 용상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후께서는 자리를 지키시오.”
놀랍게도 그녀를 막은 것은 우헌이 아니라 황제였다.
황후가 용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황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음영이 너무 짙었다.
‘폐하.’
황후는 자신의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용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격동이 어렸다.
“일국의 주인이신 폐하와 국모(國母)께서 자리를 지키시지 않는다면, 저 무도한 반역도들이 황궁의 지엄함을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황후가 우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헌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와 함께 자리를 지켜 주십시오. 어전 주변에 강호의 고수들도 눈 아래로 보는 무사들을 배치했으니, 두 분 옥체에는 아무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
“무도한 반역도들에게 천자의 권위가 흔들림이 없음을 의연함으로 보여 주셔야 합니다.”
주르륵.
황후의 하얀 뒷덜미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역시 나까지.’
오라비이자 궁내대장군이 무리하게 움직였다는 걸 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역모로 몰 수는 없다. 황제의 위엄은 땅에 떨어졌고 황궁의 권력은 자신과 우헌이 양분하고 있는 판국이니, 덜미를 잡았다 하여 섣불리 공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까지 엮어 낼 것이 분명하다.’
혹시 몰라 어전에 오기 전, 연이 있는 고관들에게 연락을 보내 놓았다. 만에 하나라도 이쪽을 노리고 있다면, 그에 따른 반격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까지 엮어 낼 작정이라면…….
‘대체 어떤 준비를 하였기에 이리도 자신만만하단 말인가.’
그때였다.
쿠구구궁!
살벌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건물 하나가 통째로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 무시무시한 진동이 어전까지 뒤흔들 정도로 대단했다.
황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헌의 얼굴도 살짝 경직되었다.
“흥미롭구나.”
용상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묘하게 여유가 넘쳤다.
“금군은 상시 화약을 소지하고 있다지만, 이 굉음과 떨림은 화약 때문이 아닌 듯싶다만.”
우헌이 말했다.
“반역도들이 강호의 무뢰배들도 끌어들인바, 그중 고수가 있다면 이와 같은 충격이 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가?”
“예, 폐하.”
“태감답지 않구먼. 신성한 황궁에서, 하물며 어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반역도의 침입을 허용했다면, 이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 듯싶네.”
제아무리 무능한 황제라지만 일신의 안위는 걱정스러운 것일까.
나른한 목소리 속에 숨길 수 없는 걱정이 감돌고 있었다. 우헌은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 낼 수 있었다.
“반역도들은 절대 어전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우헌의 눈빛이 일순 사이한 광채를 발했다.
“조만간입니다.”
* * *
쩌엉!
검과 검이 부딪치며 강렬한 진동음을 터트렸다.
두 검사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거의 동수(同手)에 이른 힘이었다.
“대단하군.”
연위를 향해 홍검(紅劍)을 겨눈 홍룡검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탄이 떠올랐다.
“오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검과 함께 보내며 천하 검학의 이치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고 자부하는바. 강호육가의 주인이라지만, 이처럼 탄탄한 무(武)를 쌓고 있을 줄은 진정 몰랐다.”
오십 년 가까운 세월을 검과 함께하였단다. 열 살이 되기 전에 검을 잡았다 해도 거의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일 것이다.
하지만 겉모습은 연위와 별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만큼 깨달음이 높고 내공의 성취가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연위는 말없이 홍룡검을 바라보았다.
홍룡검이 미소를 지었다.
“승부에 임했으니 문답무용이라 이건가. 정말 마음에 드는 상대야.”
“…….”
“특히나 그 절륜한 검도(劍道)가 마음에 들어. 검학에 한해선 온 천하에 나에 비견될 만한 자가 몇 없을 거라 자부했는데, 네놈이 그중 하나구나.”
우우우웅.
홍검의 끝에 붉은 광채가 피어올랐다.
“시간이 있었다면 칠 주야 동안 검을 섞고 서로의 깨달음을 엿보려 들었을 것이다. 하필 이런 상황에 네놈과 같은 실력자를 만난 것이 안타깝다.”
여전히 연위는 말이 없었다. 하단으로 자연스레 내린 검, 홍룡검을 바라보는 깊고 깊은 눈에는 일말의 투기(鬪氣)도 엿보이지 않았다.
홍룡검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묘한 검이로군.’
작은 궁전 하나를 반파시키는 등 거의 삼십 합에 가깝도록 검을 나누었다.
연위의 검은 정통 중의 정통이었다. 공격과 수비, 회피와 반격 중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고리타분하기 그지없는 검이지만, 전반적인 수준이 지극히 높아서 가히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무공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뛰어난 검학을 지녔다 한들 싸우려 들지 않으면 무소용인바.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연위의 몸에선 투기가 줄어들었고, 검의 예기마저 흐려지고 있었다.
‘힘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한 것도 아니야. 분명 뭔가가 있다.’
홍룡검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재밌군.”
스륵.
한 발 앞으로 나선 홍룡검의 몸에서 일순 강력한 화기가 넘실거렸다.
“어디 어떤 검을 준비했는지 확인을…….”
그때였다.
‘……!!’
홍룡검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사라졌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쩌어어어어엉!
홍룡검의 몸이 멀리 튕겨 나갔다. 좌측 하단에서부터 호선을 그리며 올라온 검격을 막았는데, 그 힘이 검과 팔을 넘어 상체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이런!’
파아악!
빠르게 몸을 회전하여 사방으로 화기를 쏘아 낸 홍룡검이 연위의 기척을 읽었다.
‘뒤!’
파박!
재빨리 보법을 밟고 몸을 돌린 홍룡검은 곧바로 검을 쳐들었다. 연위의 살기가 상단 머리통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퍼억!
홍룡검의 눈이 흔들렸다.
어느새 연위의 검은 그의 중단을 꿰뚫고 있었다.
‘……이게 뭐야?’
곧게 뻗은 검 그대로.
왼손은 뒷짐을 진 채, 올곧은 자세로 홍룡검을 바라보는 연위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검의 이치는 곧 무(武)의 이치이니, 검 따로 주먹 따로 생각할 게 아니지. 사람의 손이 곱다 한들 손에 이름을 붙여 주는 이가 있다던가.”
“…….”
“수준 높은 검리(劍理)는 봐 줄 만하나, 마음에 근본을 두지 않았으니 그 실력이 무공을 따라가지 못하는구나.”
푸화아악!
홍룡검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철검에 묻은 피를 떨쳐 낸 연위가 몸을 돌렸다.
“폐하의 어전으로 가는 길, 너희 수준이 그와 같다면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