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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744화 (744/963)

744화. 피 묻은 황좌(皇座) (5)

연호정은 미동 없이 탁무자를 바라보았다.

탁무자 역시 그 깊은 눈으로 말없이 연호정을 주시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정파의 대두, 무당파 최고 원로라는 검선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 몰랐습니다.”

탁무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백도와 흑도가 동맹을 맺지 않았느냐?”

“그렇습니까.”

“흑백이 힘을 합쳐도 감당키 힘든 재해가 들이닥치고 있는 판국이라 들었다. 언제 칼을 뽑을지 모르는 양천 같은 야망가가 흑도를 쥐고 흔드는 것보다, 네 녀석이 흑도를 삼켜 버리는 것이 훨씬 이득 아니겠느냐?”

“백도를 위해서입니까?”

“다음 대의 천하를 위해서지. 물론 전쟁이 승리로 끝난다면 말이야.”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검선께선 안 나서십니까?”

“음?”

“소림의 권신, 무당의 검선. 두 분 중 한 분만 대외로 나서도 흑백 모두가 힘을 얻을 겁니다.”

탁무자가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과 묘한 격정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나설 수 있었다면 진즉 나섰을 것이다.”

“나설 수 없는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그렇다.”

“알 수 있겠습니까?”

탁무자가 쓰게 웃었다.

“너에게 알려 줄 수 있는 사실이었다면, 장교(掌敎)에게도 알렸을 것이다.”

무당 장교, 장문인 승현진인을 말함이었다.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변화는 순간이었다.

후욱!

탁무자의 몸에서 일순 청량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그 기운은 실로 묘했다.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얼마나 방출되는 건지, 그 밀도는 어느 정도인지가 순간적으로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아아아아.

밀도 높은 구름처럼 꽉 뭉쳐 있으면서도, 그 안에 있으면 도통 인식하기 어려운 선기(仙氣)가 사방으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채우는 것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봉우리의 선기가 아닌 한 인간이 쌓아 온 궁극의 진기였다.

‘크다!’

풍성하고 자연스러우며, 거대하고 농밀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탁무자를 중심으로 확! 하고 번져 나갔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온도의 물로 천지를 메우는 것 같았다.

‘승현진인과 전혀 달라!’

경지가 다르고 깨달음이 다르니, 당연히 진기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연호정이 생각하는 다름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분명 같은 무당의 무공을 익혔을 텐데, 도가신공 특유의 색깔을 제외하면 그 어느 부분에서도 동문의 공부라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론 이렇게나 닮았나 싶을 정도로 닮은 구석이 있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다르지만, 놀라우리만치 닮았다. 근원으로 향하는 길은 같지만, 그 깊이와 방대함은 비교 자체를 불허한다.

‘물.’

탁무자는 말했다. 옥청은 물 같은 놈이라고. 그리고 물과 같은 그를 키운 것은 바로 탁무자 본인이었다.

승현진인이 흩어지는 구름이라면, 탁무자는 흐르는 물이었다.

승현진인이 가볍게 유연하다면, 탁무자는 무거우면서도 유연했다.

승현진인이 조화 속에 있다면, 탁무자는 스스로 조화를 만드는 이였다.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차이. 단순히 기도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환상과도 같은 광경을 떠올리게 된다.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내게, 저 하늘은 너와 같은 사람을 보내 주었구나.”

“……?”

“무극을 열었다는 것은 곧 인세에 정해진 운명과 순리에서 벗어났다는 것. 그 영역은 그러한 영역이다. 단순히 무공이 더 강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야. 무(武)로써 인간의 거죽을 탈피해 버리는 것이 바로 그 무극, 혼돈의 경지이니라.”

탁무자가 미소를 지었다.

“즉, 통천(通天)의 도력으로도 자네의 머릿속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야. 나와는 달리.”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봉우리에 쌓인 선기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더냐?”

갑자기 다른 얘기를 꺼내는 그였다.

하지만 연호정은 직감했다. 지금의 얘기는 곧 자신이 듣고 싶은 얘기로 이어지는 하나의 길목과도 같다는 걸.

“그렇습니다.”

“이 봉우리는 이름도 없어. 이름 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았지만, 옛날부터 그저 무명봉이라 불렸지.”

탁무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만도 해. 나 역시 자연과 하나가 되신 삼풍 조사께서 말년에 깨달음을 얻으신 이곳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니.”

“……!”

삼풍진인. 장삼풍.

중원 도교에 있어서 이보다 더 위대한 이름도, 이보다 더 유명한 이름도 없을 것이다.

무당파의 조사이자 천하 도맥의 정점에 올랐던 사람이 말년에 깨달음을 얻은 장소라면, 그 자체로 성역과도 같을 것이다.

“이 선기는 바로 전설의 삼풍 조사께서 대자연과 하나가 되신 이후, 무당을 위해 흩뿌려 주신 기운이다.”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모르지. 나는 아직 그 경지의 발끝에도 이르지 못했어. 하나,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무극, 무한, 혼돈의 경지에 도달한 천외천의 강자들조차도 홀려 버리는 이 기운의 주인이, 삼풍 조사님 이외의 신인(神人)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고야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神異)한 능력으로 천하를 주시하는 괴악한 자들의 시선조차 막아 준다.”

“예?”

“나를 주시하는 자가 있다.”

“누구입니까.”

“통천.”

“통천?”

“세상에는 강호삼기(江湖三奇)라 불리며 어느 한 분야에 정통한 기인들이 있다. 그중 하늘에 닿은 점복술과 도력으로 미래를 점치거나 수천 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괴물이 하나 있지.”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탁무자의 표정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누구도 믿기 힘든 얘기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통천진인(通天眞人)이라는 이름 정도는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일면식은 없습니다.”

“용두방주와도 친분이 있는 그는, 실상 몹시 위험한 사람이다. 하늘에 닿은 그 능력으로 용두방주를 도와주며 친분을 쌓았으니, 용안(龍眼)을 지녔다는 용두방주조차 통천진인이 어떤 이인지 모를 수밖에 없으리라.”

탁무자가 피식 웃었다.

“하긴, 친분이 없다 한들 그 속내를 알아 낼 수 있을 정도로 범상한 자가 아니지만.”

“……그가 왜 위험하다는 겁니까?”

“사도(邪道)에 홀려 버렸기 때문이다.”

“……?”

“정확히는, 그가 정점에 달한 도(道)를 버리고 피비린내 가득한 허상의 귀신(鬼神)을 모시기 때문이다.”

피비린내 가득한 허상의 귀신.

피, 그리고 신.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혈신(血神).”

탁무자의 얼굴에 의외의 빛이 어렸다.

“알고 있었느냐?”

“새외 삼교의 근원이었던 종파. 그 종파의 신이 바로 혈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새외 삼교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네가 말한 그 혈신이 맞을 것이다. 통천이 나를 주시한 순간, 나 역시 그를 주시할 수 있었으니까.”

도통 이해 못 할 소리였다.

사람들은 신통력(神通力)이라는 말을 입에 담으며, 불가사의한 전설이 실존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꾸며진 이야기에 불과했다. 천 리 밖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千里眼), 수백 리 떨어진 거리에서 속삭이는 말을 듣는(天耳通) 능력은 상식적으로 존재할 리 없었다.

연호정의 생각을 읽었는지, 탁무자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의 무공은 어떠하냐?”

“예?”

“네 능력이라면 백 보 밖에 떨어진 물건을 손대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하늘을 날 수는 없지만, 허공답보라는 지고의 경지에 도달하여 마치 나는 것처럼 허공을 밟고 달릴 수 있다.”

“……!”

“범부가 보기에 너와 같은 이들은 초인(超人) 그 자체다. 만지지 않고 물건을 드는 건 물론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도 있는데, 수천 리 밖에서 벌어진 일을 앉은 자리에서 알아채는 도사는 없겠느냐?”

“그것은…….”

“너의 몸에 담긴 그 절대적인 능력의 근본에는 기(氣)가 있다. 기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단 한 명이 백 명의 힘을 낼 수도 있지. 그리고 그 기를 이곳에 담으면.”

탁무자가 손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귀신과 영통하고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신선이 아니기에 절대적으로 불완전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의 조화라는 게야.”

연호정의 얼굴에 충격이 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다.

‘기우희.’

그녀는 선천적으로 영안이라는 능력을 타고났다. 그 능력 덕에 사람의 근본, 근원을 내다볼 수 있다.

그것이 초능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초능을 가능케 한 것은 거대한 상단전을 타고난 것일 테고, 그 상단전의 기(氣)로 사람을 보는 것이다.

“통천진인이 언제부터 도를 버리고 귀신을 모셨는지는 모른다. 오래되진 않았을 거로 추측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자가 노선배님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다.”

“노선배님께서 움직이시면, 그것이 전부 통천진인에게 들켜서 그 정보가 적측에 새어 나간다는 것입니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서로가 불완전하니까. 하지만 네가 말하는 적에게 나의 의지와 생각이 고스란히 보고된다는 것은…… 그렇다. 그럴 가능성이 지극히 크다.”

“노선배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극에 도달한 이를 살피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하다고. 한데 어찌 그자가 노선배님의 머리를 엿볼 수 있단 말입니까?”

탁무자의 얼굴에 재차 씁쓸한 기색이 어렸다.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지.”

“……?”

“도사라면 응당 도(道)를 좇아야 하는데, 불순하게 무(武)의 경지에 손을 대었다. 더 강한, 더 높은, 더 신통한 능력을 얻고 싶었지.”

“그게 문제입니까?”

“내 경우에는 문제가 되었다. 육신에는 더 큰 힘을 담을 수 없었기에 상단전을 연마하여 비대하게 만들었다. 그 비대해진 상단전을 완벽하게 둘러칠 만한 신기(神氣)는 연마하지 못했는데도 탐욕스럽게 힘을 갈구했어.”

탁무자가 눈을 감았다.

“빈틈없는 성벽에 구멍이 나 버렸다. 메울 수 없는 큰 구멍이.”

“…….”

“그래서 통천진인은 나를 볼 수 있어. 전부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군요.”

“그것이 내가 선기로 가득한 이곳에서 머무는 이유다. 한번 비대해진 상단전을 줄일 순 없으니, 신기를 연마하여 성벽을 메우려 했는데…… 그게 잘 안되더구먼.”

무극을 열어도 사람은 사람이다.

오히려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위험해질 수 있다. 한번 길이 엇나가면 손쓸 수 없는 재앙이 될 수도 있고,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정체되었던 경지가 수직으로 상승하기도 한다.

천하에서 가장 드높은 경지에 올랐으나, 다른 누구보다도 불안정한 지대에 서서 세상을 보는 이들.

그것이 바로 무극의 고수들이다.

‘그래서.’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래서 그런 것인가.’

양천은 무극의 고수 중 상식적인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것은 음제 하은교와 암왕 당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사음교가 자식을 살려 뒀을 리 없다. 아니, 애초에 사음교에 자식이 없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그런데도 하은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음교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아무 이득이 안 되는 일이지만,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기 위해서 결국 홀로 찾아갔다.

당형은 어떤가?

가문이 통째로 뒤집히는 위기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고집이 세서? 물론 그것도 맞다. 그러나, 어느 하나의 기억과 깨달음에 사로잡힌 그들은 또 한 번의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고하지만 불안정하다. 괴수와도 같은 힘을 얻었지만, 정신은 그에 걸맞은 힘을 얻지 못했다.

무극이란 그런 영역이다. 몸이 완성되었기에 변화의 여지가 있는 상단전에 의지하며, 상단전의 기운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돌아보지 못하면 사람의 몸뚱이를 지닌 괴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할 얘기는 다 했다. 적어도 나와 너에 관해서는 그렇지.”

“……그렇군요.”

“아니, 하나가 더 남았군.”

“……?”

“나는 통천진인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통천진인의 발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가 길러 낸 제자가 한 명 있다.”

“제자 말입니까?”

“그래, 제자.”

탁무자가 눈을 감았다.

“그 제자가 지금 황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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