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3화. 피 묻은 황좌(皇座) (4)
스륵.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자정을 넘어 축시가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그때까지 연락이 없었으니, 세 사람 역시 자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아연이 입을 열었다.
“북천장이신가요?”
“그렇소. 들어가겠소.”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다. 특유의 무뚝뚝하고 굵은 목소리 속, 왠지 모를 당혹감이 느껴졌다.
“오늘은 황후 폐하를 접견할 수 없겠소.”
팽무강이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오?”
황후를 향해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불경죄일 수 있지만, 도번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상황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황제 폐하의 호출로 어전에 가셨소.”
“……?!”
야심한 시각이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이 시간에 황후를 호출하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제갈아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은 사소한 일 몇 가지를 따지는 것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혹시 태감이?”
“모르겠소. 태감이 먼저 폐하의 처소로 간 건지, 폐하께서 그를 호출하신 건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소.”
어쨌거나 태감도 어전으로 향했다는 뜻이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그때, 연위가 말했다.
“위험하오.”
세 사람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궁에 들어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소. 하지만 태감의 정보력이 뛰어나다면, 황후 폐하께서 모종의 일을 벌이고 계신다는 걸 알아챘을 가능성이 있소.”
도번의 눈이 흔들렸다.
“만약 이 일이 태감이 벌인 것이라면, 자칫 황후 폐하의 존체에 해가 될 수도 있소.”
“만에 하나를 위해 대장군부 직속 고수들이 따라붙었소만.”
“태감 휘하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들이 붙어 있을 것이오. 그렇게까지 하진 않겠지만, 만약 피를 볼 생각이라면 대장군부 전체가 나서도 황후 폐하를 지키기 어려울 수 있소.”
자존심 상해 할 때가 아니었다. 도번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도 믿는 바가 있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주 말마따나 만에 하나의 경우를 배제할 수는 없소. 해서 우리 쪽에서도 준비한 게 있소.”
“준비?”
“대장군부로 갑시다.”
세 사람의 눈이 빛났다.
도번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장군께서도 출발하실 것이오. 세 분은 대장군 휘하 직속 부하로 변장하여 함께 가 주셨으면 하오.”
이 또한 도를 지나치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황제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지만, 강호의 무부들을 대장군의 부하로 변장시켜 어전에 들이려 한다.
그만큼 도번이 황후와 대장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수백 년 사직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라는 뜻이기도 했다.
다른 걸 떠나서, 황제는 황후의 오라비인 대장군을 호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소수나마 병력을 끌고 간다는 것은, 자칫 반란으로 비춰질 위험이 있었다.
말하자면 지금 이 상황은 황후와 대장군은 물론, 그에 연관된 세 사람 모두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
세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팽무강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갑시다.”
* * *
인생이란 항상 놀라움의 연속이라 했던가.
그러나 연호정은 결단코 지금 이 순간만큼 놀란 적이 없었다.
“흑도를…… 잡아먹으라고요?”
“그렇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눈빛이 아주 간드러지게 흔들리는구먼. 허허, 이제야 알겠느냐? 네놈 흉중 안에 드리워진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해묵을 대로 해묵어 곰팡내를 풀풀 피우는데도 너 자신은 애써 외면해 왔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
시린 눈으로 탁무자를 바라보는 연호정의 얼굴은 혼란 그 자체였다.
“그동안의 일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음?”
“사천에서 벌어졌던 일, 용두방주를 중독시켰던 일. 그리고 저의…….”
잠시 말을 멈춘 연호정이 조금 충혈된 눈으로 탁무자를 노려보았다.
“무당파의 정보력이 이렇게까지 뛰어난 줄은 몰랐습니다.”
탁무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참으로 웃기는 녀석들이지. 내 사질들이지만 도통 정이 안 간단 말이야. 피비린내 그득한 강호에 한 발을 디뎠으니 그곳에서의 삶을 영위키 위해 노력해야 함은 마땅하나, 지금의 무당파는 조금씩 선을 벗어나기 시작했어. 이제는 어엿한 무림 방파라 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다.”
“…….”
“다만, 그 덕분에 이곳에 거하면서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대충이나마 볼 수 있었지.”
“무당파의 정보원들에게 들은 것이오?”
“도사들이 정보 모으자고 여기저기 뛰어다녀서야 쓰나. 속가나 상단에서 올라오는 정보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정적으로, 내가 용두방주와 친하거든.”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그랬나.’
선기 그득한 봉우리. 무극을 연 고수들조차 감각의 이상 신호를 느낄 정도로 기괴하기 그지없는 이 환경.
그리고 검선 탁무자.
환경과 인물, 그간의 대화 때문에 정녕 탁무자가 신선들이나 쓸 법한 능력을 지닌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었다.
천하의 연호정조차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탁무자의 자연스러운 존재감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세상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 못해. 다만, 당금 세상에 풍운을 일으키는 몇몇 인물만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야.”
“…….”
“그중 하나가 네 녀석이다.”
“…….”
“가문을 공격하려는 구주명가를 상대로 일장 난투를 벌여 기어이 멸문지화로 몰아넣은 열혈의 남아.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명성을 떨치더니, 어느새 중원을 가로지르며 온갖 사건을 해결하고 다니는 거센 불꽃.”
“…….”
“나는 물론 저 멀리에 사는 땡중도 네놈을 주시하고 있을 게다.”
저 멀리에 사는 땡중.
그게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연호정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대체 왜?”
“왜? 바보 같은 질문이로고. 설마하니 너는, 네가 직접 나서서 해결한 일들이 천하에 어떤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지 조금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단 말이더냐?”
“……!”
당연히 그렇지는 않았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런 걸 모를 수는 없었다. 다만 연호정은 자신이 해결한 일들이 세상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해 관심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일생의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천하가 자신을 왜 주시하는지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아!’
비로소 연호정은 깨달았다.
제갈문호가 중요한 순간에 항상 자신을 투입하는 이유를.
양천이 하고많은 수하들을 내버려 둔 채, 자신과 함께 중원 곳곳에서 터지는 일들을 고민하고 이내 출격시키는 이유를.
그리고 가끔 그들이 자신을 보며 어처구니없어하던 이유까지.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자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해결한 일들을 보며 주변에서 그렇게 칭찬을 해 대는데도, 연호정은 그저 웃으며 넘길 뿐 조금의 자부심도 느끼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협의나 정의를 떠나,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들어 해결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에서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일들.
당장 내일이라도, 아니 지금이라도 그런 일은 터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연호정은 당장 달려 나가 해결을 보려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연호정에게만큼은.
“너는 이미 광대한 중원 천하 한복판에 서서 만인의 주시를 받고 있다.”
“……!”
“나이가 어리다? 어리기 때문에 그 파급력은 더 크다. 질투하는 자도 많고 의심하는 자도 많지만, 그런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세상은 너를 주시하고 있다.”
맑고 깊던 탁무자의 눈이 일순 날카롭게 번뜩였다.
“어떤 의미로, 지금 당장의 영향력만 따지자면 네놈이 성천의 고수들보다도 앞선다고 볼 수 있겠지. 왜냐? 네놈이 중원을 불사르려는 모종의 집단과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
“그 누구도 너처럼 움직이지 못해. 능력의 고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는 불법을 얻기 위해, 누군가는 도를 좇기 위해, 누군가는 불변의 소속감 때문에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어. 하지만 너는 아니다.”
“…….”
“젊은 나이, 패기 넘치는 결단력으로 그 모든 일을 헤쳐 왔지. 판관검이라 불리며 공사 구분이 엄격한 연가주조차도 천하를 종횡무진하는 아들을 자유로이 풀어 두었어.”
날카롭게 벼려졌던 탁무자의 눈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이 당차게 질주하는 네 녀석의 발걸음 하나, 하나가 천하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었단 말이다. 주시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들을 들어 봤지만, 탁무자가 하는 말은 뭔가가 달랐다. 비슷하면서도 훨씬 더 근본적인, 근원을 향한 내용이자 물음이 담겨 있었다.
“이해하겠느냐?”
“…….”
“무력 이전에 그 영향력만으로, 너는 이미 천하 정점에 오른 것이다.”
그 순간 연호정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천하 정점.
다른 누구도 아닌, 당대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의 입에서 그와 같은 말이 나왔다.
흑암제 시절에도 쉬이 들어 본 적이 없던 말.
“하지만 왜인지, 나는 너의 소문을 들을 때면 한 가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게 무엇입니까?”
“너는 분명 백도 정파의 협가인 연씨가문의 핏줄이다. 나이를 따지기 이전에, 너의 혼과 뼈와 살점은 분명 연가에서 나왔어. 내 눈에는 그것이 보인다.”
“…….”
“하지만 네 몸에 흐르는 피는 결코 정도(正道)를 향하고 있지 않아. 그 피에선 그보다 훨씬 더 처절하고 근본적인, 인간의 감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짐승들의 원초적 삶이 묻어 나온다.”
“……?”
“흑도다.”
“……!”
“양천, 지금은 묵룡부주라던가? 그 사람과 손을 잡고 꽤 많은 일을 벌였다지? 그때의 정보를 들어 보면, 무림맹에 있을 때와는 인상이 전혀 다르다. 효율의 문제가 아닌, 너의 움직임 자체가 달랐어.”
“그건 당연히…….”
“묵룡부 소속으로 움직여서? 그렇지 않아. 절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너 또한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탁무자가 고개를 내밀어 그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앉아 있는 희대의 풍운아를 보며 나는 확신한다.”
“…….”
“네 피가 향하는 곳은 무림맹이 아니야. 올바른 협의와 광명정대한 안목으로 만사를 처리하는, 그런 길이 아니란 말이다.”
“…….”
“나아가 너 자신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나는 연가의 장남입니다.”
“훗날 어떤 선택을 하든, 지금 당장 네 녀석이 향해야 하는 길이 어디로 뻗어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그리고…….”
탁무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 길이 중원에 닥칠 피바람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탁무자가 미소를 지었다.
“중간에서 애쓰는 너를 보면, 당장 봉우리를 뛰쳐나가 무림맹의 간부들과 양천을 불러다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을 때가 있다. 하나 그들에겐 그들 나름의 사정이라는 게 있지 않겠느냐?”
“…….”
“제대로 움직이고 싶다면, 정점에 오른 그 안목으로 천지를 가늠하고 싶다면.”
“…….”
“흑도의 왕이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