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1화. 피 묻은 황좌(皇座) (2)
“…….”
눈을 뜬 기우희가 자연스럽게 상체를 세웠다.
“일어났소?”
진양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연호정이 이름 모를 고수와 충돌했다는 사실이 그를 긴장케 한 것이다.
멍한 얼굴로 진양을 보던 기우희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
“어? 어디 가시오?”
진양이 당황하여 기우희의 뒤를 따라 나섰다.
스르륵.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을 따라 묵룡대원들이 기우희를 엄호하듯 따라붙었다.
잠시 후.
“기 의원님?”
묵비가 의아한 눈으로 기우희를 바라보았다.
기우희는 말없이 묵비 옆에 서서 저 멀리 북쪽을 바라보았다.
“…….”
기묘한 침묵이 일었다.
묵비가 진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였다.
우우웅.
기우희의 푸른 눈에 은은한 서기가 어렸다.
순간 묵비는 깜짝 놀랐다.
‘저건?’
후천적으로 단련된, 하단전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연마되어 흘러나오는 기운이 아니었다.
맑고 청아함이 도를 지나쳐서 오히려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청정한 신기(神氣).
‘상단전?!’
영안(靈眼)이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우희만의 능력이었다.
영안은 곧 그 사람의 본질을 보는 능력이다. 묵비는 연호정에게 그렇게 들었다.
본질, 본성. 그렇기에 접근을 막을 수 없을지언정, 그 어떤 살수도 기우희에게 몰래 다가갈 수 없다. 그 신기(神技)의 영안으로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즉각 알아채기 때문이다.
물론 묵비는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누구라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우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평소에는 보여 주지 않던 영안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님.”
“쉿.”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댄 묵비가 기우희를 주시했다.
우웅. 우우웅.
저 머나먼 북쪽 산을 바라보는 기우희의 눈은 시시각각 명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영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서역의 피를 이은 특유의 하얀 피부가 인형처럼 보였다.
그리고.
‘……!’
묵비의 눈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핏기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되더니, 어느새 눈가 주변에 푸른 핏줄이 두드러지게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헉!”
진양 역시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묵비는 다시 한번 진양에게 주의를 준 후, 끝까지 기우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세상천지에 놀라운 재인(才人)이 많다지만, 천기(天氣)와 영통하는 능력을 타고난 사람은 또 처음 보는구먼.”
누가 하는 말인가?
여성스러우면서도 상당히 고풍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재미있구나. 도(道)를 좇거나 진리에 목을 매는 수행자들이 많지만, 세상은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천도(天道)에 닿은 영혼의 기형아도 툭툭 내놓는군.”
묵비와 진양은 경악했다.
방금 그 목소리는 바로 기우희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우희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녀의 입이 열렸음에도, 그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나 역시 도를 좇으며 살았지만, 근본은 무(武)에 닿아 있는지라 그리 원했던 진리는 어디로 가고 신이(神異)한 능력만 얻게 되었네. 그마저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건 아니네만.”
스륵.
기우희가 묵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묵비는 저도 모르게 오금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누, 누구?!’
푸른 서기로 가득하던 기우희의 눈은 어느새 맑고 깊은 호수처럼 변해 있었다.
인자함과 치기, 놀라운 지혜와 올곧은 정의로 물들어 있는 노인의 눈동자.
기우희의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그녀의 눈과 목소리가, 그들이 모르는 미지의 존재에게 강탈당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달리 의도가 있어서 이런 건 아니었네. 이 처자의 상단전은 통제가 안 되는군. 나 또한 이런 식으로 타인의 그릇으로 들어온 건 처음이라 당혹스럽긴 매한가지라네.”
“……누구시죠?”
묵비의 얼굴은 놀라움과 진지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무당산에 거하고 있는 도사 나부랭이일세.”
“네, 네?!”
“이런, 시간이 별로 없군. 이왕지사 이렇게 연결된 것, 말을 짧게 끝내겠네. 자네들의 일행은 무당산에 있네. 굳이 멀리 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자네들도 이리 오게나. 물론 그들 모두 무사하네.”
“일행이라 함은…….”
그때, 기우희의 눈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콜록!”
그 자리에 쓰러진 기우희가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콜록콜록!”
“기 의원님! 괜찮아요?”
“괘, 괜찮아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이 끝난 이후에도 기우희는 몇 번이나 기침을 뱉었다. 마치 속이 뒤집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기우희의 호흡이 진정된 것은 그로부터 일각이 지나서였다.
“후우.”
한 차례 숨을 길게 내쉰 기우희의 얼굴은 이전보다 창백했다.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는 짙은 놀라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대단해요. 어떻게 그런 광대무변한 깨달음이……!”
“네?”
“……아, 죄송해요.”
기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당산으로 가요.”
묵비의 눈이 깊어졌다.
진양이 말했다.
“조금 전에 그 일은 대체 무엇이었소? 혹시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이오?”
“아니에요. 무당산의 어느 도인과 저도 모르게 영통(靈通)이…….”
말을 하던 기우희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가죠. 지금 연 대수님과 강 검사님 모두 무당산에 계세요.”
“에엥?!”
진양은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은 얼굴이었지만, 묵비는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다치지 않고 잘 있나요?”
그런 걸 기우희가 어찌 안다고 묻는가 싶었지만, 기우희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척이나 잘 있어요.”
“……좋아요.”
묵비가 짐을 챙겼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무당산으로 가죠.”
* * *
연호정은 다소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노도인을 바라보았다.
대화를 나누던 노도인은 갑작스레 대화를 중지했다. 그러고는 저 멀리 남쪽 인근을 보며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허어.”
노도인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굉장하군.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갑자기 무슨 말인가?
“무공에 재능이 출중한 자는 물론 하나를 읽으면 열 권의 책에 통달하는 문재(文才)도 보았고, 술법에 재능이 있는 아이, 손재주가 뛰어나 배우지 않아도 칼이나 세공품을 만드는 이도 보았지. 한데…….”
“……?”
“천기(天氣)의 축복을 타고난 아이라…… 허허, 수행자들이 보면 그야말로 기겁을 하겠구먼.”
갑자기 다른 소리를 하고 있지만, 연호정은 노도인이 말하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기우희?”
“음, 그래. 그 아이 이름이 기우희라 하였지.”
노도인의 얼굴에 은근한 근심이 일었다.
“참으로 놀라운 아이지만 너무 위험해. 방대한 상단전을 타고난 이는 많지만, 그처럼 방비가 미약한 이는 달리 없을 게야. 구멍이 숭숭 뚫린 나무판자로 바닷물을 막고 있으니, 언제고 크게 문제가 될 것이야.”
“…….”
“뭐, 어쨌든 이곳으로 올 테니 나중에 다시 보기로 하고.”
노도인이 연호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
묘한 시선이었다.
한없이 깊고, 한없이 맑다. 도인보다는 무인의 눈빛에 가깝지만, 그 깊이가 너무 대단해서 굳이 구분을 둘 필요조차 없다.
그야말로 깨달음이 차고 넘치는 눈빛이었다. 어떤 종류의 깨달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방대한 양의 지혜를 절묘하게 수습하여 한데 담아내고 있는 노도인의 눈빛은 연호정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신비로 물들어 있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검선 탁무자 노선배, 맞습니까?”
“검선이라…… 그것 참 오랜만에 들어 보는 별호로고.”
노도인, 탁무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검의 신선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신선은커녕 도사다운 도사도 못 되는 늙은이에게는 분에 넘치다 못해 부끄럽기 그지없는 별호야.”
그 말로 확실해졌다.
이 사람은 탁무자가 확실했다. 당금 무당파 최고의 원로이자 무림이 숭상하는 성천십삼좌, 그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강자인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참으로 묘한 만남이었다.
홀린 듯 무당산으로 올라온 일행들. 지금 와서는 어느 길로 어떻게 올라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봉우리에 도착하니 사방이 안개요, 기분은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그게 전부였다. 무당의 전대 도사들을 만난 직후 이곳 봉우리에 올라오기까지의 기억이 불분명했다.
연호정의 기억이 다시 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처음 이곳에 앉아 사방을 둘러볼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곡경과 강량을 명확히 인식했고, 이름 모를 노도인의 얼굴과 목소리도 분명하게 기억했다.
‘이상해.’
연호정은 기이함을 느꼈다.
‘아무리 정기신(精氣神)이 흔들렸다지만 이럴 수는 없다.’
자신은 물론 곡경 역시 무극을 개방한 강자였다.
성천의 영역에 도달했느냐 못 했느냐를 떠나, 무극을 연 순간 천지의 기운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원한다면 대량의 자연기를 삽시간에 흡수, 통제, 분석할 수도 있다.
이 정도면 가히 신인(神人)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세인들이 성천십삼좌를 불세출(不世出)의 절대고수라고 부르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고차원적인 술법은 물론 진법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대자연의 기운에 너무나도 민감하여, 허실을 판단하는 능력과 상단신기(上丹神氣)에 대응하는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우리가 이런 곳에서……?!’
그때, 탁무자가 말했다.
“혼란스럽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이 근방은 선기(仙氣)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네들과 같은 일을 겪을 수밖에 없어. 설령 소림의 권신(拳神)이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림의 권신.
신선제왕의 신(神)을 담당하는, 당금 무림에서 가장 천하제일에 가깝다는 권신 무허대사를 칭하는 별호였다.
“뭐, 그래 봤자 누굴 속인다거나 가두는 용도로는 쓸 수 없어. 애초에 그런 식으로 쌓인 기운도 아니고. 만약 네 녀석이나 귀군 놈이 작정하고 살기를 품었다면, 이곳의 선기도 놀라서 달아나 버렸겠지.”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그러한 살심을 품기도 어렵겠지요.”
“그 또한 맞는 말이지. 선기(仙氣)에게는 적과 아군이 없어. 자네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자네들을 어찌할 수 없네. 그런 마음을 품는 순간 사방천지를 메웠던 선기가 몽땅 도망쳐 버릴 게야.”
탁무자가 미소를 지었다.
“분란 없이 무위(無爲)의 근본을 느끼게 만드는 도장(道場). 반선의 강자라도 어지간해선 피를 볼 마음이 들지 않게 하는, 자네들의 표현으로 중립 장소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네.”
“무당산에 이런 곳이 있었습니까?”
“있지. 지금 자네가 그곳에 있잖나.”
“하지만…….”
“왜 알려지지 않았냐고? 그럴 수밖에.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들이지 않으니까. 무의 한계를 돌파한 고수라도 이 봉우리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네.”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다.
말만 들어 보면 가히 무릉도원(武陵桃源)에 가까운 곳이다. 아름다운 기화요초나 고귀한 동물들이 뛰어다니지는 않지만 말이다.
연호정은 내심 당황했다.
탁무자를 만난 지금도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이 가질 않았다.
“재미없는 얘기는 이쯤 하지. 나는 자네가 보고 싶었고, 이런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었어.”
“제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있지. 사실 지금도 모호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묻고 싶은 게 있네.”
“무엇입니까?”
탁무자가 미소를 지었다.
“나이가 몇이냐, 네놈은.”
“그게 궁금하셨습니까?”
“보이는 나이 말고.”
“……?”
“족히 오십 년은 넘게 살아온 것 같은데? 아니더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