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9화. 삼파전 (7)
황제 폐하의 사람이 되어라.
뜬금없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빈틈을 찌르는 한마디였다.
‘…….’
연호정이 차가운 눈으로 곡경을 바라보았다.
훅!
불안정했던 기도가 한순간 무섭게 다듬어졌다.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기파. 스스로의 정신을 다잡기 위해, 그리고 만에 하나를 위해 전신을 긴장시켰다.
‘언제고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예상했지만…….’
빌어먹을.
“왜 말이 없느냐?”
“…….”
“황제 폐하의 사람이 되기 싫은 거냐?”
막 전투가 끝난 시점에 이런 말을 들으니 굳건했던 정신력도 휘청거리는 듯했다.
‘생사결 뒤에 또 다른 생사결이라. 나도 방심했군.’
저 말은 외통수다.
언제, 어떤 상황에 들어도 외통수다.
이유는 분명했다. 흑과 백, 무림 양측의 교각 역할을 하고 있다지만, 그는 분명 백도 정파 소속이었다.
백도 정파는 대륙의 치안과 민생 안전, 그리고 정의(正義)라는 절대 가치로 움직인다.
그런 사람에게 황제 폐하의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면 그 자체로 대역죄다. 물론 실제로 대역죄를 저질렀다며 끌고 갈 수는 없겠지만, 소문이 나는 것만으로도 가문은 물론 무림맹에도 엄청난 피해가 갈 수 있다.
“왜 대답이 없지?”
곡경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설마하니, 황제 폐하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소?”
“하면 어찌 대답이 없는 거냐? 천하 만민은 마땅히 황제 폐하께 고개를 조아려야 하거늘,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강량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역시 저 질문의 무거움을 깨달은 것이다.
가만히 곡경을 보던 연호정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천하 만민이 황제 폐하께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고 하셨소?”
“물론이다.”
“그렇게만 생각했다면 착각이외다.”
화아아악!
곡경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가 회오리를 만들었다.
“죽어 마땅한 망발이로구나.”
예상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별수 없지.’
듣기 좋은 말로 이 상황을 타파하는 건 의미가 없다.
연호정은 솔직함을 택했다.
“선배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고 할 필요도 없지만, 질문이 그러하니 나도 묻겠소. 국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있소?”
“뭐?”
“내 감히 예상하건대, 선배는 국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거요. 황제 폐하만을 위하는 사람이니까.”
“개소리군. 황제 폐하가 곧 제국이요, 천하다. 폐하를 위하는 길이야말로 제국을 위하는 길이니라.”
“그래서 세상이 이 꼴이 되었소?”
“……이놈!”
“국가는 국민의 생존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가 있소. 높으신 분이라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지켜 주고 잘 살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께서 어떤 세상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천자(天子)가 되어 천하를 통치하길 바라신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야 할 것 같소.”
“죽어 마땅할 죄의 연속이구나.”
“이 정도 발언도 못 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발전이 없는 거요.”
“이놈! 적어도 무림인들은 그에 대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제국의 힘이 약해진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무림의 존재야!”
“역사와 정치를 논하기에 어울리는 자리는 아니오. 나는 그저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오. 더 깊은 얘기를 원하신다면 나중에 자리라도 만들어 주시오.”
우두두둑.
곡경의 목소리에 생생한 분노가 담겼다.
“즉, 네놈은 황제 폐하를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렷다?”
“그건 다른 문제지.”
“무슨 말이냐?”
“황제 폐하의 정통성은 천하 모두가 인정할 것이오. 그 부정할 수 없는 정통성 때문에, 황후 폐하와 태감도 중간에서 눈치만 보고 있는 거 아니오?”
“……!”
“황궁이 바로잡히길 원하오. 모두의 삶을 위해서 그러하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정도(正道)를 걷겠소. 그러나 황제 폐하 개인을 위해 움직이라 한다면, 나는 그러지 않겠소.”
“천하의 다시 없을 대역 죄인이구나.”
“그건 선배 생각이지.”
“뭐라?”
“폐하의 시종이 될 생각은 없지만, 천하를 위해 움직이고 있소.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
“황제 폐하의 존재가 곧 천하라고 말한 것은 선배였소.”
곡경의 눈이 깊어졌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궤변처럼 들려도 어쩔 수 없소.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오.”
“…….”
“이해하기 어렵고 열만 잔뜩 받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내 손에 죽겠다?”
“무당파로 도망칠 거요.”
“……?!”
“해야 할 일도 많고, 결정적으로 지금 죽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능청맞은 대처였다.
우르르릉!
곡경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사기가 눈앞에서 휘몰아치는 천둥 번개처럼 위협적으로 변했다.
‘으윽!’
강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내력 소모가 극심했다. 성천의 고수는 그 자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타인의 심신을 위협할 수 있는 재해였다.
가만히 있을 때는 모르지만, 기도를 개방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사람 이상의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손을 쓰지도 않을 거면서 위협은 그만하시오. 내 사람이 힘들어하오.”
“…….”
훅!
무섭게 달아오르던 곡경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다.
“후욱!”
강량이 숨을 몰아쉬었다. 초절정고수, 내가고수로서는 정점에 도달한 무인조차 호흡이 흐트러질 정도로 막강한 기세였다.
곡경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상했나?”
“중간에.”
“…….”
“그 성격에 정말 죽이자고 들었으면 내 입부터 틀어막았겠지.”
“천하의 지략가 나셨군.”
“지략이라기보다는 자신감이오. 비왕을 어떻게 죽였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섣불리 손을 썼다가는 선배도 피 좀 보지 않겠소?”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래의 위험이 확실시된다면 목숨 걸고 잡아 죽였을 것이다.”
“그래서 안심했소.”
곡경이 인상을 찡그렸다.
“참 애매한 놈이야. 순간순간 죽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 어떨 때는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선배는 참 솔직해서 좋소이다.”
“시끄럽다.”
투덜거리던 곡경이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올라갈 거요?”
곡경의 눈이 반짝거렸다.
“느끼지 못한 거냐?”
“음?”
“무당에서 사람을 보냈다.”
“……?”
연호정이 기감을 확장했다.
‘……!’
곡경의 말이 맞았다. 저 멀리 무당파 쪽에서 몇 명의 고수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부드럽고 허허로우면서도 빈틈이 없는 기도. 놀랍게도 하나같이 강량을 웃도는 기세들이었다.
‘당대 장로들인가? 하지만 무당의 이름이 드높다 한들 너무나 완숙해. 이 정도 무력이라면…….’
연호정의 마음을 읽은 듯 곡경이 말했다.
“그래, 전대다.”
“……역시.”
전대 장로들.
무당산맥 인근에서 온갖 전투가 벌어졌던 상황이다. 사람을 파견할 거면 진즉에 파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야 고수들을 파견한 것은, 현역이 아닌 일선에서 물러난 전대의 노고수들을 부르기 위함이었던 모양이다.
‘전대의 고수라면 탁무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탁무자, 검선께서 보내셨는가.’
그때, 곡경이 물었다.
“심하게 당했느냐?”
“무슨 말이오?”
“내력은 불안정하고, 맞추긴 했지만 뼈도 부러졌군. 내상도 제법이야. 하지만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된통 당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맞소.”
연호정을 보는 곡경의 시선이 묘해졌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보시오?”
“……아직 깨닫지 못했는가.”
“……?”
“뭐, 스스로 깨닫는 게 좋겠지.”
뭐지, 이 의미심장한 말은?
곡경이 다소 편안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참으로 무엄하긴 하지만, 사실 네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야.”
“음?”
“국가가 제 역할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 나라가 피폐해진다는 것은 곧 나라의 근간인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진다는 것. 백성이 내는 피 같은 세금으로 배부르게 사는 인간들이 정작 제 일을 등한시하면 안 되겠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곡경이 고개를 저었다.
“어느 한 사람의 잘못만으로 나라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아. 심지어 외세의 침략을 코앞에 둔 시점이라면 더더욱.”
“…….”
“다만, 너희는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을 올바르게 바로잡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
“노력으로도, 실력으로도, 진하고 진한 핏줄로도 타파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서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귀인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설마?”
“…….”
“황제 폐하께서는 예전부터……?”
“목이 칼칼하군.”
곡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당의 제운종(梯雲從)이 천하일절이라더니, 그 말이 틀리진 않은 것 같군. 벌써 코앞이야.”
“선배.”
“무당산의 산수(山水)가 그리 청량하다고 하니 몇 모금 뺏어 마셔야겠어. 안 주겠다고 하면 궁둥짝을 두들겨 줘야지.”
몸을 돌린 곡경이 저 멀리 언덕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여섯 명의 노도사가 이곳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연호정이라고 했나.”
“그렇소.”
“비왕을 처리한 것은 고맙다고 해 두마.”
“…….”
“그리고 축하한다.”
“무엇을 말이오.”
“성천의 울타리로 들어온 것.”
“……!!”
“너도 성천의 자리에 이름을 올리게 될 것이다. 비왕 공손백룡을 죽인 신진(新進)으로서.”
곡경이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부터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 * *
후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이 몹시 건조했다.
화등이 춤을 추었다. 곳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초가 함께 어우러져, 어두운 그림자를 제멋대로 만지작대고 있었다.
“어르신.”
훅!
화등의 춤이 멈추었다.
바람은 잠잠해졌고, 어둠은 더 깊어졌다.
“무엇이냐?”
“황후의 비궁에 찾아온 이들의 면면을 알아냈습니다.”
“호오, 벌써?”
“…….”
“누구더냐?”
“강동 연씨가문의 수장 연위와 하북팽가의 팽무강, 그리고 호북 제갈세가의 여식이랍니다.”
“쟁쟁한 이름들이군. 다만…….”
“…….”
“너무 이쪽을 의식했구만. 못해도 소림 방장이나 무당의 장교 둘 중 하나는 올 줄 알았더니, 고작 육가의 수장 둘과 머리도 여물지 않은 계집년 하나라…….”
“어떻게 할까요?”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들어왔는데 곱게 보낼 수 있겠느냐. 당연히 죽여야겠지.”
“알겠습니다.”
“하나.”
“…….”
“죽일 수 있다고 당장 죽인다면 앞으로의 일이 어찌 되겠느냐.”
“…….”
“황궁 쟁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품위와 격식이니라. 그래서 어렵고, 그래서 더럽지.”
“…….”
“황후 측에 확실히 붙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조금 더 주시해야겠다. 그쪽에서 무슨 얘기가 돌고 있는지 세밀히 조사하여 보고토록 하라.”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훅!
그 많은 초가 모조리 꺼지며 주변이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폐하께 갈 것이다. 아랫것들에게 준비하라 이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