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8화. 삼파전 (6)
“……!”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이 충돌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애초에 산맥 뒤에서 터진 힘의 충돌이라 아무리 눈이 좋아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무신(武神)들의 부딪침으로 발생한 미세한 진동만큼은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연 공자?’
잠시 후, 진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느꼈소?”
“응.”
“이거 설마……?”
“맞아. 연 공자야.”
진양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럴 수가.’
종남 전쟁 때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적장끼리 충돌했을 때의 기파를 느껴 보지 못했다.
그는 연호정이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등장하는 모습만을 보았다. 그러고도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수많은 적을 격파해 내는 모습에 등골이 다 서늘했더랬다.
하지만 지금 이 힘은 차원이 달랐다.
충격파는 느끼지 못했지만, 충격파로 인해 발생한 진동은 느낄 수 있었다.
“거리가 얼마인데 여기까지…….”
차원이 다른 무공.
인간의 한계, 무공의 한계를 뛰어넘은 반선들끼리의 부딪침은 그 자체로 천재지변과도 같았다.
“잠깐.”
진양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거요? 얼른 가서……!”
“연 공자는 이곳에서 기 의원과 함께 기다리라고 했어.”
“하지만!”
“연 공자는 지금껏 자신이 한 말을 철저히 지켜 왔어. 특히 전투에 관해서는 더더욱.”
“…….”
“괜찮을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진양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너무 속 편한 거 아닌가?’
속이 편한 건지, 절대적인 신뢰가 쌓인 건지 알 수가 없다.
뭐가 어찌 되었든 이곳의 장(長)인 묵비가 자리를 고수하자고 했으니, 그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혹시 모르니 기 의원 옆에 있겠소.”
“좋을 대로 해.”
진양이 기우희가 자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라지자 묵비의 눈이 재차 흔들렸다.
‘괜찮을 거야.’
누군가는 말한다. 연호정은 가끔 무모해질 때가 있다고.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얼핏 무모해 보이는 그 행동 뒤에 깔린 치밀한 계산과 자신감을.
이토록 조심스레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 적과 부딪쳤다면, 분명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 아니,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이 자리에서 버틸 수 있었다.
홍련궁을 쥔 묵비의 손에 땀이 배어들었다.
* * *
파박!
곡경이 신법을 멈추었다.
그의 뒤를 따라오던 강량과 가면인들도 일제히 멈춰섰다.
“……!”
고개를 돌려 충돌지를 보는 곡경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강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놀라움은 곧 걱정으로 변했다.
“……엄청나군.”
이렇게까지 강렬한 충돌이라니.
무극을 개방한 고수들끼리의 정면충돌이다. 그 거센 여파에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했다.
“비왕과 정면으로……?!”
강량이 곡경을 돌아보았다.
곡경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량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가시지요.”
“…….”
“형님은 형님의 전장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잠시.”
“……?”
“잠시 기다려.”
“예?”
시간이 없다고 말하려던 강량은 순간 주춤했다.
곡경의 표정은 참으로 묘했다. 당황으로 물들었던 얼굴에, 조금씩 조금씩 흥미진진한 기색이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선배님?”
“허!”
“……?”
“뭐야…… 어설픈 마기(魔氣)에, 정면충돌에…… 그리고…….”
“예?”
“…….”
“선배님?”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미묘하게 바뀌어 가던 곡경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이겼다?!”
뭐 하는 거야, 이 양반?
강량 역시 감각을 극단적으로 활성화시키면 곡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강량은 곡경의 이 반응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무당파로 가시지요.”
“천천히 가도 돼. 놈이 비왕을 잡았어.”
“……예?!”
“아니, 굳이 우리끼리 갈 필요는 없겠군. 초반에 괜히 나쁜 인상만 줄 테니까. 지금에 와서는 갈 이유도 없어졌고.”
곡경이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은 채 팔짱을 꼈다.
“놈을 기다린다.”
강량은 얼떨떨했다.
“형님이 비왕을 잡았다는 말입니까?”
“그래. 죽였다.”
“……!!”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그 비왕을 죽였다고?’
물론 연호정에게 나름의 생각이 있을 거라 믿었다.
실제로 기량이 높은 적일 경우, 연호정은 다 대 일의 전투보다 일대일의 전투를 선호했다. 워낙 도발에 능하고 허를 찌르는 전투에 최적화가 되어 있어, 한두 수 위의 고수도 기어이 잡아낼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왕을 잡았다니?
비왕은 곧 신선제왕의 일인으로, 성천십삼좌에 이름을 올린 진짜 고수다. 지금껏 연호정이 상대했던 고수들 역시 대단했지만, 무극을 열었더라도 성천과의 차이는 분명했다.
‘이럴 수가!’
강량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형님이 성천을 이겼어!’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성천십삼좌(聖天十三座)는 곧 당대 천하제일을 논하는 무적의 고수들을 칭함이다.
고수별로 무력의 편차와 특성은 존재할 테지만, 그래도 성천은 난공불락의 성(城)이었다. 그 누구도 성천을 이길 거라는 생각을 못 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 당대의 전설이, 신화가 깨져 버린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믿고 의지하는 의형제의 손에.
‘형님!’
경이로운 무력이다.
이 정도면 단순한 운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상대보다 기량이 높았든 낮았든, 성천의 왕(王) 중 하나를 잡았다면 그 자체로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강량이 주먹을 꾹 쥐며 격동을 음미하고 있을 때.
‘뭐지?’
담담한 기색이었지만, 기실 곡경은 목덜미가 다 후끈했다.
강량의 놀라움보다 그의 놀라움이 훨씬 더 컸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내공을 다 끌어다 써야 할 정도로 그는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이겼지? 분명 놈은 나보다도 아래인데? 심지어 정면충돌에서도 버텼단 말인가?’
공손백룡과 마주했을 때.
곡경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진짜 무력이 신선제왕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라는 걸.
아니, 단순 투쟁술의 깊이감만 따져 보면 삼군만도 못했다. 곡경은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했다. 자기 혼자서는 절대 비왕을 잡을 수 없다고.
아니, 일대일 전투라면 높은 확률로 자신의 패배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비왕의 신법이 워낙 규격 외였기 때문이었다.
상식을 불허하는 절대의 속도. 살기를 읽고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근접 거리까지 도달하는 신(神)의 경공술.
무(武)의 이치를 정면으로 무너트리는 비인(非人)의 무도(武道)다. 정파는 물론 흑도 사파, 마도의 무공에서도 그처럼 극단적인 무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비왕의 경지는 삼군에 필적했다. 투쟁술의 깊이는 낮지만, 무공의 성취만큼은 삼군보다 못하지 않은 것이다.
곡경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대일 전투로 접어들었다면, 십 초 내로 승부가 났을 것이다.’
공손백룡의 그 속도는 다른 성천의 경공술처럼 무한정 유지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정도 속도를 끝없이 유지한다면 이미 천하제일이라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즉, 놈이 원하는 생사결은 십 초, 길어 봤자 삼십 초 내외일 것이다. 단기간 안에 승부를 보지 못하면 승부의 추가 급격히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곡경에게는 공손백룡의 속도를 잡아낼 만한 수단이 없었다.
즉, 높은 확률로 패배를 맞이할 것이다.
우둑!
팔뚝을 잡은 그의 손가락에서 거친 소리가 울렸다.
‘있었단 말인가.’
곡경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그 반응조차 하기 힘든 속도에 대응할 만한 수단이, 녀석에게 존재했다는 것인가?’
도대체 어떤 무공을 익힌 것인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놈인지.
‘수단이 있어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오히려 어설프게 썼다면 비왕에게 역공을 당했을 터.’
꿀꺽.
곡경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가진 수단을 가장 효율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감각을 지녔다는 뜻이다.’
즉, 전투에 능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잘한다는 수준을 넘어, 자신보다 기량이 월등히 높은 고수를 기술(技術)과 경험, 감으로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능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천재다.’
경험이 많아도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게 있다.
놈은 그 벽을 넘었다.
경험으로도, 기술로도, 감으로도 넘을 수 없는 격차를 훌쩍 뛰어넘어 버렸다.
‘그런 놈이 정말 존재하는 거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훅!
불안정한 기도, 물씬 풍기는 피 냄새.
연호정이 일행 앞에 도달했다.
“형님!”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역시 가지 않았군.”
짧지만 폭발적인 힘을 소비했다. 감각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강량이 서둘러 연호정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 며칠 푹 쉬고 싶을 정도다. 빌어먹을,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 난리네.”
투덜거리는 걸 보니, 그래도 심각한 상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강량의 눈이 떨려 왔다.
“형님. 성천을 잡으셨습니다.”
“아니야.”
“예?”
“그놈은 성천이 아니야. 성천의 휘황찬란한 이름값 속에 기생하고 있던 머저리였을 뿐이지.”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비왕이라고요!”
“삼교의 주구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멍청하지 않습니다. 비왕이라는 칭호를 붙인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강량이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축하합니다, 형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사람 죽이고 왔는데 축하라니. 너도 어지간히 살벌해졌다.”
“적이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때, 곡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욱!
연호정의 불안정한 기도를 너무나도 손쉽게 뒤덮어 버리는 곡경의 사기(邪氣).
강량의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싸울 때는 몰랐지만, 정면에서 마주하는 곡경의 기도는 가히 비왕 못지않았다.
“왔냐.”
“왔소.”
“죽였냐?”
“죽였소.”
연호정이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공손백룡의 머리통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툭!
바닥을 구르는 공손백룡의 머리.
하얗게 질린 그 얼굴은 경악과 허무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가만히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곡경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죽인 거냐?”
“지금은 그런 걸 논할 때가 아닌 것 같소.”
“…….”
“어떻게 이기긴 했지만, 그래도 무당파에는 들르는 게 좋겠소. 그쪽의 고수들도 이곳에서 벌어진 싸움의 충격파 정도는 느꼈을 거요. 불안감을 조성하고 떠날 필요는…….”
“너.”
“……?”
“나이가 몇이냐?”
난데없는 물음에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바쁘게 살다 보니 잊었소. 서른은 안 된 것 같소만.”
“서른이 안 되었다…….”
괴물 같은 놈.
곡경의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사기의 농도 역시 짙어졌다.
“강동 벽산연가의 장남이라고 했지?”
“그렇소.”
“…….”
“문제라도 있소?”
“문제라…….”
우두둑!
곡경의 양손에서 또다시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량이 긴장하며 대검을 세웠다. 곡경이 당장이라도 연호정을 공격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나 곡경은 강량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무림맹과 묵룡부 사이를 잇는 동맹 책임자.”
“……?”
“천하제일 후기지수. 앞장서서 삼교의 책략을 깨부순 젊은 장수.”
“…….”
“거기에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비왕을 패사시킨 무공이라.”
“…….”
“너무 위험한 놈이로고.”
“그래서.”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죽이시게?”
“대답부터 듣고 나서.”
“대답?”
곡경이 턱을 치켜들었다.
“너, 황제 폐하의 사람이 되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