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37화 (737/963)

737화. 삼파전 (5)

가만히 연호정을 노려보던 공손백룡이 이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치이이이익!

목에 입은 자상과 상체를 사선으로 가로지른 자상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역시 그렇군.’

우우웅! 우우우우웅!

사납고 날카롭기만 했던 공손백룡의 기운이 묵직하고도 음험하게 변했다.

그 기운은 순식간에 색(色)을 바꾸어, 어느새 어둡고 끈적한 기운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광혈교의 사제장이라.’

마공(魔功)이다.

마공은 마공이되, 진짜 마공은 아니었다. 당가에서 싸웠던 귀신인지 뭔지 모를 육사제장 놈에게서 풍겼던 진짜 마기(魔氣)와 비교하면 훨씬 더 옅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진기의 속성에 마(魔)가 담겨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번쩍!

공손백룡의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주작공의 화기(火氣)로 한 점 티 없이 활활 불타오르는 연호정의 적안(赤眼)과 달리, 핏빛 눈동자 주위의 흰자위조차도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섬뜩한 눈빛. 기운이 달라지고 눈빛이 달라지자 사람의 인상 자체도 달라진 것 같았다.

‘이래서 몰랐던 거지.’

진짜 마공을 익혔다면, 아무리 벼락처럼 움직일 수 있어도 마기의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손백룡의 무공은 신공과 마공이 합일된,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종류의 무공이었다.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하마. 너 같은 애송이에게 한 방 먹을 줄은 몰랐어.”

공손백룡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쿵!

단순하게 내디딘 일 보에 일대가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렸다.

“상해 버린 자존심, 더 다양한 속도로 끝을 보고 싶었지만, 가진 재주가 많은 듯하니 괜스레 시간 낭비는 하지 않겠다.”

우우우우우우웅.

공손백룡이 든 소도(小刀)가 점점 검은빛으로 변했다. 장심(掌心)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이 칼날을 물들이고 있었다.

먹물처럼 검고 깊은 색, 말 그대로 묵도(墨刀)였다.

번쩍!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역시나.’

저 살기, 저 마기.

그리고 저 암울하기 그지없는, 주위의 생명력을 모조리 빨아들일 것만 같은 기괴한 바람.

당가의 육사제장이 구사했던 그 무공, 신마구살도(神魔九殺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손백룡이 눈을 감으며 연호정에게 칼을 겨누었다.

“죽어라.”

순간 연호정이 상체를 사선으로 내렸다.

퍼어어어어엉!

끔찍한 폭음과 함께 연호정 후방에 있던 나무들이 마구 폭발했다.

번쩍!

거리를 좁힌 공손백룡이 연호정을 향해 묵도를 내리쳤다.

이전처럼 상식을 파괴하는 속도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무척 빨랐다. 적어도 연호정보다 한 수 위의 속도임은 분명했다.

연호정이 월도를 올려 쳤다.

쩌어어어엉!

제아무리 올려 쳤다 해도 백호공의 힘과 주작공의 살초가 어우러진 일격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호정의 몸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힘에서 밀려 버린 것이다.

공손백룡의 묵도가 질풍처럼 움직였다.

번쩍! 번쩍! 번쩍!

밤하늘을 수놓은 수천 개의 별을 담아 놓은 것처럼.

도광(刀光)이 번뜩이다가 사라질 때마다 수백 개의 파편으로 흩어지는 빛의 산란이 그야말로 황홀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쾅! 쾅! 쾅!

도광이 사라지는 순간 바닥에 일 장이 넘는 도흔이 몇 개나 새겨졌다. 길이는 일 장이지만, 깊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일격의 위력이 절대적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

공손백룡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연호정은 그 빠르고 날카로운 도법을, 불안전하게나마 전부 피해 냈다.

맞상대하는 것도 아니요, 부딪쳐 깨트리는 것도 아니다. 상반신의 탄력과 반사 신경만으로 신마구살도의 초식을 모조리 회피해 버린 것이다.

“감히.”

공손백룡의 좌수가 연호정에게 향했다.

번쩍!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연호정은 자신의 몸이 덜컥 굳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상단전!’

끼아아아아악!!

묵도에 거대한 기운이 모이는가 싶더니, 칼날 속에 끔찍한 귀신의 형상이 새겨졌다.

‘그때 그 무공이다!’

신마구살도의 초혼신마참이었다.

다만, 불안정한 영육(靈肉)을 갖고 휘둘렀던 육사제장의 초혼신마참보다 훨씬 더 사납고 본격적이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칼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어지럽고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히 기운의 집약 때문이 아니었다.

칼의 궤적, 도(刀)의 물리적인 초식(招式)에서 끝나는 무공이 아니다.

공손백룡의 손에서 올올이 풀려 나오는 상단전의 기운이 마공과 공명하며, 공격을 시전하기도 전에 적에게 끔찍한 지옥도(地獄道)의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지울 수 없는 환상을 통한 정신 공격까지가 초혼신마참이다. 육사제장과 달리 완전한 영육을 지닌 공손백룡의 신마구살도, 그들이 떠받드는 혈신(血神)이 창안한 무공의 진정한 현현(顯現)이었다.

‘역시!’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무극을 개방한 절대자들의 무공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 이 강함은.

결코 연호정의 예측을 상회하지 못했다.

크허어엉!!

연호정의 월도에 먹잇감을 노리는 호왕(虎王)의 형상이 환상처럼 새겨졌다.

끝없는 대지를 질주하는 야수왕의 패기가 거기에 있었다. 백호공의 모든 기운을 끌어 올린 그의 월도는 신마구살도의 초혼력을 씻어 내고, 강철의 성벽과도 같은 온전한 정신을 만들어 냈다.

신마구살도, 초혼신마참(招魂神魔斬).

호왕구벽세, 백왕진천무(百王振天舞).

시커먼 마도(魔刀)와 새하얀 신도(神刀). 악귀를 불러들인 칼과 수호신을 소환한 칼.

흑과 백, 흑백의 무극도(無極刀)들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이 부딪친 곳에서부터 반경 삼십여 장이 통째로 박살 나기 시작했다.

뜨겁고 사나운 기운의 부딪침. 무극에 달한 초고수들의 진신진력.

그 형용할 수 없는 충돌에 대지가 제멋대로 갈라지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뒹굴었다.

사방에서 은신 중이던 공손백룡의 수하들 모두가 그 파괴력을 이기지 못하고 증발했다. 피를 뿜지도 않는다.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산화해 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르르릉!!

사방을 뒤집어엎는 열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다가, 다시 차가운 공기가 충돌의 중심을 향해 휘몰아쳤다.

쾅!

짧고 강렬한 굉음과 함께 재차 터져 나온 충격파가 반경 삼십 장을 넘어 사십여 장 범위까지 벼락처럼 뻗어 나갔다.

쿠르르르릉.

거대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신(神)들의 격전을 화려하게 알렸다.

번쩍!!

미친 듯이 밀려 나가는 연호정.

명극 이후, 아니 명극과의 싸움까지 통틀어, 회귀한 이래 가장 최대 출력으로 뽑아낸 힘끼리의 정면충돌이었다.

그 충격에 정신이 다 아찔했지만, 그의 무서운 정신력과 상식을 벗어난 전투 감각은 이미 상대의 다음 공격을 포착하고 있었다.

‘온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쳐들었다.

귀신처럼 사납고 뜨거운 마기는 어디로 갔는지, 기존의 진기로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여 연호정의 코앞까지 도달한 공손백룡은 순간 아차 싶었다.

‘눈!!’

이미 휘둘러 버린 소도는 연호정의 목을 베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사신기를 거쳐 도화의 이름을 버린 연호정의 사신귀안(四神鬼眼)에 걸려 반 박자 느려지고야 말았다.

연호정의 발이 대지를 박찼다.

무극의 힘을 한껏 담은 두 주먹이 공손백룡의 상반신 전체에 직격타를 날렸다.

콰콰콰콰쾅!

“커허억!”

공손백룡이 피를 토하며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우두둑!

연호정의 좌측 팔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순간적으로 뿜어낸 과다한 내공력,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인 공손백룡의 속도와 신체 강도에 팔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튕겨 날아간 공손백룡의 피해는 연호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쾅! 콰쾅! 쾅!

땅에 부딪힐 때마다 굉음이 터진다. 엄청난 속도로 땅을 구른 공손백룡이 바위 두 개와 거목 세 그루를 박살 내고 나서야 멈추었다.

콰앙!

혈익휘천으로 질주하는 연호정의 속도는 눈이 부셨다.

우두둑!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동시에 광명신단의 힘으로 부러진 뼈를 맞추었다. 뼈가 맞춰지는 그 순간, 연호정은 공손백룡의 삼 장 앞에 도달해 있었다.

번쩍!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몽땅 맞았음에도 공손백룡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땅을 박차 하늘로 날아오르는데,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도가 연호정의 혈익휘천 못지않았다.

‘도주!’

허(虛)를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허(虛)를 기다리고 실(實)의 무공을 준비해 반격했다.

즉, 마공으로 상대하다가 신속(迅速)의 공격으로 전환하리라는 걸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뜻.

헤아릴 수 없는 아수라장을 거쳐 오며 연마한 극상승의 전투 감각이 두 사람의 힘 차이를 무(無)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안 돼! 이대로는 패배다!’

경지의 차이, 내공의 차이, 결정적인 힘의 차이.

상대보다 분명히 우위에 있었던 그였지만, 이 정도 치명타를 입은 순간 전세는 역전되었다. 상대가 실수하지 않는 한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비왕 공손백룡, 아니 광혈교의 오사제장(五司祭長) 인생에 있어 이보다 더 끔찍하고 치욕적인 승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극살의 권타로 공손백룡에게 치명타를 가한 순간, 연호정의 머리는 그가 어느 방향으로 도주할지에 대한 그림 이십여 가지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

하늘 높이 날아올라 무당산 방향으로 몸을 돌렸던 공손백룡은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감각을 맛보았다.

콰앙!

살벌한 폭음과 함께 그의 몸이 땅으로 떨어졌다.

“우웨에엑!”

한 사발의 피를 토한 공손백룡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공심장(空心掌)?!’

광혈교에는 기척도 없이 무형의 발경을 터트리는 공심장이라는 장법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발경이 아니었다. 순수한 진동의 폭발로 인한 충격파였다.

음제가 즐겨 사용하는 일대 절기를 흡수한 뒤 사신기에 맞게 개량하여 자신만의 절기로 재탄생시킨 연호정의 또 다른 비기, 폭정탄(爆靜彈)이었다.

화아아악!

공손백룡은 죽음의 위기를 느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연호정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파아아아악!

적정 거리라고 판단한 순간, 공손백룡의 우수도(右手刀)가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반월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촤아아악!

연호정의 몸이 참격 직전에 멈추었다.

공손백룡의 눈이 흔들렸다.

‘여기까지!!’

그렇다. 여기까지다.

정면충돌이 벌어진 순간 속도를 무기로 삼아 공격할 것을 예측했고, 권타가 적중한 순간 도주하여 폭정탄을 쓸 것까지도 예측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연호정은 공손백룡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기습할 것까지도 예측해 냈다. 심지어 신마구살도를 육장으로 구사할 것까지도 알았다.

이미 육사제장이 맨손 수도로 펼친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콰앙!

호권(虎拳)으로 공손백룡의 가슴팍을 후려친 연호정.

피를 토하면서도 공손백룡은 두 손으로 연호정의 양팔을 잡았다. 더 이상의 공격을 허용치 않겠다는 뜻이었다.

‘됐어! 여기서 광마공을……!’

다급하게 마력을 끌어 올리려던 공손백룡은, 불현듯 하나의 의문을 떠올렸다.

‘어디 갔지?’

없다.

연호정의 양팔을 잡았는데, 이놈이 쥐고 휘두르던 월도는 어디로 갔지?

퍼어어어억!

그때, 공손백룡의 등 상부를 뚫은 월도가 아랫배를 통과하여 땅에 꽂혔다.

어검술, 이기어도(以氣馭刀)다.

공손백룡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연호정의 양팔을 잡은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설마…… 첫 충돌 때부터……?”

“물론이다.”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가져다 쓰는 놈만큼 예측하기 쉬운 놈도 없거든. 어찌나 예상대로 움직여 주는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축하한다. 십 초는 넘겼다.”

퍽!

연호정의 우수도가 공손백룡의 목을 날려 버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