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35화 (735/963)

735화. 삼파전 (3)

‘어디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강량의 신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랐다. 지원군도 부를 수 없는 상황, 불러도 의미가 없는 상황이기에 더더욱 다급했다.

‘이쪽이다!’

훅!

귀영신보의 은밀하고도 화려한 신법이 그의 몸을 보이지 않는 질풍으로 만들었다.

미세한 발자국들을 보며 추격을 시작하는 강량. 경갑주를 입고 손에는 큼직한 대검을 쥐었는데도 이전보다 훨씬 더 빨랐다.

‘……?!’

다급하게 달려가던 강량은 순간 의아함을 느꼈다.

‘뭐지? 이건 분명 형님의 발자국인데.’

발자국 주변에 무수히 많은 다른 발자국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미세하여, 내공으로 안력을 돋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만한 흔적이었다.

‘극상승의 신법이야. 나보다 못하지 않은 실력자들이 이렇게나 많았나?’

훅!

강량의 눈이 빛났다.

쩌저정!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기이한 충돌음.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묵룡부에서 다시 나온 이후, 처음으로 듣는 적의(敵意) 가득한 칼부림 소리였다.

‘저기다!’

쾅!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 나가는 강량.

수많은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니, 드디어 그 시야에 월도를 휘두르는 연호정의 모습이 보였다.

‘형님!’

그때, 연호정이 외쳤다.

“조심해라!”

조심이라니?

순간 강량은 자신의 등 뒤를 노리는 은밀한 살기를 느꼈다.

쩌어어엉! 서걱!

그 자리에서 회전하며 대검을 휘두르자, 그 일격에 적의 단검과 어깨가 통째로 잘려 나갔다.

‘뭐, 뭐야?’

강량은 당황했다.

이 정도 신법이라면 자신에 비해 크게 밀리지 않을 실력자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팔 하나를 날려 버렸다.

신법은 뛰어나지만, 실질적인 전투력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낮다는 뜻이었다. 신법을 제외한 전반적인 기량이 초절정고수라 하기에 무리가 있는 것이다.

파바바바박!

묵직한 대검이 폭풍처럼 움직이며 주변에 화려한 검망(劍網)을 만들었다.

쩌저저저정!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던 공손백룡의 수하들이 검망에 휩쓸려 우르르 튕겨 나갔다.

강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쭉정이들은?’

그때였다.

번쩍!

혈익휘천의 무지막지한 속도로 강량의 앞에 도달한 연호정이 호왕구벽세, 호조요란을 펼쳤다.

쩌저저저저정!

화려한 충돌음과 함께 연호정의 몸이 강량과 부딪치며 뒤로 밀려났다.

“큭!”

연호정의 몸을 받아 냄과 동시에 두 발을 땅에 박아 속도를 늦췄다.

강량의 이마에 푸른 혈관이 불거졌다.

‘무겁다!’

연호정이 무거운 게 아니었다. 연호정을 물러나게 한 이름 모를 고수의 공격이 무거운 것이다.

‘설마 광혼귀군?!’

화아아아아악!

기다렸다는 듯이 뿜어져 나오는 사기의 폭풍.

하지만 그 사공의 경력이 향하는 곳은 연호정과 강량 쪽이 아니었다.

콰르르릉!

회색빛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숲 한편이 끔찍하게 갈려 나갔다.

“이 날파리 같은 새끼가!”

퍼어어엉!

곡경이 이를 악물고 비틀거렸다. 어느새 공손백룡이 그를 걷어차고 사라진 것이다.

비스듬히 찼기 때문에 위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문제는 막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첨예한 감각으로 공격이 들어오리라는 건 알았지만,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일격을 맞았다.

기가 질리는 속도였다.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었다.

“형님!”

강량이 연호정을 보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 너도 참전해라!”

“차, 참전이요?!”

“비왕 공손백룡이 적이다! 광혼귀군은 아군이야!”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비왕이 적이고 귀군이 아군이라니? 그 반대가 아니라?

하지만 강량의 움직임은 빨랐다.

파아아아악!

순식간에 전권으로 들어간 연호정의 뒤를 따른 강량이 공손백룡의 휘하 고수들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쩌저정! 퍼어억! 퍼어어억!

피가 튀고 고수 둘의 목이 날아갔다.

강량이 들고 있는 대검은 강철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보병(寶兵)이라 할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부러지지 않을 만큼 두꺼웠고, 날도 도끼날처럼 두툼하기만 했다.

상대를 베는 것이 아니라 찍거나 부숴 버리는 병기다. 중병(重兵)이라는 것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강량은 일부러 검기를 불사르지 않고 적들을 공격했다. 불필요한 내공 소모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퍼억! 퍼억!

살벌한 타격음과 함께 고수들의 몸이 부서졌다.

무력에 비해 놀라운 신법의 소유자들이지만, 강량의 신법 역시 그들 못지않았다. 심지어 그는 신법 이상의 검법을 구사하는 진짜배기 고수였다.

당연히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곡경의 부하들을 습격하고 곡경의 이목을 흐리게 만들 요량으로 데리고 온 공손백룡의 부하 중 상당수가 강량의 대검 아래 고혼이 되었다.

공손백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또 뭐 하는 물건인지 모르겠군.”

파아아아앙! 퍼어억!

강량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중간에 연호정이 월도를 휘둘러 공손백룡을 베려고 하였다. 순간적으로 방향을 전환해 강량의 몸통을 후려쳤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길로 죽었을 것이다.

“강량!”

“쿨럭!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빗맞기도 했고 귀왕진기의 고밀도 발경이 몸을 보호해 주었지만, 상대는 무극을 개방한 절대고수였다.

스치기만 해도 충격이 심할 공격이었다. 이 한 수로 강량은 상당한 내상을 입어 버렸다.

“내 뒤로!”

강량이 연호정과 등을 맞대고 섰다.

번쩍!

벼락처럼 움직인 공손백룡이 한가롭게 팔짱을 끼었다. 지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공손백룡이 나른한 얼굴로 연호정을 향해 물었다.

“넌 누구냐?”

콰아앙!

쏘아진 곡경의 권풍을 장(掌)으로 흩어 내는 공손백룡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반응을 보고자 해서 날린 쾌공이었지만, 가벼이 받아 낼 만한 위력도 아니었다.

곡경이 이를 갈았다. 비록 신선제왕 중 가장 하수라고는 하지만, 신법을 제외해도 삼군과 격차가 없다는 비왕의 무공은 허언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공손백룡을 향해 월도를 겨누었다.

공손백룡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 경갑, 묵룡부 소속인가? 묵룡부에 너 같은 놈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화아아악!

공손백룡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대단했다.

곡경의 살기 넘치는 사공력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지금의 연호정으로서는 정면 승부가 부담스러운 고수인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웃었다. 저렇게 말을 걸어 주니, 이쪽에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속도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공손백룡의 얼굴에 뚜렷한 불쾌감이 드러났다.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는구먼. 참으로 버릇없는 놈이로세.”

“그렇지 않고서야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 황제 폐하 전력의 한 축인 광혼귀군을 이곳까지 유인할 수 있었겠나.”

“…….”

공손백룡의 눈이 깊어졌다.

반면 곡경은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가만히 공손백룡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월도에 주작화기를 실었다.

화르르르륵!

벌겋게 달아오른 칼날 위로 훅! 하는 소리와 함께 화염이 넘실거렸다.

“그것 외에 뭔가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뭐, 거기까지는 모르겠고.”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하나만 묻겠다.”

“…….”

“삼교는 공생 관계인 동시에 서로를 견제하는 세력들이라고 들었다. 광혈교 소속인 네놈이 신화교가 점거한 황궁을 돕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쪽에 관련해서는 견제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라고 봐도 되겠느냐?”

“…….”

“맞군.”

말을 하면서도 연호정은 공손백룡의 눈빛과 표정, 기도 등을 살폈다.

그리고 내린 결론.

‘대단하군.’

이 정도로 대놓고 파고들게 되면 천하의 담대한 사람이라도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공손백룡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눈, 입술, 피부, 기도 어떤 곳에도 변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읽기 힘든 놈은 오랜만이야.’

그때, 공손백룡이 말했다.

“내가 광혈교 소속이라는 걸 말해 준 것은 필시 곡경 저놈일 터이고.”

“물론이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혈신삼교(血神三敎)의 관계에 대해 그리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순간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혈신삼교?’

공손백룡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놈이 소문 자자한 연호정이로구나.”

“맞다.”

연호정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지금껏 중원의 정보망을 아무도 모르게 뒤흔든 괴인이다. 자신의 정체를 유추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공손백룡이 피식 웃었다.

“영광이다. 암암리에 삼교의 교인들을 격파해 낸 무적의 장수, 신기(神機)의 계략과 극치에 이른 통찰력을 기반으로 온갖 공작을 뭉개 버린 문무 겸비의 괴물을 이렇게 보는군.”

화려하기 그지없는 수식어였다.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곡경이 연호정을 힐끔거릴 정도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모습을 드러냈지? 하던 거나 잘하면 될 텐데.”

“물론 앞으로도 열심히 잘할 게다.”

“살아남는다면 말이지.”

“날 쫓을 수나 있겠느냐?”

참 읽기 힘든 남자지만, 속도에 대한 자신감 하나만큼은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투명하게 엿보인다.

그리고 그럴 만했다.

흑암제 시절까지 합쳐서, 이렇게까지 말도 안 되게 빠른 경공술의 대가는 처음 보는 그였다. 그가 아는 가장 빠른 사람은 신궁 시절의 묵비였지만, 그마저도 대응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살기를 예측하고 방어하려 해도 버거웠다. 일대일이라면 모르되, 누구 하나만 끼어들어도 막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공손백룡이 신법이 빠른 수하들을 몰고 다니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감당키 힘든 고수가 오면, 수하들이 상대의 시야를 교란하는 틈에 달려들어 단숨에 목을 날려 버리는 게 주된 공격 방식이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쫓겨 다니다가 역습을 시작했다는 건, 네 쪽에도 뭔가 일이 생겼다는 뜻으로 봐도 되겠나?”

“마음대로 생각해라.”

“마음대로 생각할 거다. 어차피 난 상황을 믿거든.”

공손백룡이 움찔했다.

처음으로 보이는 반응. 그런데도 표정은 가면을 쓴 것처럼 딱딱했다.

적어도 눈빛이나 목소리, 표정을 읽는 것은 무의미할 듯했다.

“제안 하나 하지.”

“호오, 제안이라?”

“정말로 그럴 거란 기대는 없지만, 나와 단기 접전으로 승부를 낼 생각 있나?”

순간 공손백룡이 한 번 더 움찔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수하들은 물론 곡경과 강량마저 깜짝 놀라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혀, 형님!”

연호정은 말없이 공손백룡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발언은 그조차도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다. 공손백룡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나와 일대일 승부를 내자고?”

“낭만 있고 좋은데, 왜?”

“제정신이냐? 내가 마음만 먹으면, 곡경 저놈이라 해도 살아남을 수 없느니라.”

곡경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 입……!”

“다무시오. 얘기 중이잖소.”

“뭐, 뭐라고?”

입을 쩍 벌리며 연호정을 보는 곡경.

연호정은 곡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른해진 얼굴로 턱을 치켜든 채 공손백룡을 보는데, 상대를 경시하는 느낌이 가득 묻어 나왔다.

“나도 속도에 자신이 있거든. 어떻게든 승부가 될 것 같은데.”

“…….”

“생각 있나?”

곡경이 버럭 외쳤다.

“이 미친 자식아!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너 하나로 감당할 만한 놈이 아니야!”

연호정이 재차 물었다.

“어쩔 거야? 할 거야, 말 거야?”

“야, 이 자식아!!”

그때, 공손백룡이 씨익 웃으며 소도로 연호정을 겨누었다.

순간 연호정은 수천 자루의 칼날이 자신의 몸을 찌르고 들어오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십 초 안에 죽여 주마.”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도망이나 치지 마라. 발 빠른 거 외에는 별 볼 일도 없는 자식이 말은 청산유수네.”

번쩍!

공손백룡의 소도가 연호정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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