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33화 (733/963)

733화. 삼파전 (1)

훅!

살의는 없어졌지만, 곡경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은 한층 더 강해졌다.

특유의 날카로운 안광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사이한 기운도 사라졌다.

그곳에 남은 것은, 단 하나의 절대적인 신념을 지닌 무림의 거인이었다.

“대단한 눈썰미구나.”

왜일까?

분위기가 달라져서 그런지, 말투 역시도 미묘하게 달라진 것처럼 들린다.

“굳이 숨긴다고 숨겨질 사실 같지는 않군. 그 노친네가 제자 하나 제대로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 정도가 아니었어.”

솔직하게 스스로를 드러낸 곡경.

치열한 두뇌전과 눈치 싸움이 필수인 시국에, 곡경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이는 그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나 연호정은 이미 답에 도달해 있었고, 어설프게 숨긴다 한들 믿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곡경도 보통은 아니었다.

“네놈은 내게 숨기는 게 있겠지.”

“…….”

“투왕 양천, 실력 이전에 야망이 큰 사람이다. 너만 한 제자를 키웠다면, 사방팔방 자랑을 하든 끝끝내 숨기든 둘 중 하나를 택했을 것이 분명해. 드러낸다 한들, 이토록 세간의 집중을 받는 곳에 파견할 리는 없어.”

“…….”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도대체 네놈의 정체가…….”

“연호정이오.”

“……?!”

푹!

월도를 땅에 꽂은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강동 벽산연가의 장남이자 무림맹 의정군의 대수이며, 현재 묵룡부 용아철기단의 특임 부관을 맡고 있소.”

곡경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천하제일 후기지수?”

“낯부끄러운 칭호지만.”

“……도끼를 다룬다고 들었는데?”

“도끼나 칼이나 거기서 거기요.”

“미친.”

곡경이 혀를 내둘렀다.

“어쩐지 성질머리며 눈치며 보통이 아니라더니. 하지만 호장(虎將)이 무극을 열었다는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얼마 전이었소. 굳이 대외에 알릴 이유도 없었소.”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연호정은 곡경의 기색을 살폈다.

놀랍게도 곡경은, 상대가 자신을 속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리 분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얼핏 후련함이 엿보이는 듯했다.

양천의 제자보다 차라리 낫다는 기색.

‘당연한가.’

곡경이 물었다.

“맹부의 동맹 책임자로 네놈이 선정된 것이더냐?”

“그렇소.”

“또 누가 있더냐?”

“나 하나요.”

“너 하나라고?”

“그렇소.”

“기가 막히는군.”

동맹의 책임자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선정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흑백의 골을 생각하면, 한 사람이 아니라 둘 이상이 선정되어야 마땅하다.

한데도 홀로 그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은, 연호정의 성정과 능력이 백도와 흑도를 가리지 않고 막강한 신뢰를 준다는 뜻이었다.

곡경이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무림을 떠난 뒤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잘 모르는군.’

당금 강호 전반의 사정은 알지만, 세세하게는 들여다보진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 그는 황후와 태감이 아닌 황제의 사람이었다. 천자(天子)의 밑에서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다면 무척이나 바빴을 것이다.

“공동의 적이 없었다면 일단 잡아 두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

“맹부가 동맹을 맺은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겠지.”

연호정이 물었다.

“삼교를 노리고 있소?”

화아아악!

곡경의 몸에서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호정을 향한 살기가 아닌 삼교를 향한 살기였다.

“제국의 힘이 약해진 것은 자업자득이다. 또한, 제아무리 법도가 있다 한들 결국 세상은 약육강식이야. 제국은 무림의 힘을 짓누를 기회가 몇 번이고 있었다. 그것을 놓치고 향락에 젖어 국력을 소모한 것은 전적으로 이전 황제들의 잘못이지.”

천하의 주인을 천자라 하면서도, 당금 천자의 선조들을 향한 비판은 냉혹하기만 했다.

곡경이 제국이 아닌 오직 당금 황제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본인이 무림인이라서 그런 것인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곡경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대륙 내에서의 힘 싸움이라면 모르되 외세의 침공이라면 얘기가 달라. 뭣도 모르는 멍청한 놈들은 당장의 힘 싸움에서 과실을 취하기 위해 밖에서 힘을 끌어오지만, 그것은 여우를 도살하기 위해 사람에 맛을 들인 호랑이를 끌어오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

“지금의 황궁이 그러하다. 문제는 상대에 대한 기반 지식의 부족이야. 산처럼 큰 호랑이를 등에 업고 있는데도 활과 창으로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멍청한 놈들이 있지. 이미 사태가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도, 상대가 부리는 게 호랑이인지 고양이인지도 모르는 거야.”

외세를 끌어들인 자는 태감을 말하는 것이고, 상대를 파악하지 못하는 멍청한 자는 황후를 말하는 것이리라.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태감은 애초부터…….”

“태감이 문제가 아니다. 태감을 끌어들인 사람이 문제다.”

“……?!”

“황태자. 차기 황제로 지목된 그 멍청한 놈이 사교 무리 출신의 환관 놈에게 과한 힘을 밀어 줬어.”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그였다.

‘애초부터 태감이 황제를 농락하고 황궁을 제 것으로 삼은 게 아니었다?’

곡경이 고개를 저었다.

“사정은 복잡하지만, 결과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태감이나 황후나, 똑같이 분수를 모르고 날뛰고 있을 뿐이야. 그나마 황실의 핏줄을 생각하면 황후가 낫지만, 상대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안목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그리고 근본적으로, 황궁의 실권은 황제 폐하께 돌아가야만 한다. 크게 보면 황후 역시 주제를 모르는 인간일 뿐이다.”

냉혹하고도 직설적인 비판이었다.

곡경이 눈을 빛냈다.

“너희는 어떠냐?”

“…….”

“작금의 황궁과 무림은 사실상 몇 가지 가치만을 공유할 뿐, 아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황궁이 외세에 잠식당하면 무림 역시 문제가 될 터. 너희가 황궁에 신경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냐?”

“맞소.”

이런저런 이유는 많지만, 결과적으로 그렇다. 연호정은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변명할 이유도 없었다.

곡경이 피식 웃었다.

“솔직해서 좋군. 주제넘고 버릇도 없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이니 넘어가겠다.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이니까.”

“맞는 말이오.”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너의 정체는 믿는다.”

“…….”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만큼은 서로를 이용해도 되겠군.”

연호정이 곡경을 꿰뚫어 보았던 것처럼.

곡경 역시 연호정을 꽤 투명하게 보고 있었다. 능력 이전에, 진실된 순간을 보는 것이다.

스스로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부심이 있지 않고서는 그러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비왕은…….”

“가면서 얘기하지. 시간이 너무 지체됐어.”

“그럽시다.”

파아아아악!

두 사람이 속도를 높였다.

이전보다 배는 더 빠른 속도였지만, 놀랍게도 은신해서 쫓아오는 이들은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기가 막힌 실력이었다.

연호정이 달리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비왕은 뭐요?”

곡경의 눈이 차가워졌다.

“놈은 애초에 중원인이 아니었다.”

“……?!”

“비왕 공손백룡. 실제 직함은 광혈교(狂血敎)의 당대 사제장(司祭長) 중 하나다. 몇 사제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연호정의 얼굴이 확연히 굳어졌다.

“광혈교에 대해 알고 있소?”

“극히 일부만.”

“하면 그자는 시작부터……?!”

“삼교 놈들은 대륙을 침공하기 수십 년 전부터 온갖 공작을 벌였어. 하지만 그만한 공작을 벌였다 한들, 중원의 정보력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

“비왕은 그 절대적인 신법으로 온갖 정보원들을 잡아내며 이쪽 정보망에 혼선을 일으켰고, 반대로 삼교에는 알짜배기 정보들을 가져다주었다.”

순간 연호정이 탄성을 질렀다.

‘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삼교는 지금껏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모르기도 했고, 도저히 알 수 없을 거라 자신했던 부분을 귀신처럼 알고 있기도 했다.

수십 년 동안 나름의 정보 체계를 구축했겠지만, 이쪽은 수백 년 동안 최고의 정보단을 운영해 왔다. 아무리 삼교의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개방의 정보력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비왕이라는 경공술의 대가를 거미줄처럼 복잡한 정보망 가운데에 툭 던져 버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 성천의 고수 중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아예 차원이 다른 경공술.

당대가 아닌 고금을 따져 봐도 제일이라 불릴 만한 신법으로 중원의 정보망을 뒤흔듦과 동시에, 몇몇 알곡들을 쏙 빼 가고 있었다.

그래서 삼교의 반응이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알 법한 걸 모르거나, 몰라야 할 걸 알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 광혈교는 그런 고수를 몇이나……?”

“잘은 모른다. 하지만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아니라 확신이지. 있었다면 진즉에 다 파견해서 이쪽 정보망을 초토화시켰을 테니까.”

이건 효율의 문제였다. 삼교 측에도 비왕만큼 규격 외의 신법을 구사하는 자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비왕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현재 비왕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더 이상 이쪽에서 털어 갈 정보가 없다는 뜻이오?”

“과한 해석이지. 비왕이 삼교 소속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어찌 진즉 말해 주지 않았소? 원조를 요청했다면…….”

“바보냐? 놈들은 황궁을 철통처럼 감시하고 있어. 이쪽에서 무림맹에 정보를 보내려고 한다면 진즉에 알아챘겠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남에게 바보 소리를 듣는 것은.

“하지만 한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을 거 아니오.”

“무림맹과 묵룡부 내에 삼교의 간자가 있다면 어쩔 거냐. 위험 부담 안고 그런 짓을 왜 해?”

바보가 두 번 되었다.

한순간에 워낙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그런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연호정은 침음하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잡담은 그만. 일단 비왕의 하수인 놈들부터 잡는다.”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그게 그 소리였군.”

“음?”

“선배의 수하들이 사람을 죽이는 소리. 그 침묵의 파공성, 소리도 못 지르고 죽은 이들이 바로 비왕이 부리는 놈들이었소?”

곡경이 피식 웃었다.

“그 먼 거리에서 용케 들었군. 확실히 네놈도 보통이 아니야.”

몇 가지를 더 물어보려던 연호정은 이내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정리해야 했고, 앞으로의 일을 계산해야 했다. 더 물어본다 한들 털어 낼 정보도 없는 것 같았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곡경이 말했다.

“비왕의 속도는 상식을 무시한다. 굳이 정면 승부를 허락할 놈이 아니야. 네가 도와준다면 이 기회에 놈들의 눈 하나를 뽑아낼 수 있다.”

“…….”

“작정하고 돕…….”

“빌어먹을.”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욕설.

곡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갑자기 뭐야?”

“아니오. 일단 빨리 비왕부터 잡읍시다.”

“뭔데?”

“됐소. 눈앞의 일부터 처리합시다.”

연호정의 얼굴에 초조함이 일었다.

곡경은 말했다. 황궁에서 무림맹에 연락을 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다고 하면 할 수 있다. 하지만 위험 부담이 있다.

그리고 지금.

황후가 무림맹에 연락을 취했고, 무림맹에서는 그에 화답하여 세 명의 해결사들을 궁으로 보냈다.

황후가 곡경 일행보다 조심성이 있을까?

‘아버지!’

월도를 쥔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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