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730화 (730/963)

◈730화. 보이지 않는 눈 (5)

산에 남은 진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묵룡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은신술을 펼치고 있었다. 기우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기우희는 수면에 들었고, 남은 건 자신과 묵비뿐이었다.

“커험!”

진양이 헛기침을 했다.

“누님……은 안 쉬시오?”

선상에서 많이 가까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묵비가 어려웠다.

누님이라는 말도 입에 잘 붙질 않았다. 그렇다고 그쪽이나 당신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 와중에 소정광이 먼저 누님 동생을 자처해 버렸다.

그러니 별수 있겠는가. 자신도 누님이라고 할 수밖에.

“나는 괜찮아. 너는 어때?”

“나야 뭐 남는 게 체력밖에 없으니까.”

“그럼 무공부터 점검하는 게 좋을 거야.”

묵비의 눈이 서늘해졌다.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지만…… 왠지 공기가 이상해.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야.”

진양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는 무공에 재능이 출중했고, 생사의 결투도 많이 벌여 보았다. 화웅문이 안정화되기 전까지는 정말 수도 없이 사선을 넘나들었더랬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럴듯한 생사결을 벌인 적이 없었다. 무공은 상승했지만, 감각의 날은 다소 무뎌졌다는 것이다.

‘이 양반은 다르다 이거군.’

자신보다 강한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묵비는 진심으로 뭔가 일이 터질 것이라고 믿는 듯했다.

그리고 무인에게 있어 일이 터진다는 것은 곧 전투를 뜻했다.

“그래도 되겠소?”

“선상에서 연 공자에게 받은 가르침, 네 것으로 만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기까진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

“음.”

“우리와 함께한다는 건 곧 언제, 어떤 형태의 싸움에 던져질지 모른다는 뜻과 같다. 이제부터는 항상 긴장해야 할 거야.”

묵비답지 않게 말이 길었다.

진양은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은 아직 어색한데, 그 무뚝뚝한 성격에 용케 자신을 위해 준다 싶었다.

그래서일까? 진양 역시 어색함이 조금은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열심히 해보겠소. 그럼 부탁하겠소.”

“그래.”

진양은 근처 숲으로 들어갔다. 기우희와 묵비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진양은 문득 가지고 온 월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깊어졌다.

‘만병(萬兵)의 주인이라…….’

문득 떠오르는 스승의 말씀이 있었다.

‘세상에는 여러 무인이 있다. 하나의 무공에 인생을 바치는 사람, 수많은 무공에 손을 대는 사람. 언뜻 보면 전자의 무인이 더 위대한 것 같지만, 이는 무인의 특성에 따라 다른 법. 누가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고, 누가 더 이치에 다가가기 쉽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무공 그 자체에 뛰어난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여러 무공을 섭렵하지 않아도 병기의 형태와 이치를 알아 실전에서 손쉽게 써먹을 수 있지. 기량이 낮아지지도 않는다. 싸움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만병(萬兵)의 주인.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존재한다. 단순히 병기에 통달한 게 아니라 싸움, 무(武) 자체에 통달한 이들이야. 손에 무엇이 들렸든, 그들은 항상 강하다.’

출정 전, 연호정과 몇 차례나 비무를 벌였다.

승패의 결과를 내기 위함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작 연호정의 월도술(月刀術)을 본 진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연호정은 주병기가 아닌데도 시작부터 수준급의 도법(刀法)을 구사했다. 심지어 비무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무섭도록 정교해졌다.

도법의 달인인 자신조차도 배울 점이 속속들이 보일 만큼.

‘사실상 그 양반이 휘두르는 도끼나 월도는 같은 중병 계열이다. 워낙 규격 외의 중병이라서 그렇지, 기다란 창대를 쥐고 휘둘러 적을 격파하는 것은 마찬가지.’

그렇다고는 해도 섬세함에서 다소간의 차이가 날 것이 분명하다.

‘크게 보면 돼. 내게 말해 줬던 것들, 더 강해지는 게 아니라 단점을 보완하는 것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생존율이 크게 오를 수 있어.’

진양이 눈을 감았다.

‘다 내 것으로 만들자. 어색해할 시간이 없어. 함께하기로 한 순간부터 나 역시 사선에 서 있는 것이다.’

우우우웅.

잠자고 있던 진양의 내공이 불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 * *

파아아아앙!

방현의 외곽을 빙 둘러 달려 나가는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형님. 혹시 소리가 들리십니까?”

“아니.”

“역시 그렇죠?”

강량의 얼굴에 심각함이 감돌았다.

“이상하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건 분명한데 아무 소리도 없고……. 그 와중에도 분명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아니, 소리가 나기는 나.”

“예?”

“다만…… 싸우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연호정의 얼굴 역시 강량처럼 심각했다.

‘뭐지.’

그는 강량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주변을 느끼고 있었다.

‘강량 말대로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다. 비명도 없이 하나하나 분명하게. 한데도 살이 베이거나 뼈가 부러지는 등의 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렇다고 독(毒)이라고 하기에는 그 특유의 음험한 기운도 느껴지질 않고…….’

모르겠다. 당장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잠시.”

파라락!

연호정이 멈추었다.

함께 멈춘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네 말이 옳다.”

그들은 비왕을 보기 위해, 그리고 기우희을 이용해 신화교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당연히 비왕의 반응이 먼저였다. 만약 비왕이 우헌 태감을 비롯한 신화교와 손을 잡았다면, 기우희를 이용해 신화교의 반응을 보다가 치명적인 결과가 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무슨 상황인지 알기 전까진 섣불리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묵룡부의 특임 부관으로서는 그러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투구를 고쳐 썼다.

“이걸 받아라.”

연호정이 강량에게 오정패를 건넸다.

“개방도를 부르는 방법은 알지?”

“물론이지요.”

“방현 안으로 들어가서 개방도와 접촉해라. 이 일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비왕이 어디에 있는지 정보를 뽑아내. 최대한 빨리.”

“형님은요?”

“쫓아간다.”

“형님.”

월도를 어깨에 걸친 연호정의 눈빛은 맑고 깊기만 했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 무림인들 간의 분란이라면 모르겠지만, 이쪽 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는 민간인의 죽음이라면 모른 척해선 안 돼.”

“……물론 그렇습니다.”

“가라. 우리가 끼어들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면 곧장 네 기척을 따라가겠다.”

강량이 고개를 숙였다.

“이따 봅시다, 형님.”

“조심해라.”

파아아악!

강량이 몸을 날리자마자 연호정 역시 신법을 펼쳤다.

‘이상해.’

그는 강량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 소리. 사람을 죽이는 소리는 아니지만, 미묘하게 공기가 떨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 마치…….’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하 선배와 명극, 두 사람이 극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흑암제 시절에도 많이 들었다. 자신이 움직일 때 나는 소리는 모르지만, 다른 절대고수가 작정하고 몸을 날릴 때 어떤 소리가 터져 나오는지는 알고 있었다.

공기의 벽을 꿰뚫을 때 나는 폭발 소리. 하지만 무극에 오른 이들은 그 폭발음을 발경 상쇄 능력으로 엄청나게 줄일 수 있다.

그가 들은 소리는 바로 그러한 소음이었다.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월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곳에 비왕이 있을 수도 있다.’

우우우우웅.

사신기가 피어오르며 온몸의 활력을 끌어 올렸다.

화아아아악!

지금껏 봉인하고 있던 광명신단의 기운이 오장육부를 제외한 몸 전체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기감이 확장되고, 오감이 두 배 이상 증폭되었다.

이 정도로 감각을 확장하기 위해선 상당한 내공이 소모된다.

하지만 명극의 존재를 알아챘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전쟁이 벌어진다는 확신, 무수히 많은 적도의 살의가 범람하던 그때와 달리 저쪽에서는 아무런 살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모호했다.

마치 투명한 늪을 향해 달려드는 것처럼, 기묘한 불안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

연호정의 눈빛이 돌변했다.

‘읽혔다!’

읽었고, 동시에 읽혔다.

첨예하게 날 선 기운끼리의 부딪침. 송곳처럼 날카롭게 집중된 연호정의 감각이, 정체 모를 누군가의 기감과 정확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훅!

일순 손도 대기 어려운 열풍이 불어닥치는 듯했다.

콰콰콱!

땅을 갈며 몸을 세운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었다.

‘……?!’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사아아아아악!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곳에서부터 진하고 뜨거운 기운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 기운은…….’

정파의 정통 무공이 아니다.

그렇다고 마도의 마공도 아니다.

두 무공보다 가볍지만, 어딘가 이치에서 벗어난 기운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불꽃처럼 뜨겁고 귀신처럼 창백하다. 마공처럼 현실에 존재해선 안 될 기운, 마공보다 훨씬 더 음(陰)하고 사이한 진기가 물살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공(邪功)!!’

파아아아악!

순간 연호정의 시야에 회색빛 무복 차림에 허연 가면을 쓴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화아아아악! 퍼억!

월도를 한 번 휘둘러 십여 명의 접근을 막고, 기어이 뚫고 들어오려는 한 명의 몸통을 창대로 후려쳤다.

퍼벅!

땅을 구른 가면인이 고꾸라졌다. 그대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

접근을 멈춘 가면인들이 십여 장 거리를 벌린 채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아니, 노려보는 게 맞긴 한 걸까? 분명 뚫어져라 빤히 쳐다보고 있지만, 그 눈빛이 너무 흐릿했다. 마치 죽은 생선 눈알을 보는 것 같았다.

거기엔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공포도, 분노도, 심지어는 어떠한 목적의식도 엿보이지 않았다.

인형이었다.

몸에서 피어오르는 사기가 저리 끔찍한데도, 의식하지 않으면 기운을 느낄 수가 없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뭐냐, 너희는?”

그때였다.

“그건 이쪽에서 묻고 싶은 말이다.”

화아아아악!

숲속에서부터 불어닥치는 불길하고도 화려한 기운.

연호정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강하다!’

여기 이곳, 호북 무당산이 보이는 삼림 지역 앞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절대고수가 등장했다.

“비왕, 그 망할 쥐새끼 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하긴, 그놈이었다면 애초에 우리 후미를 노릴 생각도 못 했겠지만.”

비왕이 아니다.

비왕을 노리고 온 또 다른 무극의 고수였다.

연호정은 물론 천하 어떤 사람도 상상하지 못했던, 그간 세인들의 머릿속에 잊혀 가고 있었던 또 다른 고수의 등장이었다.

“호오, 월도(月刀)라. 성천 중 도(刀)를 쓰는 인간은 종리백 정도밖에 모르는데.”

사라라락.

흔들거리는 나뭇가지들이 하나둘 툭툭 부러지며 땅에 떨어졌다.

사아아악!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가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이름 모를 절대고수의 기파에 휘말려 버린 것이다.

뜬금없이 마주치게 된 또 하나의 성천.

“마지막으로 묻는다. 정체를 밝혀라.”

“댁이야말로 정체를 밝혀라……, 라고 하고 싶지만.”

이 정도 농도의 사기.

당금 성천의 고수 중, 순수한 사공(邪功)을 이 정도 경지에 이르도록 연마한 고수는 단 한 명뿐이다.

“광혼귀군(狂魂鬼君) 곡경(曲硬)?!”

“제법 눈썰미가 있는 놈이로고.”

스르륵.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창백한 안색의 중년인, 곡경이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그 발언이 네 운명을 결정지었다. 죽어라.”

파아아아아악!

가면 쓴 무리가 연호정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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