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9화. 보이지 않는 눈 (4)
‘역시 그렇군.’
딱 예상한 반응이었다.
황후 말마따나 무림맹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병력을 이끌고 와서 환관 세력을 몰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설령 가능하다 한들 그래서는 안 된다. 황궁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임과 동시에 자칫 반란의 불씨가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힘을 빌려 와도 철저하게 음지에서 활약하게 한다. 황후, 나아가 우헌 태감 역시 그런 식으로 상대를 공격할 수밖에 없다.
권력 싸움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추잡하고 끈적한 것이다.
“어떠한가? 그대들은 짐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느냐?”
제갈아연이 읍하며 말했다.
“폐하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제갈씨의 후손이구나. 얼마든지 말하라.”
“혹 폐하께서는 우헌 태감이 환관 세력 외, 어떤 힘을 등에 업고 있는지 아시는지요.”
황후의 눈이 번뜩였다.
“그대들이 사교(邪敎) 무리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가.”
사교 무리. 바로 신화교를 뜻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되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황후는 우헌 태감 뒤에 붙은 신화교라는 종교 세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짐도 그들의 정체에 대해 안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비밀리 알아낸 결과, 서궁(西宮) 인근에서 한 번씩 제사도 올린다고 하였다.”
황후의 얼굴에 뚜렷한 분노가 어렸다.
“참으로 불경한 놈들이 아니던가. 천자(天子)의 궁 안에서 잡신(雜神)을 받드는 제사를 지내다니. 지금껏 황실에 무수히 많은 간신배가 있었지만, 그처럼 무도한 놈은 없었다.”
“그들은 새외에서 암약하던 삼교(三敎)의 일파로, 하나하나가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는 매서운 집단입니다.”
“삼교라……? 하면 그런 사교 무리가 둘이나 더 있었단 말인가.”
다소 경직된 목소리.
위엄은 그대로이되 솔직한 의아함을 담고 있다. 황후도 거기까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갈아연의 눈에 총기가 어렸다.
‘폐하께서는…… 우헌 태감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도 모르고 계시는 것.’
제갈아연이 입을 열었다.
“섣부른 추측이지만, 저희는 그들 하나하나의 전력이 당대 강호 무림을 위협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
“우헌 태감 뒤에 숨은 사교 무리와는 저희 측에서도 몇 번 접전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연가의 가주 역시 그 전투에 참여했고, 천만다행히도 적장들을 격파해 상당한 피해를 준 바가 있습니다.”
“그랬단 말이냐?”
황후가 흥미로운 눈으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제갈아연은 생각했다.
‘모르고 있다?’
사교 무리, 즉 신화교에 대해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삼교에게 위협당하고 있는 고관대작 중 몇몇이 황후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 줬다고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반정의 죄로 죽은 하남 도지휘사라든지.
한데 황후는 무림맹과 신화교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정보가 걸러지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다. 아예 삼교와 연관된 고관대작들 모두가 황후에게 힘을 실어 줄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당장 황궁의 실권을 잡은 우헌 태감 뒤에 신화교가 있고, 그들은 신화교의 협박에 못 이겨 원치도 않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
무조건 황후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이 좋은 일일 텐데.
제갈아연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신화교는…….”
그때, 연위가 손을 들어 제갈아연의 말을 막았다.
제갈아연이 의아한 눈으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우헌 태감 뒤에 누가 있는지는 분명 중요한 일이나, 그 얘기가 지나치면 시간만 길어지게 될 겁니다. 삼교에 관한 얘기는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중요한 것은 저희가 우헌 태감을 감당할 수 있는가, 바로 그 문제가 아닐는지요.”
황후가 묘한 눈으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맞네. 중요한 것은 그것이지.”
제갈아연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게 우선이지.’
편히 말하라고는 했지만, 어쨌거나 이 자리는 일국의 안주인이 함께하고 있었다.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 해도, 중점에서 벗어나는 얘기를 하는 것은 도의가 아닐 것이다.
‘내가 마음이 급했구나.’
그때, 팽무강이 입을 열었다.
“저희 필부들은 황궁의 권력이 어디로 향하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제국 소속의 무사로서, 사교 무리를 등에 업은 태감의 만행을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하물며 그들은 황궁과 무림, 양측 모두를 노리고 있습니다. 권력 싸움 이전에, 그들은 저희와도 양립할 수 없는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무불침의 조항이 버젓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형식상이나마 무림은 제국에 속해 있다. 굳이 황궁과 무림 양측이라고 표현하는 팽무강의 발언은 다소 예의에 어긋났다고 볼 수 있다.
팽무강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그런 말을 입에 올렸다.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 사태를 해결한 연후 황궁 일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황궁 입장에서 무림은 안전하다. 그러한 뜻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황후 역시 전쟁처럼 치열한 정치판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팽무강의 말에 담긴 뜻을 모를 리 없었다.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한배를 탔다고 봐도 되는 것인가?”
“다른 어떤 문제를 떠나, 제국의 국모(國母)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는 것은 신민의 기쁨일 것입니다.”
“호호, 이제 와서 그런 달콤한 말은 되레 상대를 놀리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팽무강이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농이니 깊이 생각지 말라. 여하간 그대들에게도 태감이 격파해야 할 대상이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정확히는 태감을 위시한 신화교 무리 전체이리라.
연위가 입을 열었다.
“시기나 방법에 대해서는 깊은 논의를 거쳐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일단 얘기가 여기까지 진행되었으니, 저희의 궁금증을 풀어 주실 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궁금증이라? 어떤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답해 주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위의 눈이 번쩍였다.
“첫째는 황제 폐하의 상황입니다.”
“……흐음.”
“그리고 둘째는 현재 호북 균현에 별안간 모습을 드러낸 한 고수의 존재입니다.”
황후의 눈이 깊어졌다.
“황상 폐하의 상황에 대한 건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구나. 지금 이 자리에선 특히 어려우니, 따로 시간을 내겠다.”
“황공하옵니다.”
“그리고 호북 균현에 모습을 드러낸 고수라…….”
황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를 말하는 건지 짐은 도통 알 수가 없는데.”
제갈아연이 입을 열었다.
“혹, 폐하께서는 우헌 태감 측과 정보전을 벌이기도 하시는지요?”
“정보란 정쟁에 있어 필수 요소지. 당연하다.”
“저희를 소환하신 정보에 대해서도 흘리셨는지 궁금합니다.”
황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책이 제법 매력적이긴 하다만, 짐은 내 힘이 되어 줄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위해가 갈 수 있는 짓은 하지 않아.”
제갈아연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그들은 비왕이 황후와 연관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도 아니라면 우헌 태감 측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황후의 반응을 보아하니 황후 측도, 우헌 태감 측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대체 비왕은 어디 소속인가?
정말로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그도 아니면…….
‘설마 신화교가 아닌 광혈이나 사음의 사람이 된 것인가?!’
* * *
연호정 일행이 탄 함선은 그야말로 놀랄 만한 속도를 보여 주었다.
단숨에 호남을 지나 호북으로 진입한 배는 의창(宜昌)을 통과해 흥산(興山)까지 이르렀다.
익숙하지 않은 선상 생활이지만, 일행은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하나같이 무공이 출중한 고수들인 덕이었다.
흥산에 이르기까지 배를 몇 번 갈아타고 땅을 밟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수송선의 세 배 속도를 냈다. 직접 타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운 속도였다.
“후우.”
육지에 내린 일행은 말을 몰아 방현이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도달했다.
거기까지만 해도 사흘이 더 걸렸지만, 이는 실로 대단한 속도라 할 수 있었다. 주변이 온통 삼림(森林)이었고, 워낙 험준한 곳이라 길을 뚫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하지.”
방현은 무당산의 산맥이 훤히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 방현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니 무당산도 잘 보인다. 멀리 떨어졌지만, 특유의 장엄하고도 신비로운 운무 역시 눈에 띄었다.
“으으.”
내공을 연마했다지만, 전투에 특화된 고수는 아니다. 말에서 내린 기우희는 거의 탈진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나?”
“아니요.”
그 성격 좋은 기우희조차 빈말로도 괜찮다는 말을 못 한다. 그만큼 힘든 강행군이었다.
“앉아 봐. 내기(內氣)를 다스려 주지.”
“아, 괜찮아요. 그냥 쉬면…….”
“자네가 멀쩡하지 않으면 자넬 지켜야 하는 묵룡대가 힘들지 않겠나?”
기우희가 민망한 얼굴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녀의 명문혈에 오른손을 댄 연호정이 사신기를 운용했다.
우우우우웅!
단숨에 혈도를 타고 내려간 사신기가 그녀의 오장육부를 휘어 감고 쌓인 피로를 날려 버렸다.
기우희의 안색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괜찮군.’
연호정이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걸물이란 말이야, 이 녀석.’
여기까지 오는 동안 기우희는 연호정의 상태를 안정적으로 끌어올려 주었다.
어떨 때는 침을 놓기도 했고, 어떨 때는 가지고 온 약초를 가루를 내 먹이기도 했다. 그리고 하루 네 시진의 수면을 강제했다.
그런 과정을 지낸 지금, 연호정의 몸 상태는 무극에 오른 이후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이토록 생생한 몸 상태는 정말 오랜만일 정도였다.
“어때?”
“정말 놀랍네요.”
기우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 대수님의 신공이 신묘하다는 건 알았지만…… 예전보다 훨씬 더 발전했군요?”
“뭐, 아무래도.”
어깨를 으쓱한 연호정이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몸 상태를 끌어 올렸지만, 내공은 만능이 아니야. 푹 쉬도록 해.”
“네.”
자리를 깔고 누운 기우희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연호정이 묵비와 진양, 강량에게 다가갔다.
“어때?”
“음.”
진양과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느껴지는 건 딱히 없소.”
“저도 그렇습니다, 형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연호정 역시 싸움이라든지, 초고수의 기운을 느끼진 못했다. 워낙 산세가 험하고 바람도 많은 지역이라, 뭔가를 느끼기에 더더욱 어렵기도 했다.
“일단 현에 다녀오겠다. 개방 지부에 들를 것이니, 그전까지 푹 쉬도록…….”
그때였다.
“뭔가 보여요.”
“응?”
연호정이 묵비를 바라보았다.
묵비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기가 방현이죠?”
“그렇지.”
“동북쪽 외곽에서 뭔가가 보여요. 일단의 무리가 급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군요.”
진양이 뜨악한 얼굴로 묵비를 보았다.
여기서 저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뭔가를 보았단 말인가?
강량이 피식 웃었다.
“궁사의 눈은 일반 무림인보다 몇 배는 더 좋수다. 하물며 누님 수준이면 형님보다 더 좋을 거요.”
“허어!”
연호정이 묵비 옆에 서서 그녀가 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묵비 말마따나 뭔가 보일 듯 말 듯했다. 하지만 뭐가 뭔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묵비와 진양은 여기서 일행을 지켜라. 강량, 같이 내려가자.”
“좋지요.”
두 사람이 즉시 신법을 펼쳐 방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런 산림 지역에서는 말보다도 기동성이 좋은 두 사람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형님!”
“나도 맡았다.”
연호정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피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