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화. 보이지 않는 눈 (3)
소궁 안은 어두웠다.
화려한 촛대에 불이 켜져 있었지만, 천장 부근에 있는 작은 창들을 제외하곤 햇빛이 들어오는 곳이 별로 없었다.
츠츠츠.
기묘한 광경이었다.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연기가 소궁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름 모를 향(香)이라도 피우는 듯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냄새, 부담스럽지 않은 향이 심신을 나른하게 만들어 주었다.
붉은 융단 중앙까지 걸어온 세 사람이 공손하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들 앞.
어두운 빛깔의 발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여인의 형상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내부, 흔들리는 촛불에 따라 그림자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입구에 선 도번이 오체투지하며 말했다.
“지극(至極), 지애(至愛), 지혜(至慧)하신 천안(天眼)으로 천하를 굽어보시는 존귀한 분 앞에 대장군부 소속 북방군 수장 도번이 삼가…….”
“그만.”
도번의 말이 뚝 끊겼다.
발 뒤에서 나른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황궁의 예법이 지엄하다 한들, 지금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다. 북천장은 편히 있으라.”
“황후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도번이 일어나서 기둥 한옆에 공손히 섰다.
팽무강의 눈이 빛났다.
‘굉장하구나.’
제국의 어머니라 불리는 황후의 목소리에 기이한 염기가 느껴져서 내심 당황했었다.
하지만 지금, 발 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이전과 또 달랐다. 풍부한 염기는 그대로지만, 그 속에 깃든 강렬한 위엄은 가히 일국의 안주인다운 기품과 함께 좌중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정실이며 황궁 권력을 양분하는 집단 중 하나의 수장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당금 황후는 지천명을 넘긴 황제보다 훨씬 더 어렸다. 전처가 병으로 죽은 뒤 새로 들인 정실이기 때문이었다.
열일곱의 꽃다운 나이로 황후의 위(位)에 오른 것이 이십 년 전.
그 어린 나이에 복마전인 황궁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하여 당당히 황궁 권력을 양분하고 있으니, 쉬이 찾아보기 힘든 걸물임은 분명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역시나 만만히 볼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대들이로군.”
“…….”
“무뢰배들이 날뛰는 저 강호 무림에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관부의 역할을 대신하는 정파 백도. 헤아릴 수 없는 무문(武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가문의 수장이라, 당연히 보통들은 아니겠지.”
팽무강과 제갈아연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관부의 힘이 약해졌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황후가 직접 인정하고 있었다. 어떤 의도이든 쉽게 나올 말은 아니었다.
“한 명은 황궁과 지척인 하북 팽씨 가문의 수장이라 하였고, 다른 한 명은 저 멀리 강동의 협가(俠家)라 불리는 연씨 가문의 수장이라 하였지.”
“…….”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융중의 복룡인 제갈씨의 후손이라.”
황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그쪽에서도 나름대로 구실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겠구나. 예까지 오느라 수고들 많았다.”
세 사람이 더더욱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도 천장이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 입을 열지 말라 한 모양이군.”
“…….”
“일국의 안주인이라 한들 강호의 협사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려고 부른 마당에 그따위 예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편히들 보고, 편히들 말하라.”
“황공하옵니다.”
세 사람이 허리를 폈다.
잠시 간의 침묵이 어렸다.
“놀랍구나.”
황후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사람의 눈빛은 저마다 다르다고들 하지. 하나 그것은 느낌에 불과하다고 여겼거늘, 그대들은 다르구나. 하나같이 비범한 안광을 뿜고 있어. 누가 봐도 분명히 알 수 있을 만큼.”
“…….”
“궁의 어떤 무장에게서도, 어떤 문관에게서도 이처럼 강렬한 눈빛을 본 적이 없다. 참으로 궁금하구나. 그대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팽무강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희는 한 자루 칼날 위에 두 발을 올리고 사는 필부에 불과할 뿐입니다.”
“과례는 비례라 하였다. 그리 겸손하지 않아도 괜찮다.”
팽무강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황후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궁의 문관들 몇몇이 무림맹과 인연이 깊다고 들었는데.”
“…….”
“본후가 자네들을 왜 불렀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미 이쪽 상황을 어느 정도 안다면, 괜한 말로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황후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흐릿한 연기가 그녀의 한숨을 따라 미묘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우리를 도와주었으면 한다.”
짧고 간결한 말 안에 무수히 많은 감정과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 말 이후 황후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세 사람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약간의 침묵이 일었다.
한옆에 서 있는 도번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졌다.
‘이자들이.’
일국의 안주인께서 도와 달라 요청하고 있었다. 사실 말이 도와 달라는 것이지, 존귀한 분께서 직접 하는 말이라면 이는 명령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제아무리 나라의 힘이 약해졌다 한들 황제와 황후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도와 달라 했으면, 응당 고개를 조아리며 그러겠다고 해야 옳았다.
‘말이 정파요, 백도일 뿐 무림인들은 황궁의 권위를 무시한다. 참으로 무도한 놈들이로구나!’
그때, 연위가 입을 열었다.
“편히 말하라 하셨으니, 허심탄회하게 입을 열어 볼까 합니다.”
“쓸데없는 예법 때문에 서로 간에 오해가 쌓여서는 안 될 일이지. 강호의 방식대로 해도 좋으니 편히 말하라.”
“듣기로, 현재 황궁은 황후 폐하의 외척 세력과 우헌 태감을 중심으로 한 환관 세력이 권력을 양분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순간 도번의 눈에 분노의 빛이 어렸다.
“이보시오!”
그때, 황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더 끼어들면 도 천장은 이곳에서 쫓아낼 것이다.”
“폐, 폐하!”
“솔직담백한 대화를 원한 것은 짐이었다. 또한, 예법을 벗어던지라 말한 것은 우리의 대화에 한해서일 뿐이거늘, 자네는 어찌 짐의 대화에 끼어드는가.”
도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 자리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는 도번의 몸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번 역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무장이었다. 그런 그가 황후의 말 한마디에 공포에 질렸다. 그만큼 황후의 권력이 대단하다는 방증이리라.
“맞다. 연가의 주인, 연가주 말대로 현재 황궁의 권력은 외척과 환관 세력이 양분하고 있지.”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좌장으로 계시는 외척 세력의 힘은 환관 세력에 비해 어느 정도나 열세이옵니까?”
번쩍!
발 뒤에 드리워진 황후의 그림자, 그 두 눈에서 형형한 광채가 뿜어졌다.
“문관들이 그런 것도 말해 주던가?”
“백번 생각을 해 봐도, 열세가 아니라면 저희 같은 강호의 무림인들을 끌어들이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구나.”
“그렇다고 권력의 추가 눈에 띄게 기울어져 있었다면, 저희에게 눈을 돌리지도 못하셨을 겁니다. 황궁의 권력 싸움에서, 무(武)란 생각지도 못한 한 수가 될 수 있을지언정 결정적인 한 수는 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
“설령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어떻게든 저희를 불러들이셨다고 해도, 굳이 황제 폐하의 조직까지 움직여 시험해 볼 생각은 못 하셨을 겁니다.”
“……!”
팽무강과 제갈아연이 당황해서 연위를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예법을 내려놓은 솔직한 대화를 원한다고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직설적인 말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황후의 반응이었다.
“그대들의 안목은 참으로 대단하구나. 세정번을 부린 것이 우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느냐?”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정번을 통해 그대들의 힘을 시험했다는 걸 알았다면, 그 이상의 진실에도 닿았을지 모르겠구나.”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께서 이 난국을 평정할 힘이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팽무강의 눈이 흔들렸다.
“연가주!”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를 입에 올렸다. 연위는 지금 황제에게 아무 힘도 없다는 말을 황후 앞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솔직함에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 연위의 발언은 여러모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그때였다.
촤르르르륵!
두껍고 부드러운 발이 올라갔다.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황후. 팽무강과 제갈아연은 물론 연위조차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라.”
잠시 멈칫했던 세 사람이 고개를 들어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세 사람은 눈이 부시는 것을 느꼈다.
붉은색으로 물들인 최상급 비단 위, 황금 수실로 잔뜩 치장된 황후의 의복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고귀하고 기품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 의복조차도 황후의 미안(美顔)에 비하면 빛이 바래는 느낌이었다.
이제 곧 마흔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방년의 처자 못지않은 젊음으로 가득했다. 옅은 색조의 화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얼굴이 하나의 무기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가히 압도적인 미모였다.
팽무강은 물론 제갈아연조차 한순간 넋을 잃었다.
반면 연위의 눈빛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 역시 황후의 자태에 놀랐지만, 그의 눈은 언제나 상대의 본심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황후의 눈이 연위에게 닿았다.
눈이 마주쳤음에도 연위의 얼굴은 담담했고, 눈빛 역시 이전처럼 깊기만 했다.
황후의 얼굴에 묘한 빛이 어렸다.
“대단한 정심(貞心)이로구나. 천하제일의 협가라고 명성이 자자하다던데, 과연 그 명성이 잘못되지 않았음이다.”
“송구하옵니다.”
“솔직담백한 대화……. 그래, 짐은 그러한 대화를 원했지. 하나 연가주의 발언에 잠시 울컥한 것을 보면, 짐 또한 제대로 된 준비가 안 된 모양이다.”
“…….”
“방금 뱉은 말도 지키지 못했으니 얼마나 못나 보였겠나. 부디 짐을 용서하게.”
연위가 고개를 조아렸다.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호호.”
짧고 나직한 황후의 웃음소리.
그 웃음 한 번에 어두운 궁내가 일순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미모만으로도 상대를 홀리는 무기가 되는데, 웃음소리 역시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이는 천성적인 매력이었다. 타고난 자태가 압도적인 미(美)로 가득하다. 천하 권력의 정점이라는 황제가 어찌 이 사람을 황후로 삼았는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말이 옳다. 당금 황제 폐하께서는 아무런 힘도 없는 허수아비나 다를 바 없지. 그리고…….”
황후의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것은 자업자득이야. 능력이 없다면 눈치라도 있어야 하고, 눈치마저 없다면 최소한의 보신이라도 해야 할 텐데, 그분께서는 이도 저도 하지 못한 채 방탕한 향락에만 빠져들었지.”
맹렬한 비난이었다. 듣는 세 사람이 다 놀랄 정도의 폭언이라 할 수 있었다.
“짐에게는 야망이 있네. 하지만 그 야망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소소하고 안락한 것이지. 그러나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바탕이 필요하다네.”
“바탕이라 하심은……?”
“황궁의 안정화.”
“……!”
황후의 얼굴에 엄기(嚴氣)가 어렸다.
“그대들이 짐의 요청을 들어준다 한들, 무림맹의 병력을 궁으로 끌고 올 수는 없는 노릇이네. 양지(陽地)에서의 무력 점거는 황실의 위엄을 진창에 빠트리는 최악의 수야.”
“…….”
“내가 자네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야.”
“말씀하십시오.”
“우헌 태감의 죽음.”
“……!”
“황상께 아양을 떨어 얻은 권력으로 황궁의 위엄을 해치고 있는 그 환관 놈을 죽여 주길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