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6화. 보이지 않는 눈 (1)
패율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함께 갔으면 하는 기색이긴 했지만, 그 역시 나름대로 정비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그의 눈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뜻했다. 언제나 격렬한 싸움만을 원하던 그였지만, 한차례 전쟁을 겪고 난 이후 그는 싸움보다 가치 있는 무언가도 있음을 깨달았다.
연호정으로서는 다행이었다.
“준비는 다 됐나?”
양천의 물음에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금방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뭐, 처리랄 게 있겠나. 비왕의 반응만 보고 돌아오면 될 텐데.”
“그걸로 끝난다면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흐음.”
“비왕이 정말로 황궁과 관련이 있다면, 적이나 아군 둘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아군이라면 괜찮겠지만, 적이라면 꽤 힘든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지요.”
“그렇겠지. 설령 비왕이 황궁과 연이 없다 해도 성천의 강자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들이야. 어떤 상황이라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겠지.”
“그럴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장한 건가?”
“예?”
양천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경갑 차림에 흉흉한 월도(月刀)까지. 정말 전쟁이라도 치르러 가는 모양새군.”
연호정은 평소와 달리 용아철기단의 경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갑과 같은 회흑색 투구도 모자라 눈만 드러나는 검은색 복면까지 둘렀는데, 그 모습이 특수 임무를 치르는 정예 기마병의 모습 그 자체였다.
심지어 손에는 광룡부와 큼직한 월도까지 들려 있다.
연호정이 말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사천과 섬서의 일을 처리하면서 놈들은 저를 확실하게 주시하고 있습니다.”
“당연하겠지.”
“그간의 반응으로 보아 얼굴이 제대로 알려지진 않은 모양입니다만.”
쩌엉!
월도와 광룡부의 창대가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광룡부만으로도 놈들은 저의 정체를 눈치챌 겁니다.”
“그러게 왜 그리 화려한 병기를 쓰나? 자네 실력이면 좀 흔한 병기를 써도 괜찮을 텐데.”
“가장 손에 익으니까요. 그리고 이 도끼들, 천하의 명인들이 만들었습니다. 위력이 달라요.”
“잘났어, 정말.”
치리리링.
연호정이 광룡부와 교룡쇄, 그리고 흑백쌍룡부를 대전 바닥에 놓아두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양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시커먼 거병은 그렇다 치고, 쇠사슬에 손도끼까지 놓고 가게?”
“혹시 모르잖습니까.”
“흐음.”
양천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함께하지 않는 일행이 있을 텐데, 그 물건들을 굳이 내게 맡기는 이유가 있나?”
“돌아오겠다는 다짐 아니겠습니까.”
“웃기고 있네. 자네에게 언제부터 그런 낭만이 있었다고.”
후우우우웅.
양천이 손을 뻗자 광룡부와 흑백쌍룡부, 교룡쇄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와 태사의 옆에 놓였다.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보기 힘든 자재로 만든 신병이기로다. 확 녹여서 팔아 버릴까?”
“그러시든지요.”
“재미없는 놈.”
양천이 태사의에 등을 묻었다.
“이보게, 호정.”
“예.”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만…… 어지간하면 앞으로는 이런 일, 남에게 맡기게나.”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생각입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야. 나는 평생 두 주먹으로 난세를 헤쳐 왔지만, 맞서 싸웠던 고수 중에는 병기를 내 몸처럼 아끼는 이들이 대다수였어. 그중 ‘진짜’들은 하나같이 제 병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더군.”
“…….”
“병기는 철이야. 철에는 생명이 없지. 하지만 그들의 끝없는 애정과 연마 아래, 생명 없는 병기는 주인의 손에서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보물이 되곤 하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간 자네가 맡았던 임무들은, 말하자면 모두 특수한 것이었어. 워낙 똑똑하고 일 처리가 좋아 잘 해결해 왔지만, 자네의 근본은 결국 무(武)에 있네.”
“…….”
“병기를 너무 섭섭하게 대하지 말게나.”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연호정의 무수한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저런 자세였다. 어떨 때는 천하 누구보다도 편협한 모습을 보여 주다가도, 상대가 진심으로 말해 주면 편견 없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줄 안다.
걱정을 참견이 아닌 걱정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 말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처럼 부담 없는 청자도 없을 것이다.
“일행은 꾸려졌나?”
“준비는 끝났습니다.”
“따로 도와줄 것은?”
“지구력이 뛰어나고 경험 많은 전마(戰馬)가 필요합니다.”
“철기단주에게 말해 놓겠네. 반 시진 안에 받을 수 있을 게야.”
“감사합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호정.”
“말씀하십시오.”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아닐세. 죽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게.”
“예.”
연호정이 대전을 나갔다.
혼자가 된 양천이 의자에 뒤통수를 묻었다.
“……허.”
왠지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는다.
양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책이 따로 없군. 언제부터 그렇게 인재 욕심이 많았다고.”
* * *
묵룡부 밖으로 향하며, 연호정은 생각했다.
‘이유를 알 수 없군.’
스륵.
잠시 걸음을 멈춘 연호정이 등 뒤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광장에선 아직 수많은 인부가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차례 완성되었다 싶었는데도 또 부족한 부분이 있는지 망치 두들기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가질 수 없음을 알 텐데도 포기하지 못하는군.’
그가 아는 양천은 상당히 깔끔한 사람이었다.
사람인지라 아쉬움을 표할 때는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에 굳이 미련을 보이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끝없이 자신을 원하고 있다. 자신이 묵룡부에 속해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도.
‘그만큼 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한참 동안 대전 방향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다시 몸을 돌렸다.
양천과의 대화 후, 어쩐지 그도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다 모였군.”
묵룡부 입구 밖에는 연호정과 같은 경갑과 투구를 걸친 묵비와 강량, 진양이 있었다.
묵비는 홍련궁과 시커먼 단창을 메고 있었다. 본래 지니고 있던 검을 허리춤에 맨 강량은 투박하고 두꺼운 대검을 들고 있었다.
진양은 연호정처럼 묵룡부에서 지급해 준 철기단의 월도를 들었다.
기우희는 평소와 같은 복색이었고, 그녀의 뒤에는 오십 명의 복면인들이 서 있었다.
연호정이 복면인들을 향해 말했다.
“잘 부탁하네.”
복면인들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만약 전투가 벌어져도 자네들은 절대 나서지 말게. 자네들의 최우선 임무는 기우희 의원의 안전을 지키는 것일세. 그 부분, 꼭 명심해 주길 바라네.”
복면인들, 묵룡대의 예비 대원들은 말없이 눈을 빛냈다.
스르륵.
대원들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임무는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반 시진 후.
“연 부관.”
전마들을 이끌고 온 사람은 황석태였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뒤를 잘 부탁하네.”
황석태가 피식 웃었다.
“나는 용아철기단의 단주일세. 그 말은 부주님께 드려야지.”
“했네.”
“참 알기 어려운 사람이야.”
연호정과 묵비, 강량과 진양, 기우희 모두가 말에 올랐다.
황석태가 포권을 취했다.
“무운을 비네.”
연호정이 마주 포권을 쥐었다.
“패율 선배와 정광을 잘 부탁하네.”
“알겠네.”
“그럼.”
히히히힝!
다섯 기의 말이 투레질을 하며 북부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오십의 묵룡대원들이 은밀히 뒤따랐다.
귀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다시 떠나는 그들.
멀어지는 일행의 등을 보는 황석태의 눈에 언뜻 아쉬움이 감돌았다.
“우리와 함께한다면 좋을 것을.”
좋은 전마를 얻었지만, 일행은 육로를 통해서 올라갈 생각이 없었다.
“연락은 받았습니다. 배에 오르시지요.”
출렁이는 강가에는 거대한 배 한 척이 있었다.
신법에 자신이 있는 고수라면 모를까, 이곳에는 기우희가 있었다. 게다가 기우희를 지키는 묵룡대원들까지 생각하면 굳이 육로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수로를 이용하는 게 더 빠르기도 했다.
배는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쾌적했다.
한곳에는 말들을 위한 전용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외에 수많은 사람이 배 이곳저곳에 붙어 항해를 준비하는데, 하나같이 평생 이 일을 한 듯 행동이 무척이나 일사불란했다.
‘대단해.’
마침내 항해를 시작하는 함선.
함선이 떠나자 후방에서 십여 척의 소선이 따라붙었다. 소선 안에는 인상이 썩 좋지 않은, 딱 봐도 수적질로 먹고사는 듯한 거친 외양의 사내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장강수로채 출신의 수적들로, 함선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이들이었다. 묵룡부에서 신경을 많이 썼음을 알 수 있었다.
‘일 처리가 무척이나 부드럽고 빠르다.’
묵비는 내심 묵룡부와 무림맹을 비교해 보았다.
‘다르구나.’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함선의 선두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는 묵비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심란함이 깃들어 있었다.
‘무림맹은 묵룡부보다 덩치가 크다. 하지만 아직 맹주가 없어. 설령 맹주가 있다 한들, 연합체인만큼 이처럼 빠르고 매끄러운 일 처리는 불가능할 거야.’
물론 맹주에게 얼마만큼의 권한을 주는가에 따라 다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큰 권한을 갖고 있어도 일인 독재가 불가능한 것이 무림맹이었다.
반면 묵룡부는 달랐다.
양천이라는 희대의 걸물이 이끄는 묵룡부는 부주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체제에 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묵비였지만, 지금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녀 역시 의정군의 부장으로서 숱한 싸움을 이끌어 보았기 때문이다.
‘독재는 언제고 반드시 파탄이 나게 되어 있어. 체제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 한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난세에, 걸출한 인물 아래 충성심 넘치는 이들이 모이게 된다면…….’
묵비가 눈을 감았다.
‘무림맹도 이럴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올해도 거의 끝나 간다. 올해가 지나면 내년에는 맹주를 선출하게 될 거야.’
묵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습기 찬 하늘은 묘하게 어두워 보였다.
‘한바탕 또 난리가 나겠구나.’
그때, 연호정이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묵비가 피식 웃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세상 걱정 좀 해 봤어요.”
“그러게? 어울리지 않게 왜 그런 걱정까지 해?”
“연 공자가 하잖아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내 노고를 알아주는군. 어때? 머리 엄청 아프지?”
“머리 아픈 걸 떠나서, 기반 지식이 없으니 유추 자체가 불가능하네요.”
“알아도 힘들고 몰라도 힘들지.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래.”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묵비가 툭 던지듯 물었다.
“어땠어요?”
“뭐가?”
“흑제성이요.”
“…….”
“그때의 흑제성도 지금의 묵룡부처럼 빠르고 일사불란했나요?”
연호정은 말없이 강물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묵룡부와는 달랐지.”
“그렇군요.”
“묵룡부보다 더 빠르고, 더 파괴적이고, 더 철저했지.”
“……!”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선두 난간에 상체를 기댔다.
“양 부주는 야망이 넘치는 사람이야. 그래서 저 전대미문의 동굴 속에 숨어 살며 세상을 보고 있지. 하지만 흑제성은 달랐다.”
“…….”
“우리는 세상 밖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야망이 아닌 분명한 꿈과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게 다른가요?”
“같지만, 다르다고 생각해. 적어도 우리는 그랬어.”
“…….”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돌아보니 어쩌다 만들어진 집단이지만 그 집단이 천하를 뒤흔들 수 있음을 확신한 순간, 우리는 검게 칠해진 세상에도 빛이 있음을 증명키 위해 꿈의 선봉장이 되었다.”
꿈의 선봉장.
그 말에 묵비는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연호정이 단조로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짐승들의 세상인 흑도를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날뛰었지. 우리에게는 대단한 정치도 필요치 않았어. 그저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
“……그랬군요.”
물끄러미 강물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돌렸다.
“앞으로의 일을 상의할 거다. 선실로 들어가자.”
“네.”
멀어지는 연호정을 보며, 묵비는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아.’
연호정은 무림맹주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연호정은 백도라기에는 지나치게 패도적이니까.
그러나.
‘……흑도라면.’
흔들리던 묵비의 눈이 조금씩 빛을 내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흑도의 수장이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뭐 해? 가자니까.”
“알았어요.”
재촉하는 연호정의 뒤를 따르는 묵비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뭐가 됐든 참 흥미진진하게는 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