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5화. 반응 (6)
‘바쁘게 됐군.’
대전에서 나온 연호정은 곧장 거처로 들어갔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기우희와 함께 다시 세상으로 나가기 전, 몸 상태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기우희의 실력이라면 가는 동안 훌륭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치료의 탄력을 최대한 살릴 수 있을 정도로 내기를 다스려 놔야 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연호정은 눈을 감고 바로 운공에 들어갔다.
우우우우웅!
광명신단은 더 이상 건드릴 게 없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똘똘 뭉친 진기가 알아서 최선의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무극을 열고 광명신단을 완성한 이후, 그 빛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다. 과도한 내력 소모 앞에서도, 극단적인 내상 앞에서도 작아졌을지언정 소멸은 하지 않는다.
어느새 광명신단은 그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었다. 이 빛은 그의 생명이 꺼지기 전까지 결코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번쩍!
의지가 일자 광명신단에서 뿜어져 나온 네 줄기 진기가 제각기 사신기를 소환했다.
심장, 폐장, 간장, 신장을 담당하는 신묘한 기운이 활력을 극대화했다.
사신기는 광명신단과 같이 의지가 이는 순간 완전한 활동에 돌입했다. 내리막길로 마차를 굴리기 위해 약간의 힘을 써야 했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내려가!’라고 명령을 내리는 순간 가파른 길을 내달리기 시작한다.
진기의 반응은 곧 육신의 반응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연호정은 남들보다 유독 반사 신경이 좋은 편이라, 지금의 육신과 상성이 무척이나 잘 맞았다.
‘역시 문제는 없어.’
내공, 혈관, 신경, 근골 모두 정상이다.
그러나 최상의 상태는 아니다.
‘어느 한쪽에 문제가 생겨서 그러는 게 아니다. 전반적인 기능 자체가 저하됐어.’
고수도 사람이다. 무극을 열었다고는 해도 사람의 육신을 지닌 이상 극단적인 피로 앞에서 신체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럴 때는 그냥 푹 쉬는 게 최선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하루하루를 지나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흑암제 시절에도 지금 못지않게 치열했다. 그러나 그때는 천지의 기운을 빌려 순간순간 회복하여 신체의 기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했었다.
즉, 중심이 되는 진기가 달라졌다고 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다른 문제가 아니다.’
번쩍!
갑자기 뜨인 연호정의 눈에서 신광이 뿜어져 나왔다.
‘속도. 속도의 문제야.’
회귀 후, 그는 무서운 속도로 강해졌다.
일류만도 못했던 육신을 바로잡은 뒤, 형용할 수 없는 노력과 치열한 실전으로 불과 십 년도 되지 않아 무극을 돌파했다.
전생의 기억을 모두 안고 돌아왔다 해도 이는 대단한 위업이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절대 정상적인 속도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연가신단에서 광명신단으로 이어지는 본가의 비전을 포기하고 기존의 홍천기를 익혔다면, 사실상 나는 지금보다 더 빨리 무극을 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단기(神丹氣)를 고집한 것은 과거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였다. 무학의 대종사였던 그는 그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만약 홍천기를 중심으로 무극을 열었다면?’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오소소 일어났다.
그랬다면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피로에 사로잡혀 눈도 뜨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과정이라도 자신은 쉬지 않았을 테니까.
‘어쩌면 무극을 열고 난 이후 오랫동안 정신을 잃었을 수도 있겠지.’
의지로 신체를 통제하니, 고통과 피로라는 이상 신호조차도 무시한다. 연호정은 그런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는 순간도 오는 법. 홍천기를 익힌 채로 더 빨리 무극을 열었다면, 그의 육신은 정신이라는 등불을 꺼 버렸을 것이다. 완벽한 회복을 위해 의식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기나긴 수면이 될 수도, 아니면 죽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시 신단기를 중심으로 삼은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다만…….’
연호정이 다시 눈을 감았다.
‘한동안은 봉인해야겠군.’
훅!
활발하게 돌아가며 온몸으로 뻗어 나간 광명신단의 기운이 다시 본래의 장소로 돌아와 완벽한 빛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두근! 두근!
심장이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폐장은 들이마신 공기 속에 녹아든 자연기를 더 활발하게 받아 냈고, 간장은 피로를 유발하던 미세한 노폐물들을 모조리 해독했다.
치이이익!
연호정의 몸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불순물의 배출이다. 본래라면 소변과 대변으로 쏟아 내야 했지만, 기운으로 남은 것은 신장에서 걸러져 내공을 이용, 그대로 모공을 통해 방출되었다.
그 과정에서 광명신단은 어떠한 개입도 없었다.
지금껏 잘 키워 온 사신기(四神氣)만을 이용한 신체 통제.
어느새 연호정의 방 안은 뿌연 연기로 가득 찼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뜬 연호정이 가부좌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연호정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확실히 몸이 나아진 느낌이었다. 전투 후 지금까지 느껴 왔던 피로가 확연하게 풀린 기분이었다.
아직 모자람이 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야 했다. 목적지까지 가면서 몸을 돌보고 기우희의 치료를 받는다면, 조만간 완벽한 상태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방법은 찾았으니.’
연호정이 방을 나섰다.
쉴 시간이 없었다.
“크! 누님 엄청 잘 드시네요!”
목소리를 듣는데도 술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다소 커진 소정광의 목소리는 그답지 않은 호탕함으로 가득했다.
묵비는 웃으며 잔을 들었다. 소정광은 하하하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이렇게까지 마셔 보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아요. 아주 그냥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인데요?”
식당 구석에서 그들을 보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술 마시면서 피로가 풀린다니, 정작 피로를 풀고 온 그로서는 저런 웃기는 소리가 없었다.
묵비가 요리가 가득 담긴 접시를 소정광 앞으로 옮겨 놓았다.
“안주 좀 먹으면서 마셔, 동생.”
“음하하하! 제 위장은 강철입니다요. 안주 같은 거 안 먹어도 아무 이상이 없지요!”
“젊을 때는 괜찮아도 나이 들면 골병든다고 들었어.”
“평소에 워낙 잘 먹어서 괜찮지 않을까요?”
어느새 누님 동생 사이가 된 모양이었다.
연호정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묵비가 더 나이가 많았었나?’
사실, 이제 와서 그런 건 의미가 없다.
칼날 위를 걸으며 살아가는 무림인에게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저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면 형님이요, 누님인 것이다. 무림인들의 세계에는 그런 호탕함도 있었다.
연호정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엇? 연 대수님?”
소정광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묵비가 말했다.
“같이 한잔해요.”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한잔은 무슨. 바빠 죽겠구만.”
“왜요? 또 어디 가야 해요?”
“그렇게 됐어. 근데…….”
연호정이 소정광 옆에 앉은, 아니 탁자에 머리를 박고 엎어진 불곰 한 마리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이놈? 벌써 그렇게 많이 마셨어?”
소정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친구 주량이 덩치를 못 따라가서요. 아, 연 대수님도 아시죠?”
“알긴 하지. 그래도 이 정도였나?”
“이 자식, 누님이 어지간히 어려운가 봐요. 어색하다고 막 마시다가 이각 전부터 코 박고 쓰러졌어요.”
연호정이 혀를 찼다.
묵비가 어색하게 웃다가 재차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잠시 호북성 인근으로 가 봐야 할 것 같다.”
순간 묵비의 몸에서 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주기를 배출해 버린 것이다.
소정광이 눈을 크게 떴다.
“누님. 아까운 술을 왜……?”
“조용.”
“……넵.”
묵비가 다시 연호정을 보며 말했다.
“긴 여행이 될 것 같나요?”
“알 수 없지. 일단 상대 반응을 좀 살피고 싶어서 가는 건데, 무슨 일이 터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치이이익!
소정광의 몸에서도 허연 주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호정이 호오, 하는 감탄사를 뱉었다.
“벌써 신공을 몸에 맞췄나? 해독이 빠른데.”
“이런 쪽으로는 도가 터서요. 진탕 마시고 바로 일하는 날이 많다 보니.”
소정광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저희도 갑니까?”
“너는 안 가도 될 거다. 아니, 갈 필요가 없지.”
“예?”
“아직 약하잖냐.”
소정광의 얼굴이 뚱해졌다.
“아깝게 술만 날렸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조금 섭섭한 기색이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함께하자고는 했지만, 지금 당장 네 힘에는 한계가 있어. 적어도 네 친구 녀석한테 비빌 정도는 되어야 안심하고 쓰지 않겠냐?”
“쩝.”
“본가의 무공과 태을단을 괜히 준 게 아니야.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다녀올 동안 제대로 연마해 놔. 철기단주에게 말해 놓지.”
“알겠습니다.”
황석태에게 뭘 말해 놓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빠른 시일 내로 강해져야 한다. 그것이 지상 과제였다.
연호정이 소정광의 어깨를 짚었다.
“앞으로 네 머리가 필요한 일이 많을 거다. 묵비와 진양은 강하지만, 철저한 무인이지 계략에 능하지는 않아. 하지만 넌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강해져야 해. 지략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는 무력으로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 위험해.”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좋아.”
묵비가 물었다.
“언제 출발하죠?”
“준비되면 곧장 출발할 거야.”
“대기하고 있을게요.”
“알겠어. 그리고…….”
연호정이 발로 진양의 의자를 찼다.
덜컹!
“쿨럭!”
진양이 놀란 듯 기침을 토해 내며 벌게진 얼굴을 들었다.
연호정이 혀를 찼다.
“깨 있으면서 자는 척하지 마라.”
“커험! 언제 알았소?”
“조금 전에, 인마.”
“커허허험!”
치이이이익!
진양 역시 곧장 주기를 배출해 버렸다. 벌겋던 얼굴이 순식간에 제 색을 되찾았다.
연호정이 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반드시 간다.”
“시작부터 아주 제대로 굴려 보려고 그러시오?”
“손발을 맞춰 봐야 할 거 아니냐.”
진양이 피식 웃었다.
“알겠소. 한바탕 해보자는데 이런 곳에서 죽치고 있는 것도 내 성미에는 안 맞소이다.”
“어느 전장이 안 그러겠느냐마는, 이번에도 위험할 수 있다. 정신 무장 제대로 하고.”
“걱정하지 마시오.”
묵비가 물었다.
“다른 사람은요? 패율 선배님이나 강량은 함께 안 가나요?”
“고집은 부리겠지만, 패율 선배는 놓고 갈 거다. 당분간은 황 단주와 함께하라고 할 생각이야.”
“반발이 심할 텐데요.”
“어떻게든 설득할 거야.”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패율 선배는 굉장히 강한데.”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어서 그래.”
“그렇다면 알겠어요.”
“내일이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몸을 추슬러 놔.”
“알겠어요.”
“아, 그리고 진양은 따로 나 좀 보지.”
진양이 눈을 크게 떴다.
“나 말이오?”
“그래, 너.”
“갑자기 왜?”
“정광을 가르쳤으니, 너에게도 부족한 걸 가르쳐 줘야 할 것 아니냐.”
진양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나, 나를 가르쳐 준다고?”
“왜? 싫어?”
“……그렇진 않지만.”
“걱정하지 마라. 네 무공을 빼앗지는 않을 테니까. 네가 익힌 무공은 절학이야. 다만 부족한 건 분명하니, 더 빠른 성장을 위해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한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자, 다시 중원행이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